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5833

집에 가자 /이화은

집에 가자  /이화은​​우는 아이에게 집에 가자고 하면 뚝 울음을 그친다집은 울지 않아도 되는 곳인 줄 아이는 알았을까​전학해 온 지 한 달 된 학교앞에 놓은 시험지는 깜깜하고 깊었다심해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집에 가고 싶었다​빈 시험지 위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선생님이그래 눈물만한 답은 없지​내 시는 아직도 눈물만한 답을 얻지 못해 헤메고 또 헤맨다​객짓밥이 유난히 시린 날은 집에 가고 싶었다집에 가자 집에 가자이 말을 두텁게 덥고 잠들곤 했다​신접살림 집에 딸을 두고 돌아서며 어머니는 몇 번이나이제는 여기가 네 집이다 못을 박았다그래도 나는 자주 집에 가고 싶었다우는 아이 손을 잡고 집에 가자 달래면서도나도 내 집에 가고 싶었다​어머니 돌아가실 즈음혼미한 중에도 ..

이 한 편의 詩 2025.03.24

봄 산행 / 임영조

봄 산행   / 임영조 ​사람이 그리운 날사람을 멀리하고 산에 오른다오르면 오를수록 산봉은짙푸른 색정만 상승하는 곳색이 공일까? 공이 색일까?이 세상 날고 기던 목숨들종당에는 산으로 가기 마련그러니까 등산은 사전답사 같은 것?인파 넘치는 관악산 피해매봉에 올라 야호! 고함 한번 지르고다시 청계산 올라 天空을 받는다그제서야 법어로 돌아오는 메아리네가 산이다! 네가 부처다!떨갈나무 차일 친 오솔길 가노라면찔레꽃이 하얀 지등을 켜고자, 여기를 보세요!때죽나무 꽃초롱 조리개 열고일제히 터뜨리는 플래시 세례(우상은 늘 외눈박이 편견들이 세웠다!)연초록물 번지는 잡목림 사이사이버짐처럼 허옇게 핀 산벚꽃색이 넘치면 보는 눈도 가렵다밤나무가 되려다 만 너도밤나무아직도 숙제를 못해왔는지손 들고 벌 서는 아이처럼 멋쩍다자..

이 한 편의 詩 2025.03.22

기차에 추억 싣고 /류인순

기차에 추억 싣고  /류인순십수 년 만에 기차에 올라창밖에 시선을 두니잊힌 줄 알았던 추억 하나대롱대롱 매달린다어린아이 때 처음 탄 기차창밖 풍경이 뒤로 달아나며순간이동 하는 듯 신기해서눈과 입이 마구 들떠 있었지내 살아온 뒤안길엔어떤 풍경이 사라지고난 무엇을 남기고 왔을까문득 깊은 생각에 잠긴다사계절 아름다운 풍경처럼내가 걸어온 풍경에도아름다운 흔적이총총 남았으면 참 좋겠다.

이 한 편의 詩 2025.03.20

꽃바람 /정채균

꽃바람  /정채균잔설 사이 피어나는 복수초타고난 끼 있어 불안하던 터라한겨울 깊이 묻어 가두었는데살며시 삐져나와 눈웃음치니미워할 수 없는 처자일세곱게 있으면 중매서려 했는데물오른 매화 낭자는망울 터트려 진한 화장하고진홍빛 똥꼬치마 흔드니보는 이 얼굴 붉혀야 하네실개천 솜털 단장한 버들이는개나리와 눈맞아 담 넘더니뒷동산 올라 부둥켜안고부비부비 숨넘어가는데점잖은 뭇 사내들 참꽃술 취해꽃구경 나서도 막을 수 없어라.

이 한 편의 詩 2025.03.13

물소리는 그리움 /윤경재

물소리는 그리움  /윤경재  물이 껍질을 벗을 때투명 속살을 훔쳐본숨은 벽들이 놀라 메아리친다물이 순하지만은 않구나 세찬 물소리는 그리움의 거리바위가 얼마나 단단한지조약돌이 얼마나 둥근지이끼는 그렇게 부드러운지모든 뿌리와 달빛가재와 송사리를 품으며물은 제 살갗마저 비비며 외친다 계곡도 벼랑도 훌쩍 넘어서는마주침으로먹먹한 가슴을 돌아보게 한다 살아있음은 그리움이다그리움은 앞으로 가는 바퀴이다

이 한 편의 詩 2025.03.10

꽃들은 모두 다르게 산다 /구연배

꽃들은 모두 다르게 산다  /구연배누구나, 살면서꽃이거나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때론 격렬히 때론 우아하게마음을 살피고 몸을 드러내지만꽃이 되고 향기가 되는 일이 어디 쉬운가.그런즉 들로 나가 꽃을 만나 보라.향기를 맡아 보라.그대가 바라는 꽃들, 향기들지천으로 피어나고공간 구석구석 은은히 깃들여 있다.그리고 자신에게 물어 보라.무엇을 보고 느꼈는가를.꽃들은 모두 다르게 산다다르게 사는 것이 꽃이고 향기다.나이를 먹는다는 것

이 한 편의 詩 2025.03.06

경칩(驚蟄) /임보

경칩(驚蟄)   /임보  2064년 2월 23일일본 기상청의 지진 관측소가이색적인 보도를 했다일본열도의 모든 곳에땅 속의 개미란 개미는 다 지상으로 나와나무 위로 기어오른다고 했다 2064년 2월 25일가축들은 우리를 박차고 튀쳐나오고뭍의 짐승들은 다 산 위로 몰려갔다수십만 마리의 들쥐떼들은서쪽 바다를 향해 뛰어들기도 했다 2064년 2월 28일나뭇가지 위에 둥우리를 튼 날짐승들도철새처럼 떼를 지어북쪽 하늘로 날아갔다 2064년 3월 2일일본의 모든 공항이란 공항은떠나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아비규환을 이루었다 2064년 3월 3일 새벽마른 하늘에 천둥이 울고출렁이는 배처럼 땅이 흔들렸다떠오르던 샛별이 다시 주저앉고후지산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바다는 갈라져 불을 뿜고수백 미터 솟구친 해일이모든 섬들을 삼..

이 한 편의 詩 2025.03.05

남의 이야기 / 고영민

남의 이야기  / 고영민  주말 저녁 무렵아내가 내민 음식물 쓰레기통을 비우러밖에 나왔는데아파트 옆 동 쪽으로 걸어가는할머니의 뒷모습에 깜짝 놀랐다영락없는 내 어머니였다돌아가신 지 삼 년 된 어머니가 다른 모습으로아직 이승에 살고 계신 건 아닐까 하는생뚱한 생각으로한동안 쳐다보았다​어제 퇴근길사내아이의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에뒤를 돌아보았다딸만 둘인 내가모르는 사내아이의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에왜 돌아보았을까​​- 『햇빛 두 개 더』, 문학동네, 2024

이 한 편의 詩 2025.03.03

봄비 오는 날 /천담 박흥락

봄비 오는 날  /천담 박흥락  봄비 솔솔 마당을 적시고봄바람 타고 달려온 봄 빗방울이창문에 눈물처럼 흐르네 따뜻한 아메리카노 커피에흐르는 빗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니 덩달아 가슴속 그리움이 썩여져쌉싸래한 맛을 내네 창도 눈물 흘리고가슴도 눈물 흘린다 봄비는 그리운 그대 끄집어내어빗방울 속에 태우고흐르는 창에도 미끄럼 태우고 서산에 구름 붉게 물들일 때내 가슴을 한없이 불사르네!

이 한 편의 詩 2025.03.02

3월 /임우성

3월  /임우성  오늘도 마누라는교회에 가서나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거룩하신 품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얼마나 간절하게 빌었을지를돌아와 바라보는 측은한 눈빛으로 알겠다뿐이랴술 좀 덜 먹게 해 주시라고술먹는게 마음에 안드시더라도술버릇이 나쁜건 아니고사람이 착한 것은 알고 계실 터이니아프지 않게 해 주시라고빌고 또 빌어 간절함이 진실하므로 분명응답이 있을 것임을 굳게 믿고 있는마누라보다마누라를 가엾이 여기시고 들어 주셨을하나님께 너무 송구스러운낮술 얼큰한 삼월 오후.

이 한 편의 詩 2025.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