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그 뒤안길

굳세어라 금순아!

뚜르(Tours) 2009. 1. 14. 09:37

굳세어라 금순아!

 

1950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던 미 해병 1사단은 그 혹독한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라이프’지 종군기자가 길가에서 꽁꽁 언 통조림을 포크로 파먹고 있던 한 해병에게 물었다.
“지금 가장 절실한 게 뭔가?”
여러 날 동안 깎지 못한 수염에 입김이 눈꽃처럼 뒤덮여 있던 그 해병은
며칠 밤을 지새워 행군한 탓에 충혈된 눈으로 기자를 쳐다보며 짧게 답했다.
“내일이오.”

# 58년 전인 50년 12월 13일.
흥남 부두는 인산인해였다.
장진호에서 후퇴해온 미 해병 1사단 등 10만여 명의 병력과 피란민 9만8000여 명이 한꺼번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배가 와도 군 병력과 장비를 수송할 배였지, 피란민을 태울 배는 애초에 없었다.
그러나 피란민들은 그 추위에 꼼짝 않고 부두를 떠나지 않았다.
이미 육로는 막혔고 유일한 탈출구는 배를 타는 것이었다.
배를 타야 ‘내일’도 있었다.

# 함흥에서 흥남까지는 30리 거리다.
마음 먹고 걷자면 하루에 갈 거리지만 7살의 김성부(현 제우인베스트먼트 회장)는 일주일 걸려 흥남 부두에 닿았다.
어린 발걸음이 짧아서가 아니라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었기 때문이다.
함흥의 공군비행장에서 약혼자와 생이별한 이관희(현 서남재단 이사장) 역시 흥남으로 왔다.
흥남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가야 꿈에도 그리던 약혼자 이양구(오리온 창업주·작고)를 만날 희망이라도 생기기 때문이었다.

# 50년 12월 14일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을 통괄했던 미 제10군단 앨먼드 장군은
의사 출신 통역관 현봉학의 간절한 호소와 참모부장 포니 대령의 진언에 따라
피란민을 군 수송선에 태우기로 전격 결정했다.
피란민들에게 ‘내일’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군 병력과 장비를 수송하는 것이 철수작전의 첫째 목표였기에
피란민 수송은 기껏해야 5000명 안팎의 인원으로 제한됐다.
그나마도 탱크와 야포 등 군 장비 사이에 피란민을 태운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배를 타느냐 못 타느냐가 삶과 죽음을 가름하는 일이었기에 밀려드는 피란민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앨먼드 장군은 남은 군 장비 수송을 포기하고 최대한 피란민을 배에 태우기로 했다.
그리고 남겨진 군 장비는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게 폭파됐다.
흥남 부두와 함께.

# 7살의 어린 김성부도, 약혼자와 헤어진 이관희도 군 수송선에 천신만고 끝에 올랐다.
수송선은 흥남 부두를 떠나 일주일 만에 거제도 장승포에 닿았다.
항해하는 동안 사람들로 가득 찬 배 안은 삶과 죽음의 그림자가 교차하는 인간 생존의 처절한 막장 그 자체였다.
배 안에서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간신히 배를 탔지만 기진맥진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바다에 던지는 광경도 목격됐다.
그렇게 사람들은 생과 사의 기로를 넘었다.
그들의 초라한 피란 보따리 안에 담긴 것은 오직 하나, ‘내일’뿐이었다.

# “눈보라가 휘날리는/바람 찬 흥남 부두에/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금순아 어디로 가고/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가수 현인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첫 대목이다.
홀로 사선을 넘었던 이관희는 거제도에서 기적처럼 약혼자 이양구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영도다리 근처에서 신혼의 삶을 꾸렸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내일을 만들어온 사람들의 자식이고 이웃이고 그 본인이다.
지금이 너무 힘들면 흥남 부두에서 그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심정을 떠올려 보자.
그보다 더 힘들까.
그보다 더 절실한가.
그 절실함이 ‘내일’을 만든다.

                                                                   정진홍 / 중앙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