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을 놈 / 복효근
푸르른 이파리가 말라비틀어지고
탱탱하던 실뿌리들 부석부석 말라 떨어지고 나서야
양파의 대가리는 완성되거니
그래, 다 자란 양파는 대가리가 있다
붉은 모기장 주머니에서
여차하면 썩으려드는, 썩어버리는 대가리 속
메추리알만큼 남은 자궁이 얼마나 깊기에
부화하듯 푸른 싹 한 줄기 솟는다
썩은 밑둥에선 악착같은 실뿌리가 돋는다
한 생이 끝났다 싶으면
제 수족과 제 대가리 100퍼센트 다 썩혀서
제 생을 다른 생에 건네주는
눈부신 금빛 고리
부활이 있다면 저 자세 저 빛깔이겠다
혼신이 썩어서 내는 그 향기는 그래서 눈물이 솟도록 매운 것인가
이쯤에선, 죽는다는 말이
썩는다는 말이 순교처럼 아름답다
뇌의 3퍼센트밖에 쓰지 못하고 죽는다는 내 대가리는
양파만 하였느냐
서로 몰래 생을 희롱하다 무덤 가까이 와버린
내 수족과 대가리는 양파만큼 진화했다드냐
천상 나 또한 썩을 놈이어서
쪼글쪼글 사위어가는 저 양파는
분명 이 생에 대한 한 질문이거나 답이겠거니
어느 날은 저 비밀한 교의에 귀의하고 싶다
- 복효근,『마늘촛불』(도서출판 애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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