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어머니, 그리운 이름 ........

뚜르(Tours) 2012. 10. 14. 10:26

돌아가신 어머니는 밥 인심이 좋았다.
추석 같은 명절 때도 여비가 없어 고향에 못 간 사람들을 데려다 아침상을 차려 주었다.
평소에도 밥때가 되면 늘 객식구가 북적거렸다.
어느 날 학교가 끝나 집에 돌아오니 낯선 아저씨가 마루에 걸터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행색은 남루하고 쉰 냄새가 진동했다.
어머니는 밥 동냥 하러 온 걸인에게 밥상을 차려 주셨던 것이다.
이후로도 우리 집에는 밥을 얻으러 오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불평을 했다.
“엄마! 저 아저씨들 더럽고 무서워요. 우리 집에서 밥 안 먹었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얘야, 그러면 못쓴다. 배고픈 사람들이잖니. 배고픈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란다.”


한참 지나서야 어머니가 왜 배고픈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인으로 징집돼 가시고 어머니는 젖먹이 형과 어린 누나 둘을 데리고 피란을 가셨다.
올망졸망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피란길에 나선 어머니의 고생이 얼마나 컸을까.
식량이 바닥나 며칠을 굶기도 했다.
먹은 것이 없으니 젖도 말라 등에 업힌 형은 하루 종일 울며 보챘다.
그때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열심히 기도하셨다.
“하느님! 저는 굶어도 좋으니 우리 아이들은 배를 곯지 않게 해주세요.”
어머니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을까.
정말 기적같이 그 전쟁통에도 고비 때마다 인심 좋은 사람들을 만나 어려움을 넘기고 자식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 후로 평생 어머니는 굶주린 사람들을 보면 집에 데려다 따듯한 밥을 해주셨다.
어머니는 당신이 받은 은혜를 다시 갚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그 시대 보통 여인들처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참으로 고단하고 힘든 세월을 사셨다.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서는 평생 제대로 된 옷 한 벌 장만하지 않으셨다.
평생을 쉼 없이 일하시고 장사를 하신 어머니는 특별한 외출 때를 빼고는 늘 ‘몸뻬’를 입으셨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 보니 어머니는 그 순간까지도 알록달록한 몸뻬를 입고 잠든 듯 누워 계셨다.
나는 목이 메었다.
어릴 때 어머니의 옷차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엄마, 좀 다른 옷 입으면 안 돼요?” 하면 어머니는 늘 난 이 옷이 제일 편하다며 말머리를 자르곤 하셨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도 여자인데 왜 멋지고 좋은 옷을 입고 싶지 않으셨을까.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 입고 싶은 것, 드시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사셨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어머니의 인생에서 정작 당신 자신은 없었다.
사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는 다 똑같을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놓으실 분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한 것이라면 지나친 생각일까.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게 하려고 어머니를 만드셨다”는 외국 격언이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의 화신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명절 때가 되면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더욱 그리운 이름이 된다.
부모를 여읜 사람은 모두 죄인이란 말이 더 실감 나는 추석이었다.


허영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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