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5727

대전역 가락국수 ​/공광규

대전역 가락국수  ​/공광규​​철로가 국수 가닥처럼 뻗어 있다철로에 유리창에 승강장에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가 국숫발을 닮았다​청양에서 대치와 한티고개를 울퉁불퉁 버스로 넘어와김이 풀풀 나는 가락국수를 먹던 생각이 난다부산행 열차를 기다리던 열 몇 살 소년의 정거장소나기를 맞으며 뛰어오던열 몇 살 소녀가 있었던 대전역이다​사십 년 전 기억이모락모락 수증기로 피어오르는 국수그릇​선로도 건물도 오고가는 사람도 많아지고국수그릇과 나무젓가락이 합성수지로 바뀌었지만국수 맛은 옛날처럼 얼큰하다​가락국수가 소나기처럼첫사랑처럼 하나도 늙지 않았다​​ㅡ 시집 『파주에게』(실천문학사, 2017)

이 한 편의 詩 2024.09.08

구월 찬가 /안영준

구월 찬가   /안영준  무더위도 서서히 사라지고그토록 구애를 외치던 매미도짝 찾았나보다 가냘픈 몸으로허공을 이륙한 잠자리는광활한 들판에화려한 춤사위 하며 비행한다 푸르던 잎새는어느새 만삭되어황금 물결 파도치고두렁에 구절초는백의 분장하고 여백을 채운다 유독 길었던 당년 여름은산들바람에 묻혀자취를 감추고만산홍엽 채색된 계절 왔구나

이 한 편의 詩 2024.09.02

9월의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이채

9월의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이채꽃피는 봄날엔 할말도 많았겠지요꿈은 땀으로 흐르고땀은 비처럼 내렸어도어느꽃도 만날 수 없는 그런날이 있었겠지요기도하는 꿈빛으로 아침이 찾아와도누워서도 잠들 수 없는 그런밤이 있었겠지요별을 보고도 잠언을 읽지 못하고어리석은 잣대로만 재고 산 가벼움에 대하여고독한 진실과 홀로 견딘 무거움에 대하여무심한 달빛창 바라보며 한숨도 지었겠지요우연히 들었습니다당신의 허전한 기침소리를당신이 가을로 깊어갈 때노을처럼 내리는 그리움이 있다면잉크처럼 번지는 외로움이 있다면길어진 시간의 무게 때문입니까얇아진 낙엽의 부피 때문입니까9월의 당신이여!삶에 대해 이야기하기엔 아직 이르니이 저녁 노을이저 들녁 낙엽이왜 이렇게 쓸쓸하냐는 말은 조금 늦어도 좋겠습니다우연히 보았습니다타도록 몸을 말리..

이 한 편의 詩 2024.09.01

사랑하는 그대 /김용호

사랑하는 그대  /김용호나에게 위안이 되어준 사랑하는 그대나의 마음은 항상 그대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소중한 의미가 되어 줄 역할을 해주며내 곁에 머물러주신 그대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늘 그랬듯이 이해해주고 용서해주고아침저녁으로 나를 위해 기도해주신 그대 참 고맙습니다.사랑한다는 그 말은 내 가슴에 항상 행복으로 채워집니다.항상 그대도 나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좋음이 많은 삶이 우리 둘에게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우리의 사랑이 서로 깊이 파고 들어가 확장되길 소망합니다.나에게 특별한 사랑하는 그대 영원히 사랑하렵니다.

이 한 편의 詩 2024.08.31

폭염 아래 / 류인채

폭염 아래   / 류인채 ​풀 뽑는 여자들이 언덕에앉아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펑퍼짐한엉덩이들이 이마에 불볕을 이고 잡초를 뽑고 있다뽑혀나간 쇠비름 토끼풀 바랭이가 볕에시들고 있다 손톱에 풀물이 든 여자들이 달아오른호미를 팽개치고 나무 그늘에 들고폭염이 여자들을 놓치고 있다손부채를 부치는 수다들이 목에 두른 수건을 풀어 땀을닦는다 깔깔깔 한바탕웃어젖힌다 된더위가한풀 꺾인다 풀어 놓은 잡담이 순식간에웃음의 무게를들어 올리고 여자들이 애드벌룬처럼 둥둥 떠오른다폭염이 뻘쭘하게그늘 밖에 앉아 있다​- 류인채,『소리의 거처』(도서출판 황금알, 2014)

이 한 편의 詩 2024.08.28

처서 /이재봉

처서   /이재봉모기가 처서비를 피해 숲속으로 달아나다가톱을 든 귀뚜라미를 만났습니다 모기는귀뚜라미에게 왜 톱을 들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귀뚜라미는 긴긴밤 독수공방에서 임을 기다리는처자의 애를 끊으려 톱을 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새벽녘 빗소리에 문득 눈을 뜨니 쓰륵쓰륵어디선가 톱질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들여다보니귀뚜라미 한 마리가 방구석에서 울고 있었습니다우는 소리가 얼마나 애절한지애끊는 톱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이 한 편의 詩 2024.08.23

배롱나무 붉은 가슴 /박종영

배롱나무 붉은 가슴  /박종영뭉게구름 이는 팔월 아침에배롱나무 붉은 웃음소리 들린다한철 여름이 지나면서 신의 선물로 준 꽃이지금부터 백일을 필 것이라고 귀띔한다.습하고 끈적한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마다삼복더위를 받아내는 시원한 웃음소리여름부터 초가을까지 피는 꽃의 속삭임이 즐겁다.애틋한 사연을 달고 하늘거리며가슴 잇대어 피어나는 웃음은 누구의 본능인가?처서물 지나 선들바람이 불어올 때까지도솔암(兜率庵 ) 비켜가는 구름 한 조각꽃불에 곱게 물들어 흘러갈 것이다.세상살이 어둡고 괴로울 때마다너를 향해 살아감의 경계를 허물려고 해도낮은 숨소리로 채워지는 세월의 눈물꽃이다.혼탁한 세상을 씻어내기 위해한 움큼 배롱나무 붉은 가슴을 훔친다그래도 간지럼 타며 피어나는 꽃,백일(百日)을 꽃등 달고 우쭐대는 배롱나무.

이 한 편의 詩 2024.08.22

네거리에서​​ / 김백겸

네거리에서​​  / 김백겸  신호등에 걸려 행인들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입학과 취직을 그리고 결혼을 기다려야 했다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부치고그 사랑이 스탬프가 찍혀 다시 돌아오는 것도 기다려야만 한다고 오후의 하늘은 말하고 있었다​거리에 붙은 간판처럼, 다르지만 똑같은 얼굴을 하고 서서 행인들은 아직 건너지 못한 길 저편을 바라보았다건너 손에 쥐어야 할 꿈, 진실, 영원에 대한 단서가 길 건너편에 있는 것처럼​기다리는 시간을 비집고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겨울바람과 가로수 잎, 마른 햇살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길 건너편 행인들도 이쪽을 쳐다보았다​이윽고 파란 불이 켜져 행인들은 횡단보도를 건넜다길 하나를 건너서 또 다음 신호등에 걸린 행인들은 도시문화의 기다림에 익숙해져이제는 죽음마저도 기다릴 수 있..

이 한 편의 詩 2024.08.19

여름에 애인이 있다면 / 김이듬

여름에 애인이 있다면  / 김이듬아침 일찍 카페에 가지 않겠어카페 문 열릴 때까지 서성이다가콘센트가 있는 구석 자리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겠어​한여름에 애인이 생긴다면집에 당장 에어컨부터 달겠어나의 밝은 방으로 그를 초대하겠어같이 마트 가서 고등어를 골라도 재미있겠지​하지만 애인을 찾을 수가 없네둘러보면 유쾌하게 떠드는 사람들뿐이야내가 다정해보이지 않는 건 알아만약 내가 식물이라면 내부에 붉은 꽃을 피우는 과야저기 혼자인 이는 온라인게임만 하고 있군말을 붙일 찬스도 없네​“이렇게 나이 먹은 사람이 오실 데가 아니잖아요.”마주 앉은 이가 찡그리며 말했지우연히 부킹한 것 뿐인데친구 부부 따라 춤추러 간 것뿐인데​그날 샴푸나이트클럽 사이키 조명 아래에서그도 내 또래로 보였는데인간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젊게 생각..

이 한 편의 詩 2024.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