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고 웃으며 공감했다. ‘한 세대, 한 사람의 엉덩이로 신문지와 두루마리와 비데를 겪어내는 나라는 전 세계에 한국밖에 없다.’ 사실 내가 자란 시골에선 신문지도 귀했다. 볏짚으로 때우는 집도 있었고, 호박잎으로 뒤처리하다 먹거리를 엉뚱한 데 낭비한다고 혼난 친구도 있었다. 먹을 것, 땔 것 다 부족하고 사람만 넘쳐나던 대한민국이었다.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하던 시절. 특전사 군가(검은 베레모)의 한 구절인 ‘안 되면 되게 하라’가 부대 담장을 넘어 사회에 풍미했다. 뭐든 하면 된다였다. 적빈(赤貧)에서 벗어나려면 내남없이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부패와 무리수도 웬만하면 눈감아주었다. 사회 전체가 상승욕구를 불태우는 분위기에서 미국에서 건너온 성공학·처세술 책 몇 권이 크게 히트했다.
1970년대 중반 고교 시절, 선배의 권유로 『적극적 사고방식』을 처음 접했다. 노먼 빈센트 필 목사의 1952년 저작으로 미국과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머릿속에 성공하는 이미지를 항상 떠올리면 진짜 그대로 된다고 했다. 처음엔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듯 감격했다. 『생각하라, 그러면 부자가 되리라』(나폴레옹 힐), 『잠재의식의 힘』(조셉 머피), 『카네기 인간관계론』(데일 카네기)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미국 저술가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2009년 쓴 『긍정의 배신』(원제 ‘Bright-Sided’)은 위의 책들을 포함,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시크릿』 같은 유의 책을 통렬히 비판한다. 긍정적 사고를 극단적으로, 거의 주술 수준으로 맹신하면 모든 게 사회구조 아닌 개인 책임으로 환원되며, 비판적 사고는 실종된다는 것이다. 비행기 조종사에게는 ‘다 잘될 거야’라는 주문이 아니라 기체 이상을 염두에 두는 방어적 비관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에런라이크는 북한·소련을 예로 들며 낙관주의·긍정적 사고가 국민에게 강요됨으로써 사회통제, 정치적 억압의 도구로도 활용된다고 지적한다.
그렇더라도 긍정적 사고 자체를 백안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모든 게 사회 때문이라는 것은 다 개인 탓이라는 태도만큼 옳지 않다. 한데 사회를 탓하는 사람이 점점 느는 추세다. 가난은 사회구조 때문이라는 의견이 58.2%, 개인 탓이라는 의견은 41.8%라는 여론조사(한국보건사회연구원)도 있다. 젊을수록 사회의 책임을 묻는다. 60대 이상은 39.3%가 사회를 탓했지만 30대는 70.2%나 된다. 한 세대 전의 ‘하면 된다’에서 ‘해도 안 된다’로 변한 걸까. 그러고 보니 TV에서도 “안 될 놈은 안 돼”(개그콘서트)라는 절규(!)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노재현 / 중앙일보 분수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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