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와 '행함'
복음서를 읽다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 구절이 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구절을 묵상하다 '존재(being)' 와 '행함(doing)'이라는
두 단어가 떠올랐다.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물음은 '행함(doing)'의 철학과 맥을
같이 한다.
우리의 교육은 근면의 덕이 강조되고 개인의 능력이 곧 성공의
척도가 되고 있으니 '행함'이 우선하는 교육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능력이 없는 사람은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일까?
예를 들어 몸이 불편한 장애우나 의식이 없거나 움직일 수 없는
중증환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인가, 아니면 가치의 질적인
면에서 뒤떨어지는 사람인가?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어떠하실까?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행함이 있기 때문일까?
과연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 것일까?
미국의 대부호 데일 카네기의 젊은 시절,
그가 막 사업을 시작했을 때 마침 미국을 강타한 불황으로
그는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그 절망감에 그는 삶을 마감하고자 결심하고 집을 나섰다.
뉴욕에 살았던 그가 허드슨 강에 투신하려고 강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한 남자가 소리쳐 불렀다. 뒤돌아보니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제대로 된 휠체어도 아닌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앉아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연필 한 다스만 사주시겠습니까?"
카네기는 주머니에 남아 있던 1달러짜리 지폐를 건네주고는 강을 향해
걷고 있는데 그 남자는 엉성한 휠체어 바퀴를 굴려가며 카네기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연필을 가져가셔야죠."
"됐습니다. 나는 이제 연필이 필요없습니다."
카네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두 블록이나 따라오면서 연필을
가져가든지 아니면 돈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는 동안 내내 그 남자는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결국 연필 한 다스를 받아든 카네기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자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훗날 카네기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두 다리가 없으면서도 웃고 있는 그를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이렇듯 웃고 있는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는 새로운 의지를
불어넣은 것이다.
'행함'의 철학을 살던 젊은 카네기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은
스스로를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기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두 다리가 없는 젊은이의 웃음에서 배운다.
존재 그 자체가 없다면 행함 또한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은 우리가 무엇을 행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 그 자체로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믿음은 '행함'이라기보다는 '존재'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봉성체를 해드리기 위해 병실에서 만난 어느 환자는 머리를 굵은 철사로
고정시켜 놓아서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를 보면서 속으로 참 고통스럽겠구나 생각했는데 그는 밝은 웃음으로
봉성체를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 짧은 순간 나에게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현현이었고,
그 웃음 속에 커다란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뵐 수 있었다.
은총의 자리였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네」에서
류해욱 신부 지음 / 바오로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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