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자연현상(自然現象)에 대한 경이(驚異)에서 시작되었다 한다면, 보학(譜學)은 인간현상(人間現象)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 인간들은 나와 남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데까지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한다. 성명·나이· 학력과 이력· 가정환경과 가문(家門)·교우(交友)와 사회적 환경 등으로……. 이러한 것들을 모아 정리한 것으로서 개인적인 것으로는 이력서라는 것이 있고, 단체별로는 명부 또는 방명록 등이 있다. 우리가 통속적으로 족보, 곧 세보(世譜)도 이러한 명부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그 기술 내용이나 목적과 의의 등은 다른 어떤 단체의 그것과 비할 바가 아닐 따름이다. 그리고 이 족보에 관하여 광범하게 연구하여 아는 것이 곧, 보학(譜學)인 것이다. 족보의 성격을 옛날 사람들은 명계세 변소목(明系世 辨昭穆)이라 규정하고 있다. 계세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세계(世系), 곧 시조(始祖)에서부터 자신까지의 대수를 말함이고, 소목(昭穆)이라 함은 나와 조상을 함께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말함이다. 전자는 종적 관계이고 후자는 횡적 관계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世系)는 자기의 직계조상(直系祖上)으로부터 자신 또는 일가족만을 기록한 것이고, 가승(家乘)은 대개 유복친(有服親)까지 확대하여 기록한 것이고, 파보(派譜)는 어떤 조상을 기준으로 하여 가승보다는 더 광범위하게 망라하여 기록한 것이고, 대보(大譜) 또는 대동보(大同譜)로 불리는 족보는 동성동본(同姓同本), 곧 시조(始祖)를 함께하는 종친(宗親)을 가급적 광범하게 망라한 기록인 것이다. 몇해 전에 주간지(週刊誌)에 "족보만 가지고 노닥거리더니 - 과연 한국의 족보는 세계에서 으뜸"이란, 내가 보기에는 좀 풍자적인 제하(題下)에 세계계보학회(世界溪譜學會)에서의 평정(評定)을 소개한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나는 과문한 탓으로 잘은 모르지만 지금 미국에 세계계보학회 본부가 있고 몇 개국인지는 몰라도 각국에 지부를 두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일파인 "몰몬교"가 중심이 되어 구성한 학회인데, 그 성격은 잘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세계 각국의 족보를 모으고 이를 "마이크로 필름"에 수록하여 앞으로 어떤 전란(戰亂)이 있더라도 없어지지 않도록 "럭키"산(?) 속에 땅굴(지하 도서실)을 파고 보존한다는 것. 지난 1978년에 간행된 우리 풍양조씨 무오보(戊午譜)와 이번에 간행되는 세록(世錄)까지도 "필름"에 수록하여 가겠단다. 물론 그 학회의 한국지부에서 하는 일이다. 그러면 세계에서 가장 발달했다는 우리 나라 한국의 족보는 과연 어느 때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발달되어 온 것인가. 나는 이를 우리 풍양조씨 세보사(世譜史)를 중심으로 하여 아는 대로 소개해 보려 하는 것이나 이에 앞서 그 원천부터 잠시 더듬어 보기로 한다. 우리 나라 족보가 중국문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교문화의 소산이라 함은 누구나 이의 없는 것 같다. 중국문화의 발상을 요순(堯舜) 시대로 잡는다면 약 4,300년 전이라 할 수 있거니와 서전(書傳)의 요전(堯典)에는 "큰 덕을 밝히어 구족(九族)을 친목(親睦)하게 하니 구족이 화목해졌다(克明俊德 以親九族 九族旣睦)"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구족을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족(族)의 개념이 달라지기 마련이며, 몇가지 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정의(定義)는 고조·증조·조·부·자기·아들·손자·증손·고손(단, 한자로는 高孫이라 쓰는 예는 없고 반드시 玄孫이라 쓴다)으로 볼때, 이 때에도 이미 이러한 구족관계를 밝힐 수 있는 기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족보의 남상(濫觴), 곧 시초(始初)는 될 수 있을망정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의미의 족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의 족보는 한(漢)나라때 현량과(賢良科)를 보일 때 , 구비서류에 가계(家系)를 기록토록 한 것이 시초이며, 남조(南朝) 시대의 제(齊)나라 가희경(賈希慶)과 당(唐)나라 유지기(劉知幾)를 보학가(譜學家)로 치고 있다 하나 자세한 것은 알수 없고, 내가 알기로는 역시 유학의 중흥기(中興期)라 할 수 있는 송(宋)나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족보다운 족보가 발달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 중에서도 당송 팔대가(唐宋 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로천(蘇老泉 : 이름은 洵, 자는 明允)의 소씨 족보서(蘇氏 族譜序)는 유명하여 우리 나라에서도 한문을 전용하던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족보의 의의를 깨치기 위하여 애송하여 왔기로 여기에 요약하여 소개하여 본다. 소로천이 누구라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으리라 믿거니와, 저 전후적벽부(前後赤壁賦)의 저자(著者)로 유명한 소동파(蘇東坡 : 이름은 軾, 字는 子瞻)의 아버지이다. 그는 그 서문(序文)에서 미주소씨(眉州蘇氏)의 내력을 간단히 서술하고 나서, "족보에 실리지 않은 것은 친진(親盡)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 친진(親盡)이라 함은 친족관계가 다 되었다는 말이니 옛날에는 유복친(有服親) 곧, 8촌까지만을 친족으로 치고 그 밖의 일가, 곧 9촌부터는 친족으로 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예법(禮法)이 시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유복친은 "집안간" 또는 "당내간(堂內間)"이라 칭하고, 9촌이면 면복친(免服親), 10촌이면 사종(四從), 그 이상이면 동파지친(同派之親)이라 칭했던 편이 더 정다운 느낌이다. 소로천은 9촌부터는 수록하지 않은 이유를 "족보는 친족을 위하여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 변명하고 있고, 또 그 족보에는 아들은 수록해도 손자는 수록 대상이 아니었던 모양으로서 그 이유를 "대수(代數 : 수학상의 대수가 아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대고 있다. 그리고 그 때의 제반 사정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기의 아버지부터 고조(高祖)까지는 벼슬, 배위(配位), 향년(享年), 사망한 날짜(卒日)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것은 그렇게 써주지 않은 것은 자기의 조상을 상세하게 함"이라 했고, 또 "자기의 아버지부터 고조까지는 이름을 쓸 때 꼭 휘모(諱某)라고, 경칭하는 의미의 휘(諱)자를 넣어서 썼으나, 다른 사람의 것은 그대로 이름을 마구 써버린 것은 자기의 조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라고 했고, 이어 "족보는 소씨를 위하여 만드는 것인데 유독 자기의 조상만을 상세히 쓰고 존중하여 쓴 것을 그 족보는 자기가 만들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고서도 하는 말이 "우리 족보를 보는 사람은 효제지심(孝悌之心)이 유연(油然 : 무럭무럭 자라는 모양)히 일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정(情)은 친족관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친족 관계는 복(服)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복이라는 것은 가장 중한 부모의 쇠복(衰服)에서 시작하여 가장 가벼운 삼종의 시마복(媤麻服)에 이르고 그밖에는 복이 없다. 복이 없으면 친진(親盡)한 것이고, 친진하면 정진(情盡)한 것이고, 정진하면 좋은 일이 있어도 경축하지 않고 걱정되는 일이 있어도 위로할 것이 없다"는 것이며, "경조를 않게 되면 그것은 친족이 아니라 도인(塗人 : 길 가는 사람들이 서로 보면서도 모르고 지내는 남남 사이란 뜻)"이라는 것. 소로천이 이 글에서 핵심을 둔 것은 다음에 있다 할 수 있다. 가로되 "남남 사이가 되기 전에 소홀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로천이 만들었던 족보라는 것은 결국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는 가승(家乘)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가 말한 대로 나름대로 소씨(蘇氏)를 위하여 만든 것이데도 그처럼 자기 위주의 편파적인 기술을 하고 나서 그것을 자랑삼아 거창하게 "우리 족보를 보는사람은 효제지심이 유연히 일 것"이라 강조하고 있으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이다. 지금 내가 어떤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와 같이 중국이 족보문화의 발상지라고는 할 수는 있겠으나 보편적인 발달은 우리 나라만 못했다 할 수있다. 그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땅덩어리가 워낙 크고 인구가 또 그처럼 많은 데다 생활정도와 교육수준의 차이도 우리 나라보다는 더 현격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무리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대개는 자기의 직계나 적은 세계(世系) 정도가 많을 것인데, 현재 대만에 살고 있는 공덕성(孔德成)씨가 공자(孔子)의 77세손임이 확실하니 이 점에서는 우리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구원(久遠)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저 가문별로 우리가 말하는 가승이나 고작해야 파보 정도가 존재했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러면 다음에는 우리 나라에서의 남상(濫觴)과 발전 과정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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