이 한 편의 詩

옛길에서 눈을 감다 / 곽효환

뚜르(Tours) 2023. 7. 17. 16:01

 

 

옛길에서 눈을 감다  / 곽효환

 

어느새 꽃은 지고 울울창창 초록만 우거진

거대한 협곡 아스라한 절벽에 옛길이 있다

도무지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그곳에

사람 하나 말 한마리 줄지어 간신히 지났을

길을 내고 그 길로 떠나고 그 길로 돌아온

얼굴이 검은 옛사람

그 사람 간 곳이 없다

물오른 아름드리 버드나무 그늘에 들어

이 길에서 피고 진 오랜 날들을 헤아렸다

질끈 눈 감으니

아득히 물소리 흐르고

길을 버리니 다시 길이 열린다

스스로 깊어지고 스스로 부드러워지는

강과 산과 들과 나무들……

하여 더는 가지 않기로 했다

- 곽효환,​『슬픔의 뼈대』(문학과지성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