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천(晩泉) 이승훈(李承薰) 베드로(1756-1801년)
이승훈 성현은 1756년 서울 반석방에서 당시 대문장가였던 평창이씨 이동욱 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현께서는 학문을 사랑하던 정조시대에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시파의 선비로서, 일찍이 1779년에 열렸던 천진암 강학회를 통하여 광암 이벽성조에게서 당시 천학이라 부르던 천주교의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 북경 천주교회와 연락을 도모하던 이벽 성조의 명을 받은 이승훈 성현께서는, 동지사로 북경에 가게된 아버지 이동욱공을 따라 1783년 늦가을 북경 천주당에 가서 세례를 받고 이듬해 이른 봄에 귀국함으로써 국내에서 선교사없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갓 태어난 조선천주교회 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승훈 성현이 북경 사절단에 자기 아버지를 따라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벽성조께서는 몹시 기뻐서, 즉시 그를 찾아갔는데, 그 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이벽성조께서 이승훈성현에게 한, 주목할 만한 말은 다음과 같다.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횔세.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는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며 남북극 원리며 천체의 규칙적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의 강생이며, 선인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인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사실 종교서적을 아직 많이 접하거나 깊이 연구하지 않아서 천주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던 이승훈 성현은 이벽성조의 말씀에 크게 감명을 받아서, 책을 몇 권 더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벽성조께서 가지고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 보고 나서, 기쁨에 넘쳐, 자기로서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천주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라고 했다.
이벽 성조의 이 말씀은 학문의 갈증보다도 종교의 갈증이 그에게 더욱 절실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준비한 것이니, 그에게는 구령대사가 점점 더 유일한 중대사가 되어 갔던 것이다. 이벽성조의 말씀은 이승훈 성현의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이승훈 성현은 이벽성조의 말씀을 대도사님(大道師)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부여된 사명을 완수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승훈 성현은 드디어 1783년 11월 18일 동지사 일행에 섞여서 아버지 이동욱 공을 따라 그 해 말 경에 북경에 도착하였고, 북당에 가서 1784년 이른 봄 귀국 전에 드 그라몽신부 에게서 세례를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가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았다.
즉, 갑진년(1784) 봄에 이승훈성현은 북경에서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과 상본과 성물을 몇 가지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에게 제일 급한 것은 이벽 성조에게 자기 보물의 일부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날을 세어가며, 사신들의 귀국을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이벽성조는 이승 훈 성현이 가져온 많은 서적을 받자마자, 외딴 집을 세내어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이벽성조께서는 천주교 진리에 대한 더 많은 논증 방법서적과,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에 대한 더 철저한 반박서적, 7성사의 해설서, 교리문답과 복음성서의 주해, 그 날 그 날의 성인행적과 기도서 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천주교라는 것이 어떠한 종교인지를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 가면서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속에서 움터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신앙은 이렇게 생장하고 있었고, 신앙과 더불어 자기 동포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알려주고자 하는 의욕도 커갔다.
얼마 동안 연구한 뒤에, 자기 은둔처에서 나온 이벽성조는 이승훈과 정약전, 약용 형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오.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 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
이리하여 우리 나라 선비로서 처음으로 정식 세례를 받게된 이승훈 성현은 자신을 북경에 파견한 이벽성조와 그 동지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승훈 성현으로부터 [요한세자]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은 이벽성조는 그 때부터 전교에 나서서, 권철신 형제와 정약종, 약전, 약용 삼형제와 중인이던 김범우, 등에게 세례를 주고, 차차 믿는 사람이 늘어감을 보고, 서울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선생의 집을 교회로 삼아, 이승훈 성현과 함께, 최초의 주일행사를 지내게 되었다. 머리에 책건을 쓰고, 집회에 모인 수십명의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자신이 처음 창립한 조선 천주교회를 더욱 튼튼히 발전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밖으로부터 어떠한 성직자가 들어와 전교함이 없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은 온 세계의 전교 역사상에 있어서,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이때부터 우리 선조들은 서로 교우라고 불러, 엄격했던 그때의 계급제도를 타파하면서, 조상의 신주를 신처럼 모심을 걷어치우고, 언문이라고 불러 업신여기던 한글로써 한문 교리책을 번역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세워진 조선 천주교회는 이듬해 1785년 3월에 관헌에게 발각되어 해산되고, 그 집을 교회로 쓰게 하였던 역관 김범우선생은 잡히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단장으로 귀양가 2년후 즉 1787년 정미년 음력 7월 16일에 장독(杖毒)으로 죽으니, 2년 전 을사박해 당시에 순교한 이벽 성조의 뒤를 이어 한국천주교회가 두 번째 바치는 殉敎祭가 되었다. 이리하여 모처럼 세워진 교회가 첫 박해를 받게 되니, 동방의 [베드로]이던 이승훈 성현은 문중의 유림으로부터 또 가정의 형제들로부터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이 을사박해로 서울의 양반들이 모두 통문을 돌리며 들고일어나자, 문중의 유림들과 원로들이 연쇄반응으로 일제히 분격하여 일어났으며, 서울 양반들의 영향은 문중으로 가정으로 점점 강도를 더해서 심한 박해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훈 성현의 아버지는 아들이 보는 모든 천주교 책들을 빼앗아 안마당에 쌓아 놓고, 문중대표들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불을 질러 태우게 하니, 이른 바 분서(焚書)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도 이승훈 성현께서는 굴하지 않고 신유박해 때 목이 칼에 떨어질 때까지 신앙 전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이승훈 성현은 그 처남들과 더불어 글을 닦던 반촌에 집회처를 정하고, 자신과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정약용 등을 함께 신부라 일컬으면서, 주일미사 등의 행사를 가졌다. 이러한 임시준성직자단을 만들어 얼마동안 지내는 사이에, 그 임시준성직자단 중의 어떤 이가 이러한 직무가 교회법에 잘못되고 어긋나는 것을 알고난 후, 1789년 10월 북경에 윤유일을 보내어서, 그 제도가 잘못된 것임과 조상의 제사를 지냄도 옳지 못하다함을 알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이승훈 성현은 임금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1789년 33세 때에는 경기도 평택현감이 되었으나, 그는 그 벼슬자리에 나아가서도 천주교신앙 때문에 공자 위패를 모신 향교의 문묘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림의 지탄을 받아, 2년 후 그 벼슬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후 다시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가던 이승훈, 권일신 등은 북경 주교로부터 임시준성직자단을 없애라는 지시를 받자, 곧 윤유일을 그곳에 거듭 보내어, 정식 신부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북경 주교 구베아는 1794년 12월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보냈다. 이리하여, 주 신부가 이듬해 정월에 서울로 들어와보니, 조선천주교회는 이벽성조의 창립 이후, 임시준성직자단의 활동으로 이미 4000여명의 영세신자를 가진 큰 교회로 성장되어 있었다. 주신부는 강완숙이라는 여회장의 집에 숨어서 4천명의 교우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때, 우리 정부는 외국인 신부가 들어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잡으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최인길, 윤유일, 지황 사바만을 잡아죽이고 이승훈 성현을 충청도 예산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주 신부는 다행히 살아서, 이후 충청도, 전라도 지방까지 두루 다니면서 전교에 힘쓴 결과, 1801년까지에는 많은 수의 교우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정조가 갑자기 그해 6월에 죽고, 그의 계조모이던 벽파의 김대비 정순왕비가 11세의 어린 임금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의 정권을 잡게 되니, 그녀는 그해 12월부터 교인들을 잡기 시작하여, 이듬해(1801)에는 삼백여명의 교우들을 죽이는 신유박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승훈 성현은 체포되자마자 박해자들의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로 매일같이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신앙을 고백하며 굽히지 않으므로, 억지로라도, 천주교를 버린다는 소문을 내야만 하는 박해자들은 그의 취조문에 이승훈 성현의 대답이 아닌 자기들의 생각을 추가하여 허위조작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장안의 선비들이 모두 존경하는 대학자 이승훈 성현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소문을 꼭 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배교선언자들은 모두, 죽이지 않고 살려서 귀양을 보내었으나, 박해자들이 조작한 허위배교자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허위조작의 탄로가 새로운 불씨가 되므로, 천주교를 안 하기로 하고 배교한다고 말했다고 허위조작한 후, 즉시 처형하였다. 이승훈 성현의 경우, 천주와 교회를 위해서 신앙 때문에 칼에 목이 떨어진 사실을 모든 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처형되기 직전 최후의 형벌을 참관한 박해자 대표단이 직접 보고한 바를 읽어보자.
즉 성현이 순교하시기 겨우 12일 전인, 그러니까 2월 14일 대사간 신봉조(申鳳朝)는 이승훈 등 3인의 추국 광경을 목도하고 상소하기를, "신이 추국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친히 눈으로 보오니 승훈 등 3인은 똑같이 완악한 패기가 서로 서려 있고, 마수(魔手) 이용하기를 상습으로 삼고, 차꼬보기를 초개같이 하고, 형륙에 나아가기를 낙지에 나감같이 하고, 그 단서가 이미 드러났건만 형장(刑杖)을 참으려 굴복치 않고, 사찰이 당장 잡혔건만 죽자 하고 실토치 않으니 천하에 이같이 모질고 흉측한 종류가 어디 또 있으리까?" 하였고, 또 며칠 전「헌부신계」 (憲府新啓)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거기도,
"어허, 통탄할 노릇이로다! 가환, 승훈, 약용의 죄여! 칼과 톱 보기를 낙지로 삼고, 이미 대각의 성토가 극률을 청하는데 이르렀건만, 모질게도 움직이지 않고 끝끝내 고치지 않는도다! 지금 이 3인을 치죄하지 않고는 비록 날마다 백 명씩을 베어도 종당 금할 길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이 3인을 먼저 엄히 추국하여 그 정상을 얻어 쾌히 나라의 형법을 바로잡아야 하겠나이다" 라고 했다.
서소문에서 칼을 받기 직전 동생 李致薰 공이 따라가서, 피투성이가 된 이승훈 성현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형님, 천주학을 하지 않겠노라고 한 말씀만 하시면 상감께서 살려주신다니, 아버님과 조카들과 형수님과 저희들을 생각해서라도 한 말씀만 하시어 우선 목숨을 보전하고 보십시다" 하자, 이승훈 성현은 "무슨 소리냐,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고, 물은 치솟아도 못이 마르면 다하느니라(月落在天水上池盡)" 하시어, 당신의 신앙은 변함없이 하느님께 있고, 세도가들의 칼날은 스스로 소멸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장엄하게 순교의 칼을 받으시니, 1801년 음력 2월 26일, 양력 그해 4월 8일이었고, 당시 나이는 45세였다. 박해자들이 서둘러 이승훈 성현의 목을 칼로 자른 이유는, 북경에 가서 최초로 영세하고 왔다는 사실 자체를 박해자들이 몹시 미워하였고(in odium fidei), 이승훈 성현의 목을 잘라야 다른 선비들이 천주교를 믿지 않을 것이니, 교육상 필요했고, 박해자들 자신이 허위로 조작한 배교문장이나 배교소문이 탄로가 날까 우려했기 때문에 서둘러 참수하게 된 것이다.
[출처 :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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