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가족과 처음으로 프랑스 파리에 여행갔을 때 방돔광장에서 사진기자처럼 보이는 남성이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기자로서 궁금증을 참지 못해 “누구를 기다리냐?”고 물었더니, 경음 발음으로 “엘똔 존!”이라더군요. 얼마 뒤 리츠 호텔에서 나온 아담한 사내가 저희 가족 앞으로 또박또박 걸어왔고···.
1947년 오늘(3월 25일)은 그 엘튼 존이 태어난 날입니다. 본명은 레지널드 케니스 드와이트. 음악을 사랑했던 부모의 영향을 받아 3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영국 왕립음악원을 다니다 중퇴하고 밴드 활동을 합니다. 얼마 뒤 솔로로 데뷔할 때 동료 음악가 2명에서 하나씩 이름을 따서 엘튼 존으로 개명했고요.
엘튼 존은 아시다시피 20~21세기 최고 천재 음악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첫 히트곡 ‘Your Song’에서부터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틀어줬던 ‘Rocket Man’, ‘Goodbye Yellow Brick Road’,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Candle in the Wind’ 등 숱한 명곡을 낳았고, 《라이언 킹》 《빌리 엘리어트》 《아이다》 등 뮤지컬로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엘튼 존은 대한민국이었다면 스타가 못 됐을 수도 있고, 중간에 매장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밴드 시절 계속 실패하다가, 리버티 레코드사가 신인 작사가와 작곡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지만 오디션에서 떨어집니다. 회사는 거절했지만 담당 프로듀서가 당시 지원했던 작사가 버니 토핀과 함께 DJM레코드사에 소개합니다.
이 두 콤비는 앨범과 몇 개의 싱글을 냈지만 큰 인기를 못 얻고, 다른 동료들의 노래를 만들어주다가 2집 앨범에서 대박을 터뜨립니다. 우리나라였다면 자신이 뽑지 않는 인재를 다른 회사에 소개시켜 후원하는 일이 가능이나 할까요?
엘튼 존은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합니다. 20세 때 본격 데뷔 직전 여성과 결혼을 앞두고 자살을 꾀했다가 실패한 뒤 헤어졌고, 28세 때에는 술과 약물에 절어살다가 신경안정제를 다량 복용한 뒤 수영장에 뛰어들었다가 겨우 살아납니다.
무엇보다 그는 29세 때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했고, 8년 뒤 결혼했다가 이혼한 뒤 동성애자에 가깝다고 정정합니다. 영국의 《더 선》은 그를 성도착자로 묘사하면서 동물학대를 저질렀다는 오보를 잇따라 냈지요. 존은 물러서지 않고 고소, 100만 파운드와 소송비용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합의해서 이 돈을 자선단체에 전액 기부합니다.
그는 2005년 영국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법이 발효된 첫날 1993년부터 사귀었던 캐나다 영화 제작자와 결혼식을 올렸고, 난자를 공여받아 대리모를 통해 두 아들을 얻습니다. 엘튼 존은 2016년 아이들에게 재산의 대부분을 상속하지 않고 사회에 돌려주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언젠가 “아이에게 줄 최악의 선물은, 내가 많이 봐 왔는데, 은수저”라고 소신을 밝혔는데, 실제로 자기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고나 할까요?
존은 1980년대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를 비롯한 지인들이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자 에이즈 예방 활동에 참여하다가 1992년 ‘엘튼 존 에이즈 재단’을 설립, 막대한 돈을 에이즈 연구와 사회적 소수자 인권활동에 쓰도록 내놓습니다. 음악과 자선활동으로 인류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제국 훈장과 함께 기사 작위를 받습니다. 미국의 국가인문학 훈장도 받았지요.
쉽게 틀지어 단정하고, 비난하기 좋아하며 관용에는 인색한 우리나라에선 틀을 벗어난 천재가 나오기 어려운데, 엘튼 존이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어도 이 틀을 극복하고 세계적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요? 그의 명곡 들으면서 생각해볼까요? 사람의 다른 점을 인정하며 장점을 배우는 것이 바람직한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끼워맞추거나 배척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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