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地巡禮

[스크랩] 베론성지 (제천)

뚜르(Tours) 2006. 5. 18. 15:20


제천 베론성지

 


황사영 순교 현양탑  전경

 


황사영 순교 현양탑

 


황사영의 묘, 경기도 양주군 가마골에 있다

 


베론 성지 전시관과 신학당

 


성 요셉 신학당

 


전시실

 


최양업 신부 기념 대성당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이 성당은 배 모양으로 설계 시공되었다. 대성당의 의미는 첫째,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한 것인데, 이 곳은 골짜기의 모양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둘째, 노아의 방주가 그러햇듯이 교부들은 초기부터 교회를 구원의 배로 이해하고 표현 하였다. 사나운 세상의 풍랑 속에서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항해하는 배를 지음으로서 2000년기의 세기말적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고자 하는 뜻과 2000년 대희년은 물론 제3000년기를 향한 희망의 뜻을 담았다. 셋째, 최양업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대성당의 명칭은 이 배를 인도해 주실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기리는 바다의 별 대성당"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대성당의 규모 대지 2,930평, 연건평 616평, 수용인원 대성당 : 2,000 여명 소성당 : 300

 


대성당 내부

 


베론성지 조각물, 기도하시는 예수님




 

성지 배론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과 유적을 간직한 뜻 깊은 곳이다. 배론(舟論)은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985m)과 백운산(582m)의 연봉이 둘러 싼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 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리어졌다. 1784년 이 땅에 천주교가 전례된지 얼마 안 되어 1791년 신해교란이 일어나자 교우들이 심심산골인 이곳으로 피난해 와서 농사와 옹기구이로 살아가며 6개의 교우촌을 이루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던 곳이다. 배론 성지하면 떠오르는 것은 황사영(알렉시오)이 백서를 썻다는 토굴, 배론신학당, 그리고 최양업신부님의 묘일 것이다. 바로 이 모든 것이 배론성지에 다 있다. 배론성지로 들어가 오른편으로 가면 십자가의 길이 나오는데 십자가의 길 마지막처가 있는 곳이 최양업신부님의 묘이다. 길을 내려와 오른편으로 가면 배론신학당이 나오고 그 뒤에 토굴이 있다. 황사영기념탑 가기전에 경당이 있고 탑앞으로 순례자의 집이 마련되어 있다. 건너편에 배모양으로 보이는 건물은 최양업신부님의 기념성당이다. 무명순교자의 묘도 탑에서 내려오면 만날 수 있다. 배론에 최초로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창원(昌原) 황씨 성을 가진 사영은 나이 16세에 장원급제,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조할 만큼 앞길이 창창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 듣고는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한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택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과 동시에 서울을 빠져 나와 배론으로 숨어든다. 그 해 8월 주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그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적는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히고 황사영도 대역무도 죄인으로 능지 처참의 극형에 처해진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7세. 이 사건으로 그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또는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십수 명이 공범으로 처단된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빛을 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 백서는 바티칸에 소장돼 있다.  백서는 흰명주에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 122줄을 13,384자를 가는 모필로 깨알처럼 곱고 정밀히 써진 것이다. 비록 황사영 자신이 쓴 글이나 자기 이름은 숨기고 황심(토마스) 등이라 했음은 우선 사영의 겸허한 마음의 표현이요, 사영의 판단에 황심이 북경 내왕이 잦고 이미 여러 차례 그곳 주교와 신부들을 만났으므로 누구보다도 신임을 더 받을 것으로 생각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제1부분은 신유년 박해에 순교한 이들 중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필두로 30여 명의 빛나는 사적을 열거하고, 제2부분은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의 골육 상잔의 당쟁(黨爭)이었음을 필역하고, 제3부분은 빈사 위기에 처한 교회의 희생과 동족학살의 구원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등 자신의 사견을 진술하였다. 백서 사건이 있은 후에도 배론 교우촌은 신분을 속이면서 신앙을 지킨 신자들 때문에 계속 유지되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1855년 무렵부터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그 해 이곳 교우촌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신학당이었던 배론 신학당은 철종 재위시에 비교적 평온했던 시기동안 교우수가 늘어남에 따라 조선의 사제양성을 위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신학교였다. 장주기(요셉)의 집을 빌어 신학교로 사용하던 배론신학당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채 사라지고만다. 단 한명의 사제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최초의 신학당으로서 드디어 한국교회에도 사제를 배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당시 조선교구의 장상 역할을 하고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는 신학교 설립을 결정한 뒤 배론의 회장인 장주기(요셉)가 제공한 세 칸짜리 초가집에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의 학생수는 6명에 불과했고, 교재도 변변치 않았으며, 방 하나를 교실 겸 숙소로, 다른 방 하나를 신부의 거처로 사용해야만 하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1856년에 교장으로 임명된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는 아주 열성적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배론 신학교는 이후 꾸준히 발전하였다. 신학생 중에서는 임 빈첸시오가 1864년에 소품을 받았고, 이 바울리노가 삭발례를 받았으니, 더 있었으면 이 땅에서 사제가 탄생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실을 얻을 수는 없었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의 회오리가 이곳에도 몰아쳤기 때문이다. 3월 2일, 포도청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푸르티에 교장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였다. 그러면서 신학교도 자연히 폐쇄되고 말았다. 두 신부는 서울에 온 지 하루 만에 군문효수형을 언도받고 3월 11일에는 새남터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다. 한편 장주기 회장은 신부들이 체포되어 간 뒤 이웃 마을에서 체포되었고, 이내 서울로 압송되어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다음 자신이 원하던 대로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수영)으로 옮겨져 1866년 3월 30일에 순교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배론은 또 다른 의의를 갖게 되었으니, 신학 교육의 요람지가 순교자들의 요람지로 변하게 된 것이다. 특히 장주기 회장이 훗날 성인품에 오름으로써 배론 순교사의 의미는 더욱 빛을 내게 되었다.

배론성지에는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이시며 땀의 순교자라고 불리시는 최양업(토마스)신부님의 묘가 있다.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0년의 공부끝에 사제품을 받으시고 조선에 귀국하셨다. 그 후 1년에 7000리를 걸으시며 12년간 조선의 어린양들을 위하여 사목활동을 하시던중 안동교구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전염병에 걸리시어 선종 하셨다. 배론 사적지가 갖고 있는 특징은, 첫째 그 복음사가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점이고, 둘째 다른 사적지와는 달리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 함께 간직해 온 곳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요, 유명한 황사영(알렉시오)의 "백서"(帛書)가 탄생한 곳이며,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또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여러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순교자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


일명 '낙소'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재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육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황사영 알렉시오(1774-1801)


황사영 알렉시오는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돼 한림 학사로 있었다. 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 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산데르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시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힌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 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헌(黃景憲)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의 묘는 의정부교구인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 있다.

 

황사영의 묘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는 신유 박해로 순교한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알렉시오)의 무덤이 외롭게 안장되어 있다. 당시 황사영은 양박 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형을 받았으므로 시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또 가까운 집안 사람들이 모두 유배를 당한 터였으므로 그 시신을 거둘 사람조차 없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황씨 문중의 선산에 안장한 이들은 먼 친척이나 면식이 있는 신자들 몇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후 황사영의 무덤은 집안에서조차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양반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국사범으로 처형되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다가 180년이 지난 1980년에 황씨 집안의 후손이 사료 검토 작업과 사계의 고증을 거쳐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였다. 또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黃)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그의 됨됨이와 재주를 높이 산 정조 임금은 친히 그의 손을 붙잡고 격려했으며 이에 그는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명문의 배경과 출중한 재주로 탄탄한 출세의 길을 앞둔 청년 황사영은 학문의 길을 위해 찾아 든 정약종의 문하에서 일생일대의 변화를 겪는다. 과거에 급제한 후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 명련(命連)과 혼사를 치른다. 천주교인으로 명도회(明道會) 회장이던 약종은 사영의 빼어난 재능에 반해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그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결국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그는 알렉산데르란 세례명으로 입교한다.이로써 그는 부귀 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런 일생을 선택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을 희생시켰고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탐스럽고 아름답던 수염을 깎고 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든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된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천에 적는다. 옷 속에 이 비밀 문서를 품고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된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백서 사건은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 넘기려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다. 이 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敬憲, 일명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된다. 가산은 모두 몰수당했고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을 탄생케 했다.   


푸르티에 신부(Pourthi, Jean Antoine) (1830-1866)


푸르티에(Pourthi, Jean Antoine, 한국명 : 신요안) 순교자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교구의 `발랑스 앙 알리브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하여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선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거쳐 해로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베론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 요셉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프티니콜라 (Petitnicolas, Michel Alexander)신부 (1828-1866)


프티니콜라(Petitnicolas, Michel Alexander, 朴 신부) 신부는 1828년 프랑스 코앵슈에서 출생하였고, 1852년에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사제가 되어 1853년 인도로 파견되었으나 풍토에 적응을 못하고 홍콩으로 갔으며 이후 조선으로 부임 명령을 받았다. 1856년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중국에서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여, 한때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에 있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요셉신학교에서 원장으로 일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체포되었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였고 의술에도 능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교리를 전하고, 또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또한 3만 이상의 라틴어와 10만에 가까운 조선어를 담아 《나한사전(羅漢辭典)》을 지었는데, 그 중 한 부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고 나머지는 병인박해 때 소실되었다. 1866년 3월 11일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성화사랑 원글보기
메모 :

'聖地巡禮'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천진암 (경기도 광주)  (0) 2006.05.18
[스크랩] 절두산 (서울)  (0) 2006.05.18
[스크랩] 강릉 칠사당  (0) 2006.05.18
[스크랩] 서울 천주교 성지 3  (0) 2006.05.18
[스크랩] 서울 천주교 성지 2  (0) 200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