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고독한 성웅’ 충무공의 뼈때리는 어록 8

뚜르(Tours) 2025. 5. 5. 20:41

 

 

성웅(聖雄)은 성인(聖人)과 영웅(英雄)을 합친 말이죠? 우리 역사에서 성웅이 누군지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분을 떠올립니다.

 

1545년 오늘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난 충무공 이순신이죠? 충무공의 고향인 서울 중구, 현충사가 있는 충남 아산시와 해군 제독으로 활약한 전남 여수시, 경남 통영시 등 전국 곳곳에서 충무공 탄신 8주갑(60년이 8번 되풀이된 것) 행사가 펼쳐집니다.

 

충무공은 고매한 인격을 갖추고 삶의 원칙을 지키려 노력하면서도,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승전의 역사를 쓴 명장이지요. 그렇다고 보통 사람과 달리 희로애락에 초월했던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면서 모진 운명, 만성 질환과 싸우며 최선의 삶을 살았지요.

 

충무공의 인품과 인간적 면모는 《난중일기》에 켜켜이 쌓여 있지요. 국보 제76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한 《난중일기》에는 충무공의 일상생활과 가족사의 애환, 사람들에 대한 솔직한 평가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지요.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괴로워하는 모습, 아들과 어머니의 죽음에 탄식하는 모습이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합니다.

 

성웅도 사람으로서 누구나 겪는 아픔과 슬픔, 신체의 병을 견디면서 괴로워했습니다. 끊임없는 불운을 밖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운명을 탄식하고 원망도 했습니다. 주위의 모함과 시기, 불평불만을 알면서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세계사의 기적을 이뤘고 역사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오늘 충무공 탄신 8주갑에 성웅이 남긴 글과 말을 되돌아보며, 우리 자신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요? 충무공은 겁과 의심 많은 장병들을 다독이며 모사꾼들의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임금과 신하들의 방해 속에서 속을 삭이며 묵묵히 갈 길을 갔는데, 우리는 영웅에 가까울까요. 아니면 그를 시기하고 비난하는 사람에 가까울까요? 끊임없이 영웅이나 성인을 비웃거나 비난하고, 또는 방해하거나 괴롭히면서도 결코 반성하지 않고 건전한 비판자로 자위하는 그런 부류는 아니겠지요? 오히려 묵묵히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영웅에 가까운 사람이겠지요?

 

①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죽을 각오로 싸우면 살고, 살려고 눈치 보면 죽는다.” 충무공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중국 병서 《오자(병법)》에서 인용해 난중일기에 기록했다.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서양에도 비슷한 경구가 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볼테르가 정확히 말했듯, 우리가 성공할 때에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죽을 때에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고 갈파했다.

 

②일부당경, 족구천부, 금아지위의(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그렇다.” 난중일기의 위 기록에 이어서 나온다. 진나라 좌사가 지은 ‘촉도부(촉나라로 가는 길)’의 글귀를 살짝 바꿔 인용했다.

 

③금신전선상유십이, 출사력거전즉유가위야(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죽을힘을 다해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조정으로부터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서 충무공이 올린 장계에서 한 말.

 

④물령망동, 정중여산(勿令妄動, 靜重如山)=“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산처럼 침착하라!” 1592년 5월 7일 임진왜란에서 처음 승리한 옥포해전을 앞두고 장병들에게 한 말.

 

⑤경적, 필패지리(輕敵, 必敗之理)=“적을 가볍게 여기면 반드시 지는 것이 세상 원리다.” 1593년 2월 22일 웅천에 숨어있던 왜적을 격퇴하기 전에 한 말.

 

⑥“내일이 막내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된다. 마음 놓고 통곡할 수도 없어 군영 안에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소금 창고에서 혼자 울었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16일 기록. 왜군이 명량해전에서 패한 뒤 아산을 보복 공격할 때 맞서 싸우다 전사한 3남 면의 죽음을 슬퍼하며.

 

⑦“나라에 충성을 다하려 했지만 죄인이 됐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 했는데 부모마저 돌아가셨네.”=충무공이 모함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백의종군하러 떠날 때, 어머니가 여수에서 배를 타고 아들을 보러 오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면서. 충무공은 어머니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전장으로 가야만 했다.

 

⑧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전투가 급하니, 절대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노량에서 왜군을 섬멸한 최대, 최후의 해전에서 54년 파란만장한 성웅의 삶을 마감하며 한 말. 충무공의 조카 이분이 쓴 《충무공행록》에 기록이 남아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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