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문모 신부의 입국 : 한국에서 복음선교의 시작이 되는 1784년 명례방 김범우 선생 댁의 집회는 바로 그 이듬해 형조의 나졸에 의해 발각되어 집회는 해산되고 집주인인 김범우는 형조에서 매맞은 상처가 덧나 귀양지에서 선종하여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을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하는데, 1785년 이 사건 이후 권일신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재건운동 과정에서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교계체계와 성사집행을 모방하여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유항검 등 10여명의 지도자들이 스스로 신부 역할을 맡아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고해성사 등을 집행했다.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복음선교가 시작된 한국교회는 역시 세계교회 역사상 유례가 없이 이렇게 평신도들에 의해 임시성사가 집행되는 현상을 초래했다. 이들은 대단히 성실하고 정성을 다한 자세로 전례와 성사를 집행했다. 초창기 교리지식이 부족하여 시작된 이 임시성사 집행은 차츰 교리공부를 하면서 전례와 성사는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가 집행하는 것이며 또 사제들은 순결을 서원하여 독신생활을 한다는 대목을 읽고, 자신들의 행위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북경주교께 서신을 보냈다. 서신을 가지고 갔던 윤유일은 북경주교의 친서를 받아 왔는데, 한국에서의 새교회가 시작된 것을 기뻐했으나 교계제 모방과 평신도의 성사집행은 엄격히 금지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에 그들이 행한 성사집행이 교회법에 어긋남을 알고 즉시 중단했다. 한국 초대교회는 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비로소 사제의 필요성을 깨닫고 북경주교께 사제를 청원하는 사제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국 평신도들이 사제파견을 간청하는 서신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과 감격에 휩싸이게 하였다. 1790년 10월 6일자로 발송한 이 첫 사제파견 청원서를 본 북경주교는 이를 교황청에 전하였고, 교황 비오 6세는 크게 감동하시며 북경주교의 보호를 특별히 명하였다. 이에 북경주교는 1791년 2월 마카오교구 소속의 요한 도스 레메디오스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신부와 조선교회의 연락교우가 만나지 못해 신부의 입국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사제를 간절히 청원했던 조선교회는 사제를 맞아들이지 못한 체 1791년 ''진산사건''이라고 알려진 박해를 받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 박해로 인하여 한국교회 지도층은 양반지식인층에서 완전히 중인계급의 지도자로 바뀌었다. 이때 교회의 새지도자로 최창현, 최인길, 지황, 강완숙 등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박해 속에서 재정난과 사제영입의 삼중적 고통을 겪으면서 각기 어려운 임무를 분담하여 북경에 다시 사제파견을 간청하였다. 북경의 구베아주교는 조선교회의 참상을 이해하고 박해 속에서 사목의 가능성이 높도록 조선인과 비슷한 모습을 지닌 중국인 신부 주문모 야고보를 선정하여 조선에 파견하였다.
주문모(1752~1801) 신부는 그 무렵 유행하던 방식에 따라 ''벨로조''라는 포르투갈식 이름도 가졌는데 중국의 소주 곤산현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모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소년 주문모는 어렵게 자랐지만 총명하고 성실하여 칭찬을 받으며 글을 읽고, 과거를 준비했으나 잇달아 낙방했다. 20세가 되어 결혼하였으나 3년 만에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 혼자 살게 되었다. 그의 청년기 이 기이한 인생의 도정은 독특한 체험으로 생에 대한 회의와 정신적 편력을 하게 했지만 장년기에 들어설 무렵 천주교를 알고 안정을 얻어 북경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1793년 조선 입국에 실패하고 병사한 레메디오스 신부의 뒤를 이어 선교사로 임명된 주문모 신부는 그 사도직 수행을 위한 일반적 권한과 비상권한을 모두 받아 가지고 1794년 2월 북경을 떠나 20일 만에 조선 국경에 다다랐다.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1794년 12월 23일 윤유일과 지황의 안내를 받으며 머리를 조선식으로 꾸미고 옷을 갈아입어 조선인처럼 변장하고 강을 건넜다. 1795년 정월에 서울에 도착한 신부일행은 그 무렵 박해 속에 고난을 겪던 조선신자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교우들은 신부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맞아들였다. 신부 또한 극진한 교우들의 환영을 받고 ''뒷날 내가 만약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들 이같은 환영을 받을 수 있을까''하며 그때를 회고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최인길 마티아 회장이 마련한 북촌의 계동에 머물렀다. 그는 미사성제를 드리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시키고 빨리 성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조선말 공부에 전력하였다. 그 해 성토요일 세례를 주고 또 보례를 행하였으며 몇몇의 선비에게는 한문으로 써서 고해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평신도들의 성사생활에 대한 열정과 사목자의 성직수행에 대한 사목적 열의가 한데 어울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초대교회의 불꽃같은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란 말처럼 이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첫 사목은 별로 신앙이 굳지 못한 양반집 자식 한영익이란 자에 의해 밀고 당했다. 조선조정과 국왕은 즉시 신부를 체포할 것을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명령하였다. [출처 :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29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2) 주문모 신부의 사목활동 :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시작된 한국교회가 박해와 빈곤의 난관을 무릅쓰고 10년 만에 사제를 모셔와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생활을 하게된 감격과 환희는 한영익의 밀고로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한영익이란 진사는 신부가 있는 곳에 인도되어 신부를 면회하고는 밀고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천주교를 공공연히 반대하고 조정에서 신임을 받고 있던 이벽의 동생을 찾아갔다. 이로서 의정부와 국왕인 정조까지 사실을 알게되고 체포령이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내려졌다.
다행히 배신자를 경계하여 행동을 염탐하던 교우들이 밀고사실과 조정의 체포령을 미리 알고 전해 주었다. 주문모 신부는 다급한 상황에서 우선 당시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최인길 회장이 혼자 남아 이제 곧 포졸들이 들이닥칠 집을 지키고 있었다. 최인길 회장은 이때 도망쳐 충분히 살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졸의 추적을 지연시켜 신부가 완전히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신부행세를 해 대신 잡혀갈 결심을 하였다.
최인길(1764~1795, 마티아) 회장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말을 알았으므로 신부행세가 가능했다. 그는 일찍이 교회 초창기에 김범우의 집에서 권일신, 정약용, 이벽 등과 함께 집회에 참여했다. 추조에 의해 적발되었을 때 이벽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사제영입을 위해 윤유일, 최창현, 지황 등과 힘을 모아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주신부가 입국하자 신부가 거처할 곳을 마련하였는데 이제 신부가 밀고 당하여 위험에 처했을 때 사제의 안전을 위해 대신 죽을 각오로 임하고 있다.
그는 중국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변장한 체 포졸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포졸은 집을 포위하고 다가와 물었다. "중국인이 어디에 있느냐?" "나요"하고 최인길 회장이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그는 곧 포장 앞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는 곧 착각한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신부는 수염이 많은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최인길 회장은 그렇지 않았다. 포청에서는 매우 원통하게 생각하며 다시 신부를 찾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신부를 모셔들인 다른 두 사람인 윤유일(1760~1795, 바오로)과 지황(?~1795, 사바)도 체포되어 최인길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신부를 모셔온 경위와 숨은 곳을 대라는 강요를 받고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굳은 결심과 놀랍고도 지혜로운 응답은 신문관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오직 명백하고 용감한 신앙고백이 사제의 숨은 곳을 말하라는 심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었다. 여러 차례의 고문과 형벌이 가해지고, 매를 몹시 맞아 팔과 다리가 뒤틀리고, 손바닥을 제외한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며, 무릎을 으스러뜨렸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들의 의지와 인내를 꺽지 못했고 사제에게 위험이 될 어떤 자백도 끌어내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은 오히려 이 고통 속에서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마침내 이들은 장살형으로 옥안에서 매맞아 죽음으로써 장한 순교의 영예를 얻었다. 참혹한 이들의 시신은 강에 던져져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양)이었으며 지황 사바는 29세쯤, 윤유일 바오로는 36세, 최인길 마티아는 31세였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신부를 맞아들였으며 신부의 안전을 위해 비참하게 매맞아 죽임 당하고 시신마저 강물에 던져진 이들의 순교는 세속적으로 보면 참혹한 불행으로 보이지만 한국교회가 존재하는 한 이들의 모범과 영웅적 승리는 기억될 것이다. 이들의 순교로 주문모 신부는 이후 강완숙의 경탄할 협조를 받아 1801년 순교할 때까지 6년 간의 사목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들이 비록 신유박해 순교자는 아니지만 이들이 남긴 위대한 신앙적 유산을 신유박해 순교자요 첫 사목사제인 주문모 신부와 함께 기억하지 않을 수 없어 간략히 밝혀 두고 가려 한 것이다.
사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이들의 아름답고도 눈물겨운 순교 사실을 접한 북경교회의 구베아 주교는 1797년 이들 세 순교자에 대해 이렇게 간절한 회고와 찬사를 남겼다. "북경교회와 나는 윤유일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을 내왕한 두 번의 여행에서 보여 준 신심과 정성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는 북경에서 고해와 성체성사를 하도 놀라운 열심으로 임하여, 우리 교우들 중 여러 사람이 이 신입교우에게서 복음실천에 통달한 오랜 교우와 같은 모범적인 겸손과 말과 덕행을 봄으로써 느낀 기쁨과 감탄 속에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1793년에는 지황 사바가 북경에서 지낸 40일 동안 그의 신심도 목도하였습니다. 이 도시의 신자들은 그가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을 때에 보여 준 그의 정성과 크나큰 열심과 감격해 흘리는 눈물을 보고 많은 교훈을 받았습니다. 최인길에 관하여는 그가 북경에 온 일이 없기에 눈으로 볼 수 없었으나, 이 교우가 최초의 회장들 중 하나였다는 것과 그의 열심과 신심과 하느님의 영광을 전파한데 보여 준 열성이 뛰어났다는 말을 조선교회를 통해 들었습니다." [출처 :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5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3)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순교 : 급히 피신한 주문모 신부는 여회장 강완숙의 경탄할 협력을 받아 순교할 때까지 약 6년간 사목활동을 하게 되었다. 주신부는 언어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해지고 조선 풍속에 익숙하게 되자 지방을 조심스럽게 순회하며 사목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활동은 감시망을 피하고 밀고를 당하지 않도록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야 했다. 신부의 지극히 제한된 모든 일정은 강완숙 만이 알고 가장 확실한 교우들과의 접촉마저 삼가야 했다. 이로 인해 열심한 신자들이 신부를 뵙고 성사를 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례들을 무수히 남겼다. 이러한 여건에서도 신부가 오기 전 4천명이었던 신자 수가 1만명에 이르는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끊임없는 열성과 뛰어난 재능 그리고 놀라운 덕행으로 조선교회에 봉사했다. 당대의 신자들은 "주문모 신부는 일에 지칠 줄을 몰라 먹고 자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겨우 낼 정도였다. 밤에는 성직을 행하고 낮에는 책을 번역하거나 새로운 책을 지었다. 그는 자주 금식과 극기를 행하고 자기 본분에 온전히 헌신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신부는 신자들의 악습을 엄하게 그러나 지혜롭게 꾸짖어 개선하도록 지도하고, 신자들의 올바른 신심생활을 위하여 ''사순절과 부활시기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신자들이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받을 준비를 할 때 갖추어야 할 마음의 자세에 대해 설명한 신심서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주문모 신부는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을 사랑했다. 그가 한양에 머물고 있을 때에 창골에서 화제가 나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큰 피해가 나고 있었다. 신부는 이를 가슴아프게 느껴 자신이 현장에 갈 수 없는 처지에서 송필립보의 아들을 대신 보내 불길에 성수를 뿌리고 오도록 하였다. 젊은이가 성수를 뿌리러 간 동안 신부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젊은이가 성수를 뿌리자 기이하게도 즉시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주문모 신부는 무서운 위험 속에서 지방순회 사목도 행했다. 여주의 윤유일, 전주 초남이의 유항검, 연산의 이보현, 양근의 권상문 등의 집과 고산, 공주, 온양, 내포지방에 들렀었다. 그러나 박해시기 사제의 안전을 위해 엄중한 비밀로 행해져 많은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는 또 북경에서 가졌던 모임을 본떠서 한국 최초의 평신도사도직 단체인 명도회를 창설하여 천주교 교리지식을 배우고 또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주신부는 이 집회를 무게 있고 절도 있게 조절하였으며 그의 열성에 감화되어 회원들이 서둘러 모여들었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교회 사목결과 보고와 조선조정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어 안전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실현시키기 위해 북경교회와 연락을 계속했다. 이때 주신부의 편지를 북경교회에 전하는 밀사의 역할을 황심과 옥천희가 믿음직하게 수행했다. 이들 편지 중에는 포르투갈 왕에게 대선박 사절단의 파견을 요청하여 조선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이 국교를 체결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도 있다. 당시 상황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어보려는 주신부와 조선교회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이는 전혀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주문모 신부는 조심성과 재능, 열성과 덕행으로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사목활동을 전개했으나 교활한 자들의 끊임없는 밀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냉담교우 김여삼은 개인적인 물욕과 어이없는 증오심으로 신부를 포청에 고발했다. 밀고자는 이때 관직과 보수를 보장받고 신부의 은신처를 안내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김여삼이 여행중 병이 들어 관리와 만나지 못해 이 밀고음모는 다행히 실패했다. 밀고와 감시를 피해 위험을 겨우 면해가던 무렵 마침내 정순왕후 김대비의 박해령이 내려지자 천주교 신자들을 본격적으로 색출하여 체포구금하고 형벌을 가하였고, 수많은 신자들이 특히 주문모 신부의 은신처를 추궁 받으며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받고 희생되는 것을 보고 차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가 중국으로 돌아가고 없으면 교우들이 자기 때문에 추궁 받는 희생은 없을 것이고 어쩌면 박해도 중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밀고를 피해 경희궁에 이틀을 숨었던 주신부는 귀국 길에 올라 조심스레 혼자서 의주까지 갔다. 압록강만 건너면 꿈에도 그리던 그의 고국 땅이요 죽음도 피할 수 있는 고향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한순간 착한 목자로서 그는 하느님 은총의 은밀한 계시를 느꼈다. 목자는 양떼와 운명을 함께 한다. 양떼는 목자를 위해 죽음으로 안전을 지켰는데 목자가 어찌 강을 건너 목숨을 구하리요! 그는 한양으로 돌아와 "내가 당신들이 사방에서 헛되이 찾는 그 신부요!"하고 관아에서 신분을 밝히고 자헌하였다.
1801년 4월 19일(음) 조정은 격론 끝에 주문모 신부의 군문효수형을 집행했다. 그 순간 청명하던 하늘에 무서운 선풍이 일고 거듭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쳤다. 모두가 이를 보고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구나!"하며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2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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