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죽을 먹으며 / 서정윤
삶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제 속마음을 보여주는 은행잎처럼
호박도 여름동안 햇살과 달빛
그리고 별빛을 모아서
울퉁불통한 심장을 남기고 떠난다
할머니가 호박죽을 오래 끓이는 건
그 심장에 든 별빛 녹여내기 위해서다
호박에 숨어 있던
벌레소리며 바람소리는 쉽게 풀어지지만
심지어 여기저기 흩어진 번개와 천둥소리는
조금 어렵게라도 찾아낼 수 있지만
심장에 새겨진
달빛 편지와 별빛 기도는
응축의 힘이 하늘에 닿았기에
풀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할머니는
기도의 힘으로 호박죽을 끓이는 것이다
그 호박죽을 먹고 이만큼 살고 있는데
내가 아무리 오래 끓여도 그 맛이 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월간시', 2022년 12월호
'이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월의 마지막 날 /高松 황영칠 (2) | 2023.10.31 |
---|---|
가을날의 독백 /국순정 (0) | 2023.10.30 |
누드와 거울 - 심은섭 (0) | 2023.10.28 |
천상 여자 /최인구 (0) | 2023.10.27 |
기차를 기다리며 / 천양희 (0) | 2023.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