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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

뚜르(Tours) 2007. 4. 26. 10:12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느님을 사랑하며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합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비오 12세는 그의 회칙 「거룩한 동정생활」에서 "가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사랑한다는 자연의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고양시키는 것이요, 인간을 사랑하는 대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므로 동시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느님이 우리 마음 안에 사시고, 또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 안에 사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모두 분명 하느님의 것이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빈번히 좋고 싫음을 나타내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쉽게 인간의 본성을 따르고, 예수님의 마음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보다 좋아하는 것, 그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동기에서 입니까? 아니면 자연적이고 위험한 경향에 의해서 입니까? 위험 가운데에 머물거나, 충고가 필요하다는 구실하에 편지를 보낸다든가, 방문자로 인해 위험에 접하게 되는 사람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고백은 너무 길어서 괴로운 때가 있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행동이 애덕에 부합하던가, 이웃의 시간을 낭비시키거나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는 위험 중에 떨어지게 하진 않는가 성찰해야 합니다. 언제나 자기를 경계하고 감시해야 합니다. 자기를 속여 어떤 사람과 같이 일을 하고 싶다든가 무슨 핑계를 대어 특정한 사람을 방문하고 싶다는 마음을 굳히는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기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똑바로 전진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합시다. 하느님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덕은 중용에 있다"는 말을 하지 맙시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완전합니다. 그러한 사랑의 경지는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그렇지만 초보자의 단계라해도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재화나 재산보다 훨씬 귀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능가해서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감각적인 사랑을 느낄 필요는 없으나 예수님을 잃지 않기 위해 모든 것 즉, 생명까지라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약함을 굳세게 해주시기 위해 위로를 주시나 그것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과거를 돌아보아 자기를 낮추고 주께 신뢰하고, 보속하기 위하여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잘 이행하면서 전진합시다. "지금부터 시작하자" 고 하는 것은 현명한 격언입니다. 주께 내일 일에 대하여 너무 이야기하지 맙시다. 오늘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합시다. 악마는 그와 같은 수단으로 많은 사람을 속이니 주의하고 경계합시다. 과거의 것은 이미 끝난 사실입니다. 미래의 것은 아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무익하고 때로는 위험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과거에 대한 생각으로 지성을 어지럽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상상력을 낭비합니까? 예수님의 수난, 죽음, 로사리오 현의의 장면을 그려 보기 위하여 상상력을 동원시키십시오.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 되십시오. 현재의 것을 생각하십시오. 묵상을 하고 있으면서 선교하러 나가게 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까 하는 등의 공상에 골몰하지 않도록 주의력을 전부 묵상에 주입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과거나 미래에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생활은 시간을 낭비할 뿐입니다. 특히 신의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악마가 올바른 길에서 빗나가게 하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획득하고, 보존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매일, 아침 저녁 자기 등잔에 불을 밝히는 것, 즉 아침 첫 시간과 밤 마지막 한 시간을 잘 지내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하루 전체가 축복받은 날이 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즉시 주께 생각을 돌립시다. 미사성제와 성체를 영할 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심지를 돋구고 묵상에서 이를 밝힙시다. 밤에는 헛된 생각에 골몰하지 않도록 하느님 안에 자기를 잠그고, 하루의 모든 활동과 밤중에 무의식적으로 하는 활동, 즉 심장의 움직임이라든가 호흡까지도 하느님께 바칩시다. 내일도 또 예수님을 모시고 싶다는 원의를 가지고 잠자리에 듭시다. 하루 중에 죄로써 거룩한 사랑의 불을 끄거나 약화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약화시키는 일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주께 맡기고 끊임없이 경계합시다. 십자가나 영적 건조가 있겠지만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불을 끄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극복한다면 사랑의 불꽃은 오히려 더 강하게 타오를 것입니다. 모든 계명과 서원을 지키면 우리 안에 항상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더하는 것이 되고 생의 마지막에는 죽음을 잘 받아들임으로써 영원에까지 존속하는 이 사랑을 봉인하는 것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의지와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참사랑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덕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뜻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여러 가지 명목으로 주어집니다. 비컨대 어떤 것을 할 때 고통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어도 참고 견디면 인내라 부르고 그것을 행하면 인내의 덕을 실천하게 됩니다. 자기가 생각한 것을 무엇이나 다 이야기하지 않고, 이야기하기 전에 반성하는 것을 현명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지만 실제로 나타날 때는 믿음, 희망, 사랑, 정의, 절제, 용기, 순명, 청빈, 정결, 겸손 인내라고부릅니다. 여러 가지 덕에도 객관적으로 질서지어지는 것이 있으며 그 첫째로 대신덕 다음에 사추덕, 윤리덕, 정결, 청빈, 순명, 인내, 그밖에 다른 덕이 따릅니다. 이는 이론으로 본 경우의 객관적 순서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에 따라 다소 주관적인 순서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순명의 덕을 획득하기위하여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져야 한다"고 자기에게 들려줍니다. 그의 첫째 덕은 겸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하여 그에게는 겸손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의 생각 원의, 행동, 말하는 방식 등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덕을 획득하기 위하여 겸손하게 말하며 순명에 있어 진보하겠노라고 결심합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인내가 필요하므로 이 덕에 관한 결심을 해야 합니다. 더욱 정력적으로 되어야 할 사람은 열심에 관한 결심을 세우고, 태만이나 나태와 싸우도록 합니다. 이렇게 해서 열심해질 때 이는 진보입니다. 신심, 생각, 원의를 매일 잘 실천하는 사람은 진보합니다. 자기를 아는 은혜를 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주여, 당신을 알고 자신을 알게 해주십시오. 무한한 책이신 당신을, 또한 자신을 아는 지혜를 주십시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참으로 하나의 신비라는 것을 느낍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가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어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기 좋은 대로 조절되지 않는 몇몇의 유전적 결점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자신의 성찰노트를 읽고 자아를 더 밝은 곳에 내어 놓도록 합시다. 이 자아를 조정해야 합니다. 때때로 그것이 고뇌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데에서 즉 환경, 명령, 장소나 사람에게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성성도.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 23)고 말씀하시고.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요한 15, 9)고 덧붙이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합시다. 우리 생활은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계명이라고 한다면 이를 부단히 준수해야 합니다. 천국은 영원히 계속되는 하느님의 일치입니다. 이에 대비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지성, 의지, 마음 모두가 주님과 일치되어 사는 것입니다. 서서히 하느님과 일치하여 가면 이 지상 사물에 대한 흥미를 잃고 영적 생활의 대가들이 말하는 거룩한 무관심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우리 최고의 선, 최고의 진리, 최고의 즐거움, 행복 자체이신 하느님에게로만 생각이 쏠리게 됩니다. 이 지상 사물에 대하여 무관심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곳에서 살게 되는가, 어떤 의무가 주어지는가, 건강한가, 병약한가, 성격이 비슷한 사람과 일을 하게 되는가 아니면 성격이 전혀 다른 사람과 일을 하게 되는가, 하는 것 등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무관심은 정면공격보다도 간접적 접근 즉 감실의 그리스도께 달아들므로써, 또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성장하도록 노력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연적 애정의 불은 저절로 없어지고 맙니다. 우리 원의를 오직 하나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하여 하는 것에 집중시키도록 합시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섬세한 양심성찰과 고백성사, 열심한 영성체, 성체방문, 미사 및 사생활과 공생활에 있어 스승께 대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 행동, 일은 감실에서 열을 받아야 합니다. 참된 신심을 쌓도록 합시다. 신심이란 항상 준비되어 있고,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하는 각오가 되어 있는 관대한 의지, 예수님이 어떤 것을 원하시든 이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의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적극적인 태도로 다음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것이 아닌 모든 것에서 자기를 떼어 놓고 하느님과 일치하면 할수록 그의 천국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참사랑의 길, 곧은 길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하느님의 은혜, 초자연적 은혜이지만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 편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 은혜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어머니인 성 마리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타고 있던 성 바울로께 청해야 합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로마 8,35) 하고 성바울로는 말합니다만 우리는 모두 성바울로와 같은 인물은 아닙니다. 그가 열거하고 있는 것은 때때로 우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떼어 놓으면서 그와의 일치를 방해합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한 마디 말, 가벼운 격정적인 말, 혹은 얼마되지 않 는 육체적 고통에도 마음이 산란해지는 우리입니다. 곤란이나 고통 등은 어림도 없습니다. 만일 높은 성성에 달하여 천국에서 하느님 가까이에 머물고자 한다면 우리를 사랑하여 아낌없이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무엇인가를 참아 견디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의 것은 중히 여기나 하느님 나라의 것은 조금도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동지는 많으나 성인은 아주 적습니다. 모든 것을 사용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깊게 합시다. 지상의 것은 모두 언젠가 사라져 없어집니다. 우리에게도 인생의 종말이 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최고의 선, 영원한 행복으로 남습니다. 복자 G. 알베리오네 신부의 영적 가르침 「믿음 희망 사랑」에서 성바오로출판사, 1988 - 개인날 오후님께서 올려주신 글 입니다.-

† 기쁜날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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