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너를 훔친다 - 손현숙

뚜르(Tours) 2023. 9. 5. 07:25

 

 

너를 훔친다 - 손현숙

쉿! 불을 꺼.

달빛 몰래 내 몸에 담아

내 몸 안에 네 몸을 심는 거야

시냇물 하나 흐르게 하는 거야.

흐르다가 물살에 밀리고 또 밀려

어디까지, 어둠 속 내 몸의 이파리들

파릇파릇 돋아나 새록새록 뻗어서.

꽃다지 한 묶음 옆구리에 끼고

네 몸에 내 온몸을 친친 감아서

색칠하다 보면 몸 젖게 하다 보면.

하늘보다 더 푸르게 입술보다 더 발갛게

몸속 어딘가에 너의 알을 품었다가

반질반질 밤톨 같은 꼭 너 닮은

아가 하나 낳는 거야.

살금살금 다시 너를 빚는 거야

훔치는 거야 그러니까 불을……

시집 『너를 훔친다』(문학사상사, 200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