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깡통 / 곽재구

뚜르(Tours) 2023. 11. 6. 07:42

 

 

깡통   / 곽재구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 곽재구,『서울 세노야』(문학과지성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