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종중(大宗中)에서 세 번째로 간행한, 곧 삼중간보(三重刊譜)를 병술보(丙戌譜)라 한다. 이는 제23대 순조(純祖) 26년(1826)에 해당하는 병술년(丙戌年)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여진 이름이다. 이에 그 경위를 살펴 보기로 한다. 우리 조씨의 창간보(創刊譜)는 조선의 영조(英祖) 7년(1731)인 신해년(辛亥年)에 당시 귀록공(歸鹿公 : 顯命)께서 경상감사(慶尙監司)로 나아가 그 감영(監營)의 소재지인 대구에서 간행되었고, 두 번째 족보인 경진보(庚辰譜)는 창간보를 간행한 지29년만인 영조 36년(1760)에 해당하는 경진년(敬辰年)에 당시 영호공(永湖公 : )께서 또한 경상감사로 나아가 대구에서 간행하였다. 족보란 한 성씨(姓氏)의 흐름을 기록으로 정리하는 것인 만큼 한 세대, 곧 30년만에 한 번씩 새로이 간행하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不文律)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첫째로 여러 의견이 대체로 합치되어야 하고 그에 따르는 재정이 확보되어야 하며 그 일을 주간하여 실수 없이 성사(成事)시킬만한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요소(要素)가 구비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개는 이 불문율이 그대로 지켜지지 못하는 것이 자타성(自他姓)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통례인 것이다. 그 당시 우리 종중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영조 36년인 경진년(1760)에 중간보가 간행된 지 회갑년(回甲年)이 되는 순조(純祖) 20년(1820)의 경진년에 다시 족보를 간행하기로 결정하여 중간보 간행을 주간했던 영호공(永湖公)의 손자인 운석공(雲石公 : 寅永)에게 그 사업의 주간을 위임했던 것이고, 그로부터 6년이 경과한 병술년(丙戌年)에 또한 운석공께서 경삼감사로 나아가게 되자 그 감영에서 간행되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우리 족보는 창간에서 3중간까지 모두 우리 일가 어른들이 경상감사로 나갔을 때 대구의 경상감영에서 목판으로 발간되었으며, 그 원판(原板) 또한 모두 상주 남장사(南長寺)의 경내에 있는 보각(譜閣)에 보관하여 왔다. 그러므로 우리 조문(趙門)에서는 "경상감사로 나아가는 분은 족보하러 간다"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하거니와, 우리 문중과 경상감영은 그만큼 밀접한 역사적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찌해서 이러한 필연적이라 할만한 인연이 설립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이를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의 출판 인쇄사(出版印刷史)를 먼저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이나 필자는 이 분야에는 가위 문외한이라 할 수밖에 없는 데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나마 탐색할 만한 시간의 여유도 없으므로 그저 알고 있는대로 그 대강의 소개에만 그치려 한다. 우리 나라 출판 인쇄 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일찍 발달했다는 것은 세계의 학자들이 다 같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지난 1966년 10월에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 보관되어 있던 무구정광 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란 인쇄본(印刷本)이 발견되기 전에는 일본의 호오류우지(法隆寺)에 소장되고 있는 백만탑 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이 세계 최고본(最古本)으로 치었던 것이나, 호오류우지의 것이 770년에 인쇄된 것임에 비하여 불국사의 것은 줄 잡아도 751년 이전의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고종 연대(高宗年代)에 몽고의 남침(南侵)을 겪으면서 간행된 이른 바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출판 인쇄 문화의 유산이려니와 조선의 태종(太宗) 초기에 이르러서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金屬活字 : 銅活字)가 개발되어 활자 인쇄의 효시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 기구를 소유하고 있는 주체는 현대와 같이 회사나 개인이 아니라 주로 정부기관이었던 것이다. 이를 대별하면 중앙관청에서는 일면 운각(芸閣)이라 부르기도 하는 교서관(校書館)에서 이를 관장하여 운용(運用)하였고 지방에서는 각 도(道)의 감영(監營)이나 각 고을의 관아(官衙)에서 설치하여 운용하였다. 그런데 중앙의 교서관 기구는 국가의 정책적인 서적이나 왕가의 문적(文籍)을 간행하는 데에만 쓰였으므로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일반 사부가(士夫家)의 문적은 대체로 지방 관서의 것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며 그것도 그 사업을 주간하는 사람이 그 관서의 장으로 있을 때에만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우리 종중에서 3차에 걸쳐 했던 족보도 모두 우리 일가 어른들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하게 되었고, 신해보 이전의 영조 4년(1728)에 강원 감영(江原監營)에서 진행했던 간보사업(刊譜事業)도 묵소공(墨沼公) : 錫命)께서 강원 감사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이것은 우리 가문의 예이거니와 다른 간행물이라 하더라도 조선 때에 간행된 것이며 거의 모두가 그 자손이나 제자가 어떤 고을의 수령(守令)이나 도백(道伯)으로 있을 때에 관가의 시설을 빌어 인쇄한 것들이다. 그러면 그 비용은 어디에서 부담하였는가 하면 자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우리 병술보 간행 때의 상황에 의거하여 본다면 명하전(名下錢)과 예전(禮錢) 또는 예목(禮木)이란 이름의 특별 찬조금 형식의 할당금(割當金)으로 충당한 것으로 보인다. 명하전이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생존자(生存者)의 이름을 족보에 등재할 때 내는, 말하자면 지금의 가입금(加入金)과 같은 것인데, 그 때에는 1인당 5전(錢)씩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예전(禮錢) 또는 예목(禮木), 더러는 예목전(禮木錢)으로 불러지는 할당금 형식의 찬조금인데, 이는 예의상(禮儀上)으로 내는 돈 또는 무명(그 당시는 무명도 화폐 구실을 하였음)을 말한다. 당시에 규정한 할당 액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예전 할당표(禮錢割當表)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찬조금 할당 대상에 내임직(內任職) 은 하나도 없고 모두 외임직(外任職)이었다. 그러면 어찌해서 외임직에게만 할당했던 것인가? 그것은 좋은 의미에서였든, 나쁜 의미에서였든 간에 중앙의 내직에 있는 사람보다는 지방의 외직에 있는 사람의 수입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화제가 다르기는 하지만 옛날에 벼슬아치들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관직에 있는 사람이 우정 지방의 수령(守令)이 되기를 자원하여 나간 일이 종종 있었다. 이를 걸군(乞郡)이라 하였다. 곧 한 고을의 수령이 되기를 구걸(求乞)하여 나간다는 뜻이다. 자신의 위신이나 출세를 위해서는 지방의 외직보다는 중앙의 내직이 훨씬 나았지만 쥐꼬리만한 봉록(俸祿)만 가지고는 늙은 부모를 넉넉하게 받들어 드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중앙의 고위직에 있던 사람도 지방의 하위직을 택하여 수령(守令)이 되기를 청원하였고, 그 청원이 실현되면 기꺼이 부모를 모시고 부임해 가서 물심 양면 흡족하게 봉양해 드렸던 것이니, 이를 전성지양(專城之養)이라 한다. 그런데 그 수입원(收入源)은 무엇이었으며, 또 정당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그런 행위가 효행의 한 가지로 사회적 인정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으며, 조상의 문집을 간행하거나 족보를 간행하는 등의 사업도 이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 보아 마땅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때 들어왔던 예전(禮錢)을 보면
연안부사 운로 (延安府使 雲路) 50량 서흥부사 원영 (瑞興府使 原永) 100량 강화유수 만원 (江華留守 萬元) 100량 울산부사 함영 (蔚山府使 咸永) 50량 홍양현감 진선 (洪陽縣監 鎭宣) 50량 동래수사 운영 (東萊水使 運永) 100량 진위현령 운표 (振威縣令 雲杓) 20량 삭녕군수 운성 (朔寧郡守 雲成) 20량 춘천부사 경진 (春川府使 經鎭) 40량 곤양군수 휘감 (昆陽郡守 徽鑑) 20량 군산첨사 덕영 (群山僉使 德永) 20량 충청감사 경진 (忠淸監司 經鎭) 150량 나주목사 원영 (羅州牧使 原永) 100량 영변부사 인영 (寧邊府使 寅永) 100량 황해감사 진화 (黃海監司 晉和) 300량 양산군수 덕(?) (梁山郡守 덕) 20량 비안현감 운제 (比安縣監 雲제) 100량 안동부사 정화 (安東府使 庭和) 100량
합계 1,360량이었으며 당시에 수합된 명하전이 1,013량 7전이어서 도합 2,373량 7전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주간자였던 운석공(雲石公 : 寅永)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이미 수합된 재정(財政)에다 약간 더 보충했다(己聚之財 略有添補)"하였으니 이 금액 외에도 운석공께서 상당한 재력을 더 희사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편집 내용으로 말하면 경진보 때에는 8정간(八井間)이던 것을 7정간으로 고치고 무후(無后)한 사람이나 딸에 관한 주(註)를 종전까지는 자손이 있는 아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횡간(橫間)으로 써 나가던 것을 그 이름 밑에 수직(垂直)으로 써 내림으로써 용지(用紙)의 절약을 기하였다는 것밖에는 크게 변동된 것이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보학상의 여러 규칙이라든가 문제되는 내용은 경진보 때에 이미 잘 정리하여 확정되었으므로 이번에는 그 선례에 충실히 이행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필자가 보는 바로는 역대 간보사업(刊譜事業) 중에서 가장 말이 없고, 가장 완벽하게 된 족보가 바로 이 병술보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내용이 충실하고 규정이 엄격했던 면에서 그렇고, 판각이 완숙한 면에서 그렇고, 인쇄가 선명한 면에서 그렇고, 용지가 견실한 면에서 그렇고, 제본이 우수한 면에서 그렇다. 그리하여 이미 경진보 당시부터 있어 온 말이기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 족보를 일러 "제가지최(諸家之最)"라 칭찬하게 되었다. 이 "제가지최"란 말의 뜻은 여러 가문의 족보와 비교할 때 우리 족보가 가장 잘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 족보가 타문(他門)의 족보보다 가장 잘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면에서 그러했다고 말 할 수밖에 없겠으나, 너무나 막연하므로 그 중요한 내용을 몇가지만 간추려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로는 사실을 사실대로 명확하게 기록한 점이다. 이를 다시 세분하여 말하면 (1) 상계의 계통이 불분명한 것은 불분명한 대로 가식(假飾)없이 강령(綱領)을 세워 그 체제(體制)에 따라 재록(載錄)하였으며 방주(傍主)도 아는 대로만 기록하고, 절대로 모르는 것을 꾸며서 기재하는 등의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 (2) 배위자가 여러 사람일 경우, 이를 분명하게 표기하고 출생한 자녀의 모계(母系)도 구별할 수 있도록 표기하였다. (3) 양자(養子 : 入出系를 말함)의 경우에는 반드시 계자(繼子)·출계(出繼)등으로 표기할 뿐만 아니라 그 밑에 나간 곳이나, 들어온 곳의 가계(가계)를 알 수 있도록 번허[번허 : 그 당시는 천자문(천자문)의 자순(자순)에 의함]로 표기하여 상호간의 계통(계통)과 소목(소목)을 확실히 하였다. (4) 부득이하여 구보(舊譜)의 기록을 정정(訂正)할 경우에는 그 사유를 반드시 명기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점도 의혹이 없도록 하였으며, 개명(改名) 등으로 인하여 신구보(新舊譜)의 표기가 다른 것을 비롯하여 단 한자라도 같지 않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고이록(考異錄)에 그것을 표기하여 보는 이의 참고에 공(供)하였다. 둘째로는 기록에 엄격한 통제와 균등을 기한 점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기록을 주관적으로 불균등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규칙을 준수하여 모든 사람의 기록을 균등하고 통일성 있게 기록하였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 기록을 균등하고 통일성 있게 기록하였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 언급한 중국 송나라 때의 소로천(蘇老泉)도 자기 직계(直系)의 기록은 남의 것보다 상세하고 정중하게 편벽된 기록을 하면서 그 이유를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 계통을 더 잘 만들은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으나,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고 주간(主幹)여부에 관계없이 똑같은 양식과 내용으로 기록한 것이다. 셋째로는 앞서도 말했듯이 인쇄와 제본 등 출판물로서의 질과 안목이 남보다 월등하게 좋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 우리 조씨의 3중간보인 병술보에 관한 것을 이리 저리 더듬어 보았다. 이를 다시 남아 있는 문헌에 의하여 종합하여 보건대, 순조(純祖) 20년(1820)에 참판공 진화(參判公 晉和)와 북해공 종영(北海公 鍾永) 두 유사(有司)에 의하여 발문(發文)이 나왔고, 그로부터 6년이 경과한 순조 26년(1826)인 병술년 6월 상순에 당시는 전직(前職)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였던 감사공 경지(監司公 經鎭)께서 서문을 쓰고 그 해 5월에 그 당시 경상감사로서 보사(譜事)를 주간했던 운석공 인영(雲石公 寅永)께서 발문을 썼으니 발족으로부터 완성까지는 약 6년이란 세월이 걸린 것이다. 보사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을 미루어 생각한다면 앞서 말한 바대로 경진보도 결코 발의한 지 1년만에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에 판각된 보판(譜板)이 1,356판이었으며 본보(本譜) 15책에 부록 1책, 도합 16책 1질 발간되었다. 그 보판은 또한 상주의 남장사에 있는 우리 보각(譜閣)에 보관하였음은 앞서 말한 바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 보각(譜閣)과 보판(譜板)에 관하여 잠깐 언급하려 한다. 앞서 말한 바대로 우리 조문(趙門)에서는 지난 영조(英祖) 4년(1728)인 무신년(戊申年)에 묵소공(墨沼公 : 錫命)께서 강원감사(江原監司)로 있을 때 그 감영의 소재지인 원주(原州)에서 판각을 착수했었는데, 인쇄가 완료되면 그 보판을 우리 시조 시중공(始祖侍中公 : 孟)의 재암(齋庵)인 양주 견성암(見聖庵)에 보관할 예정이었으나,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했으며 그후 3년이 경과한 영조 7년(1731)인 신해년(辛亥年)에 귀록공(歸鹿公 : 顯命)께서 경상 감사로 나아가 그 감영의 소재지인 대구에서 간행하고 그 보판을 상주시 화서면(尙州市 化西面)에 있는 청계사(淸溪寺)에 보관했다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 경진보 때로 믿어지는 시기에 동시 남장면(同市 南長面)에 있는 남장사(南長寺)로 옮겨 보관하였으며 당시의 3중간 보판 또한 이 보각에 보관했던 것이다. 다만 보판뿐만이 아니라 독암공(獨庵公 : 宗敬)의 유고(遺稿)를 비롯하여 여러 선배들의 문집판각(文集板刻)이 이 보각에 함께 보관되어 있으니 우리 조씨로서는 지중한 정신적 부고(府庫)일 뿐 아니라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문화재적(文化財的) 가치는 점증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보각을 수호해 가기 위한 재원으로 역대 선배들께서 전답(田畓)을 매치(買置)했던 것이니 이를 문헌에 의하여 기술하면
풍원부원군 현명(豊原府院君 顯命) 경상감사로 있을 때 4두락 판서 엄(判書 엄) 경상감사로 있을 때 5두락 판서 시준(判書 時俊) 경상감사로 있을 때 5두락 판서 시준(判書 時俊) 경상감사로 재부임 했을 때 9두락 판서 상진(判書 尙鎭) 상주목사로 있을 때 6두락 감사 진택(監司 鎭宅) 경상감사로 있을 때 5두락(환매) 영상 인영(領相 寅永) 경상감사로 있을 때 10두락 판서 병현(判書 秉鉉) 경상감사로 있을 때 5두락 판서 병준(判書 秉駿) 경상감사로 있을 때 9두락 목사 영화(牧使 永和) 상주목사로 있을 때 6두락 판서 강하(判書 康夏) 경상감사로 있을 때 5두락
이상 합계가 138두락인데 환매한 것 5두락을 빼면 133두락이다. 그리고 경진보 때에 보각 절목(譜閣節目 : 規程)을 제정하여 정성스럽고도 엄격하게 수호하여 왔던 것이다. 그런데 흥망성쇠는 언제나 반복되는 것이라고나 할까. 어떤 현상은 힘의 뒷받침에 의하여 생성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것일진대, 나라가 망하고 기강이 문란하여 지탱해 갈 만한 역량이 없었고 보면 이와 같은 선대의 사업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유지될 수 없음은 필연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사찰측(寺刹側)과의 마찰로 인하여 지난 갑자년(1924)에 보각이 남장사에서 호군공파(護軍公派)의 남장재사(南長齋舍) 옆으로 이건(移建)되었는데 보각답(譜閣沓)도 이를 전후하여 모두 없어져버린 것으로 듣고 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수호유지에 어려움이 많은 실정이나 아직 이렇다 할 확고한 대책은 없는 실정이니 매우 걱정스런 생각이 든다. 이와 똑같은 예를 임천의장(林川義庄)에서도 볼 수 있다. 임천의장은 영조 20년(1744)인 갑자년(甲子年) 가을에 귀록공께서 좌의정(左議政)으로서 휴가를 얻어 덕림(德林)의 회양공 산소(淮陽公 山所)에 성묘를 왔다가 여러 일가들 중에는 너무나 빈궁하여 혼인과 장례를 제때에 치르지 못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 것을 보고, 산하(山下)의 제종(諸宗)들과 상의한 끝에 재력을 희사하여 가난한 일가의 혼상(婚喪)을 보조하도록 마련한 일종의 자선 사업기구였다. 그 내용을 보면 전답을 장만하고 창고를 설치하여 수입된 곡물을 저장하였다가 유사시에는 규정에 따라 부조를 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러한 뜻있는 사업이 얼마나 오래 계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필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의장(義庄)이 넘어 갈 때 매우 시끄러웠단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들었을 따름이고, 지금도 "의창(義倉) 터(基)"라든가 "의장 논"이라는 등의 이름만이 부로(父老)들의 입에 의하여 전해 내려올 뿐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보학을 산책하다가 엉뚱한 길로 들어온 감이 없지 않으나,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귀감으로 삼아 만에 하나라도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자는 기우에서임을 밝혀 두는 바이다. 곁들여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불미스러 죄악을 짓는 사람은 어느 지역이나 종파의 전부가 아니라 극소수인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걸핏하면 그 책임을 어느 지역이나 종파의 전체에게 돌리어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못한 생각이라고 여겨진자. 물론 그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사전에 막아내지 못한 도의적 책임까지야 면할 수 없겠지만. 그건 그렇고 아무튼 우리 조씨의 간보사업(刊譜事業)은 병술보에 이르러 모든 면에서 극치를 이루게 되었음을 거듭 천명하면서 병술보는 이 정도로 마치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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