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다음 칸은 희망이다

뚜르(Tours) 2012. 4. 28. 07:54

# ‘그제’ ‘어제’ ‘오늘’ ‘내일(來日)’ ‘모레’ ‘글피’ 등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의 여러 날들을 말하는 어휘 가운데 유독 내일만 한자다. 왜 유독 내일만 우리의 순수한 토박이 말이 없는 걸까? 혹자는 옛날엔 사는 데 그 어떤 희망이나 바람도 가질 수 없을 만큼 힘들었기 때문에 그 희망이 담길 내일에 해당하는 토박이 우리말 자체가 없던 것이 아닌가 하는 대담한(?) 추론을 내놓기도 했었다. 그만큼 그 옛날 우리네 사는 것이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힘들었어도 희망을 담아낼 내일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본래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 『계림유사(鷄林類事)』라는 책이 있다. 중국 북송(北宋)시대의 손목(孫穆)이 지은 백과사전적 견문서이자 어휘책이다. 그 책엔 손목이 고려 숙종 때인 1103년 서장관(書狀官)으로 개성에 왔다가 당시 고려인이 사용하던 360여 개 어휘를 추려 한자음을 달아 설명한 대목이 있다. ‘그제’는 ‘기재(記載)’, ‘어제’는 ‘흘재(訖載)’, ‘오늘’은 ‘오날(烏捺)’, ‘내일’은 ‘할재(轄載)’, ‘모레’는 ‘모로(母魯)’라는 식으로 우리말과 그것을 읽은 한자어를 병기해 놨다. 물론 당시의 우리말과 중국말 모두 지금과는 음운상의 편차가 있어 지금 우리가 읽는 한자음대로 읽으면 당시 우리말 소리와 같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어제가 ‘흘재(訖載)’로 한자음 표기된 점을 감안하면 내일에 해당하는 한자음 표기 ‘할재(轄載)’ 역시 ‘ㅎ’음 아닌 ‘ㅇ’음에 가까운 ‘올재’로 읽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게다가 ‘올재’는 ‘올날’로 ‘내일(來日)’이란 이것을 한자로 뜻 표기한 것뿐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내일에 해당하는 한자어가 ‘명천(明天)’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명일(明日)’이 됐다. 이렇게 보면 ‘올날’이란 뜻인 내일의 순우리말 ‘올재’는 그 자체가 “희망 담은 날이 온다”는 의미였으리라.

 #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내 손 안에 있다. 그건 희망이다.” 나폴레옹의 말이다. 멋진 말이다. 하지만 희망은 단지 무기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했다. 그렇다. 희망은 돈에서 나오는 것도 권력에서 내뿜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사람 속에 들어 있고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그래서 희망을 품은 사람 그 자신이 곧 희망이 된다. 얼마 전 작고한 김근태는 늘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그가 품고 있는 희망에 의해 결정된다”고. 그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 얼마나 잔혹하고 악랄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고문의 나락 끝에서 직접 경험했던 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인간에게 절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희망만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을 이 희망 없는 세상에 유언처럼 남겼다. 나는 그의 이 말이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라고 믿는다.

 # 지하철에 올라탄 어떤 외판원이 팔 물건을 꺼내 들고 승객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제가 오늘 이것을 몇 개 팔았는지 아십니까?” 너무나 당찬 목소리에 승객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잠시 후 그 외판원은 너무나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도 못 팔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저에겐 다음 칸이 있으니깐요!” 그 외판원에게 다음 칸은 희망이다. 그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그는 한낱 멸시받는 외판원이 아니라 여전히 스스로 가치 있는 인간으로 당당히 다음 칸에 설 수 있는 것이다.

 # 물론 다음 칸이라고 해서 승객들이 너도나도 물건을 팔아준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희망이란 대책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책 없는 희망이 막힌 담을 헐고 막힌 구멍을 뚫는다. 그때 헐고 뚫는 에너지는 다름아닌 간절함과 절실함이다. 희망의 간절함에는 놀라운 에너지가 있고, 희망의 절실함에는 위대한 힘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희망의 동력이다.

 

                         정진홍의 <소프트파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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