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놋그릇 ​/고영민

뚜르(Tours) 2025. 5. 5. 20:59

 

 

놋그릇  ​/고영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쓰던

놋그릇을 어머니로부터 받아왔다

앞으론 이 그릇에 밥을 퍼 달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늘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밥을 드시곤 했다

말미엔 밥그릇에 숭늉을 부어 드셨다

나도 아버지처럼

말없이 밥을 먹었다

숭늉을 부어 먹었다

가끔은 몸 없는 아버지가 나를 통해

밥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같은 밥그릇 속에서 부자는 늙어갔다

나는 점점 아버지의

입매를 닮아갔다

비워질수록

치렁치렁 숟가락 부딪는

소리가 났다

―계간 《문학청춘》(2025,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