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꽃잎 - 조용미

뚜르(Tours) 2023. 7. 26. 08:40

꽃잎 - 조용미

높은 곳에 서 있으면

바람의 힘을 빌려 몸을 날리는 꽃잎처럼

뛰어내리고 싶었다

허공으로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봄 저물녘의 흰 꽃잎들

삶이 곧 치욕이라는 걸,

어떤 간절함도

이 치욕을 치유해주지 못한다는 걸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소나기처럼,

붉은 땅 위로 내리꽂히는 장대비처럼,

어둑한 겨울숲에서 혼자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는

동백의 모가지처럼

높은 곳에 서 있으면

발 아래 까마득한 것들 다 공중으로

불러들이고 싶다

역류하는 것들의 힘으로

떨어지는 나는 폭발물이다

 

시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 지성사, 200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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