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장미의 또 다른 입구 - 나희덕

뚜르(Tours) 2023. 9. 13. 15:17

장미의 또 다른 입구 - 나희덕

오늘은 장미 한 송이를 걸어보았습니다.

열세 개의 문을 통과했지요.

꽤 은밀한 구석이 많은 꽃이더군요.

한 잎 한 잎 지날 때마다

고통스러운 향기가 후욱 끼쳐왔습니다.

꽃잎이 다 누운 뒤 남은 암술에는

노란 꽃가루들이 곡옥처럼 반짝였습니다.

꽃가루 음절들이 만든 문장을

저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그 해독되지 않는 침묵이

장미를 장미로 만드는 원천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장미 한 송이를 걷고 난 뒤에도

걷지 않은 길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

열에 들뜬 손가락은

유리조각처럼 흩어진 꽃잎을 만지며

장미의 또다른 입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들어간 적 없는 향기로운 방,

그러나 표정을 잃어버린 장미는

어떤 문도 불빛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 꽃잎에서 저 꽃잎으로,

이 꽃잎에서 또다른 꽃잎으로,

베인 손가락은 피를 흘리며 서성거릴 뿐이었습니다.

장미가 남은 향기를 다 토해낼 때까지

 

계간 『시와 시』 2011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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