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地巡禮

[스크랩] 강릉 칠사당

뚜르(Tours) 2006. 5. 18. 15:19


강릉 칠사당

 


 

 


 

 

문향(文鄕)과 예향(藝鄕), 절향(節鄕)의 고장 강릉(江陵)은 산, 호수, 바다가 삼 박자를 고루 갖춘 천혜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전통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고도이다. 고구려 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돼 '하시랑', '하슬라(何瑟羅)'로 불려 왔던 고도 강릉에도 어김없이 순교의 보혈(寶血)이 서려 있다. 바로 강릉 시청 옆에 있는 '칠사당(七事堂)'과 뒤편의 '임영관 객사문(臨瀛館客舍門)'이 그곳이다. 강원도 지방, 특히 춘천 교구내 영동 지역의 순교 기록을 찾기란 문헌상 애로점이 많다.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분은 "치명 일기"에 기록돼 있는 심 스테파노 한 분뿐이다. "치명일기"에 나타나는 심 스테파노에 관한 내용을 보면 "본디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 5월에 경포(포도청 포졸)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 바오로와 함께 갇히었다. 치명하니 나이는 29세 된 줄은 알되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교회 전통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지금까지 구전으로 전해 오는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강릉 칠사당과 임영관에서 심문을 받고 순교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칠사당과 객사문은 강릉 시청 바로 옆과 뒤편에 있다.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인 칠사당은 대도호 부윤(大都護府尹)이 주재하던 조선시대 관공서로 호적(戶籍), 농사(農事), 병무(兵務), 교육(敎育), 세금(稅金), 재판(裁判), 풍속(風俗)에 관한 일곱 가지 정사(政社)를 베풀던 곳이다. 따라서 '칠사당'이란 현판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고 실제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 10년(1632년)에 중건하고, 영조2년(1726년)에 중수했으며, 고종 3년(1866년)에는 진위병(鎭衛兵)의 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 화재로 타 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가 중건했다고 한다. 교회 사학자들은 여러 순교자 증언록을 인용, 이곳 칠사당에서 병인박해 때 심문도 없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다고 말하고 있다. 칠사당 동헌 마당 한가운데에는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묶어 갖은 고문을 가하며 심문했던 것으로 전하는 고목이 아직도 푸르름을 갖직한 채 남아 있다. 현재 강릉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인 칠사당은 한쪽이 다락 형식으로 된 '가'(기역)자 형태의 건조물로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단아한 조선 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칠사당 뒤편에 있는 '임영관 객사문'은 지금 국보 제51호로 지정된 입구 '객사문'과 함께 터만 남아 있다. 고려 태조가 재위 19년(936년)에 총 83간의 건물로 창건했다는 임영관은 이제 그 터만 남아 그 영화를 뒤로 한 채 무성히 자란 잡초만 뒤섞여 있다. 황량한 임영관 터에 들어서면 박해 시대 천주교인들이 무수한 고문에 못 이겨 신음하던 처절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곳에서 바라다보이는 임당동 성당의 전경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에 만취해 있는 우리가 신앙 선조들로부터 얼마나 값진 은혜를 받고 있는가를 절감케 한다. 2004년 7월에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객사문 보수공사와 임영관 및 관아 유적 복원 공사가 년말 완공을 목표로 한창 진행중에 있었다.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성화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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