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벽 성조는 1754년 경기도 포천군에서, 경주 이씨 이부만 공을 아버지로 청주 한씨를 어머니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고, 한 때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검단산 아래 윗두미에서 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원로 대학자 성호 이익 선생께서 어린 이벽을 보고, ''이 아이는 앞으로 반드시 아주 큰 그릇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성조께서는 다섯 살 때에 이미 철이 났고, 일곱 살 때는 경서를 읽었으며, 열아홉살 때, 권상복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天學考''를 지어 실었고, ''상천도(上天道)''라는 글을 지어, 부근에 있는 奉先寺 춘파대에 기증하였다. 스물 다섯 살 때, 성호 이익 선생의 학풍을 이으려는 선비들 중 정약전, 이승훈, 권 상문 등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이때 이미 이벽 성조께서는 천학도리를 아주 깊이 깨닫고, 믿고 있었다. 특히, 천학에 관한 서적들은 현고조부 이경상 공이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년간 있다가 귀국할 때, 아담샬 신부에게서 천주교 도리를 듣고, 중국인 천주교신자 5명을 환관으로 데리고 왔었는데, 그 때 가지고 왔던 천주교 책이 집안에 전하여 오던 것이었다.
이벽 성조는 키가 8척이요, 한 손으로 무쇠 백근을 들 수 있었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뛰어났었고, 특히 언변은 기세 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1779년 기해년 음력 섣달, 심산 궁곡의 한 절간에서, 학자 권철신 성현이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승훈, 정약종, 이총억, 정약용, 권일신 등과 함께 강학회를 개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벽성조께서는 일백여리 눈길을 걸어 권철신 성현이 자주 우거하던 주어사에 밤늦게 도착하였으나, 강학회는 뜻밖에도 앵자산 너머에 있던, 폐허가 다 되어 스님들이 사용하지 않는 천진암 암자에서 열리고 있다 하므로, 그 길로 엄동설한인데도 눈에 덮힌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에 이르러 촛불을 밝히시고 학자들과 경서를 담론하셨다. 여러 날 계속된 강학회에서, 학자들은 이벽 성조의 논증으로 천주교 도리를 대강 깨닫고 믿으며, 아는 바를 즉시 실천하였다. 이때 이벽 성조께서는 성교요지를 하필하시고, 천주공경가를 지으셨으며,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지었다. 더욱이 칠일마다 주일 하루는 천주공경에 바쳐야 함도 알았으나, 그 당시 우리 나라에는 요일이 없었고 또 요일을 아직 몰랐으므로, 음력으로 매월 이레, 열 나흘, 스무 하루, 스무 여드레를 주일로 삼아, 온종일 대재와 소재, 파공과 기구, 독경과 잠심으로 지냈다. 이 강학회를 통하여 이벽 성조께서는 천학을 천주교로, 천주학을 천주교로, 즉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셨다.
1783년 가을, 이벽 성조께서는 몇 해 동안 수차에 걸친 시도와 노력 끝에 마침내 이승훈 성현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시며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 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심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 보고, 그 교리를 깊이 배우고, 그 종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하고 당부하였다. 이승훈은 이를 대스승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겨, 영세와 성서, 성물 구입 등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고 귀국하여, 한국천주교회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784년 이승훈 성현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귀국하자 이벽 성조께서는 조선천주교회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들을 입교시키고, 김범우,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도 바로 입교시켰다. 요한세자 이벽 성조와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이 3명의 학자들은 자기들이 개척한 새 종교를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전파하며, 동포들의 눈에 신앙의 광명을 비추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 때까지는 복음 전파가 공공연하게 별 지장이 없이 행하여졌다. 이벽 성조께서는 여러 양반들에게도 전교하여 입교시키셨는데, 이에 강력히 반대하는 지성인들과의 토론과 논쟁이 불가피하였다.
고명한 학자로 평판이 높았던 이가환은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듣고 "이것은 매우 큰일이다. 저 외국 교리가 이치에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내가 가서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토론 날짜가 정해져 두 학자의 친구들과 호사가의 한 떼가 이 굉장한 토론을 참관하려고 이벽 성조의 집에 모였다. 사흘동안 계속된 토론회는 마침내, 이가환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같이 말하며, 이가환은 돌아갔고 그때부터 천주교에 관하여 다시는 입을 열지도, 전혀 상관하지도 않았다. 두 번째 토론회는 문의현감 이기양과 하였는데 역시 광암 이벽성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고, 서울 장안의 선비들은 술렁거리며 이벽성조께로 쏠리기 시작하였다.
1785년, 을사년 이른 봄, 드디어 최초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1년간에 걸쳐 약 500명의 입교 영세자를 낸, 이벽 성조의 수제자들이었던 학자들은, 명례방 김범우 선생 집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다. 교회예절 거행을 위하여 청색도포로 정장하신 이벽 성조께서 안 사랑 상좌에 벽을 등지고 좌정하시고, 학자들은 이벽성조 둘레에 무릎을 꿇고, 손에 책을 들고 엄숙한 자세로, 강론과 교리해설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1년 전에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되었던 이승훈, 대학자이던 사우 거사 권일신, 그 아들 권상문, 정약용과 그 형들인 약종과 약전, 그 외에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지황, 김범우, 이총억 등 한국천주교회창립의 기둥과 같은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이 때 추조금리들이 갑자기 들어와, 수색을 하고, 성물과 성서를 몰수해 가는 동시에, 집주인이며 중인 계급인 김범우 선생을 체포하여 가고, 다른 이들은 양반집안의 신분을 가진 학자들이므로, 그대로 집에 돌아가라고 하였다. 권일신 성현이 몇몇 양반학자들과 함께 추조판서를 찾아가, 김범우와 함께 벌받기를 청하였으나, 추조판서는 이 양반학자들을 잘 달래다시피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김범우만은 계속하여 모진 매를 때리면서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양반들을 벌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 같은 양반들의 문중세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반집 문중마다 종친회의를 열게 하고 천학을 규탄하는 통문이 서울에 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서울 4대문 안과, 문밖, 그리고, 강상 지역과 강하 지역의 여러 대감집들과 양반집들에게 이 통문을 돌리는 책임자들이 따로 정해졌을 정도였다. 그 중 경주 이씨 문중회의가 가장 혹심한 반발과 무서운 질투로 충만하였다.
그리하여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 공은, 문중회의에 번번이 불려가서, 수치스러운 모욕과 문책을 당하였다. 아들 이벽 성조의 천학운동을 막든가, 막을 수 없으면, 아예 족보를 빼어버릴 터이니, 어디에 가서나, 경주 이씨로 행세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족보에서 삭제되면, 양반에서 상놈이 되는 것이고, 하루아침에 탈관삭직에 패가망신하는 것이었다.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공은, 가뜩이나 성격이 괄괄하고 쉽게 격분하는 무관기질이었으며, 체면과 위신을 크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사실 당시 한국의 양반들은 거의가 다 그러했다. 이부만공은 아들 이벽 성조를 불러 놓고, 달래고, 야단치고, 위협하고, 갖가지 수단을 다 써 가면서, 천학운동을 하지 말 것과,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잘못을 빌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문중에서는, 평창 이씨 집안에서의 이승훈 성현의 사과와, 라주 정씨 집안에서의 정약용 등의 사과 소식을 들은지라,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벽 성조의 태도에 대하여 한층 더 격분하였다.
그래서, 서울 시내 양반들의 통문이 사방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규탄 모임과 반대회합이 빈번하여 경주 이씨 문중회의는 더 더욱 격렬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부만 공은 펄펄 뛰며 발을 굴렸다. 온갖 수단 방법으로도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는 아들의 굳은 마음과 의지를 보고, 마침내 대들보에 노끈을 걸어, 목을 매달아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부만 공이 목을 매달게 되자, 어머니와 형제들과 친척들과 벗들이 모두 이벽 성조에게 달려들어, 아버지의 목매달은 모습을 가리키며 야단을 쳤다. 특히 그 어머니는 아들 이벽 성조에게, "천학이 아무리 좋은 도라지만, 아버지를 목매달아 죽게 하는 그런 도를 누가 닦는단 말이냐? 아버지가 목매달아 죽는데도, 그래도 천학운동을 하러 다니겠다는 말이냐?" 하며 애원과 탄식과 절규로 부르짖었다. 이벽 성조께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사회윤리의 제일로 삼는 때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우선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하여, "그럼 나가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하였는데, 즉, 집안과 문중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까지, 좀 고요히 있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 바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목을 매달고 있는 이부만 공은 자살기도를 중단하고, 아들이 천학을 하러 다니지 않겠다고 하였음을 문중에 알렸다.
그러나 문중에서는 이를 신용하지 않고 이부만 공에게 이벽성조 자신이 직접 문중회의에 나와서 자명소를 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벽 성조께서는 아버지에게 "문중회의에 나가서 천주학을 배척하거나 그만두겠다는 말대신, 오히려 종친들에게 천주교를 이해시키고, 경주이씨 문중이 모두가 먼저 천주를 공경해야 함을 알리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아버지 이부만공은 아들이 천학운동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문중에 이미 성급하게 통고한 후였기 때문에 입장이 난처하였다. 이부만공은 아들의 외출을 금지하고, 문중 어른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들이 병으로 갑자기 앓아 누어서, 문중회의에 나가 자명소를 할 수 없으니, 이해해 달라고, 예나 지금이나 으레 할 수 있는 핑계를 대는 동시에, 아들이 앞으로 천주학을 안하기로 하였으니, 믿어달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문중회의에서는 직접 글로 써서, 천주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도록 하라고 요구하였다. 아버지가 아들 이벽 성조에게, 붓으로 천주학을 하러 나가다니지도 않을 것이고, 또 천주학을 하지도 않겠다고 써서, 종친회에 보내라고 하자, 이벽 성조께서「령득경신기」라는 글을 지어내니, 이것은, 천주 공경의 필요성과 방법과 순서를 간략하게 알리는 내용이었다. 아버지 이부만공은 이 글을 보고 크게 분노하며, 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고까지 극언을 하였다. 할 수 없이 이부만 공은 아들이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위중하며, 이벽이 이미 천주학을 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믿어줄 것을 거듭 부탁하였다.
그러자, 종친회에서는, 더욱 의심하며 격분하였다. 그렇게 건강하고, 그렇게 활달한 광암 이벽 성조께서 무슨 병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앓는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므로, 문중회의에서 대표를 보내니, 그 대표에게 확약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이부만공은 이벽 성조를 후원 별당에 머물게 하고 출입문에 못을 치고, 집밖에는 새끼줄로 금줄을 매고, 종들을 시켜 지키게 하고는, 아들 이벽이 천주학을 하다가 천벌을 받아, 열병(속칭 염병)에 걸려서 다 죽어가니, 가족들도 전염될까 두려워 출입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때에, 천주교 신자들이 이벽 성조를 뵈오러 찾아와도, 면회가 불가능하였으니, 아버지 이부만 공은 종들과 졸병들을 시켜서, 문전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거절하며 야단을 쳤다.
이벽 성조께서 모든 것이 다되어, 때가 이르렀음을 아시고, 목욕하고 깨끗한 의복을 갈아입은 다음, 의관을 바르게 한 후, 방안에서, 좌정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의관을 바꾸지 아니하며, 잠을 자지 않고,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셨다. 당시 한국 예의상, 부모가 격노한 경우, 자녀들이 며칠씩 식사를 않하거나 못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천주밀험기 3권이 이때 저술되었다는 설이 있고, 혹은 2,3개월간이나 문중회의와 겨루면서, 집안에 감금당하여 있는 동안에 집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마지막에 가서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고, 고요히 기도에 열중하면서, 천주를 생각하고 명상하다가, 단식 15일이 지나자, 완전 탈진하여, 그 자리에서 운명하시니, 1785년 음력 6월 14일 밤 12시였다고 정학술의 이벽전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유림과 문중에는, 당시에 한양의 선비들이 천주교로 몰리고 있었으므로 이벽성조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장차 나라와 사회가 뒤집히게 되고, 경주이씨 문중이 멸문지화를 입는다하여 이벽성조를 독살하였다는 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1979년 6월 21일 이장 때 시신을 발굴하였는데 시신이 검푸르게 마르고, 치아가 검고 흑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음을 보고, 당시 이장위원회의 유해관리 책임자였던 가톨릭의과대학 해부학 주임교수 권흥식박사도 검시하면서 독살의 가능성을 강조하였었다. 어떻든 이벽성조께서 신앙을 위하여 순교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벽성조께서 운명하셨을 때, 양반대가의 집안이므로 사돈간이던 정약용 선생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輓詞를 지었다. "神仙 나라 鶴이 人間世에 내려오사, 神聖한 風采를 보이셨네(仙鶴下人間 軒然見風神), 희고 흰 날개와 깃털, 눈같이도 하얗더니, 닭과 오리 떼들 샘내며 골부리고 미워했었네(羽 皎如雪 鷄鶩生嫌嗔), 울음소리 九重天을 振動시키고, 부르짖던 소리는 風塵世에 出衆하셨었지(鳴聲動九 亮出風塵), 어느덧 가을되어 문득 날아가시니, 애�아 탄식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乘秋忽飛去 空勞人)." 일찍이 조선교구 제5대교구장이었던 다블뤼 안주교는 그의 朝鮮殉敎史備忘記 머리말 첫 페이지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 역사는 이벽의 저 위대한 강학에서 시작하였다"고 기록하면서,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이벽성조의 역할과 위치를 강조하였으며, 정약용도,"이벽이 수령이 되어 천주교회를 전파하였다"고 기록하였고(李檗首先西敎), 김대건 신부도 조선천주교회 창립에 있어 李檗博士의 역할을 먼저 다루었다.
[출처 :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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