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상식

공관복음서를 통해 본 마리아

뚜르(Tours) 2007. 9. 20. 23:53

 

공관복음서를 통해 본 마리아

  1. 머리말
  2. 마르코 복음
  3. 마태오 복음
  4. 루가 복음
  5. 맺는말

I. 머리말 차례로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인 관심이나 신심이 근대에 들어와서,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 현저하게 높아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전에 그래왔던 것처럼 '마리아론'은 이제 대다수의 신학대학에서 독립된 학과목으로 강좌를 개설하지는 않고 있다. 교황 비오 12세께서 '마리아의 성년'을 선포하셨던 1950년대는 아마 마리아에 대한 신자들(가톨릭 신자)의 신심이나 신학도들의 학문적인 관심도가 대단했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신비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 구원사건의 신비에 속한다. 따라서, '마리아론'은 '그리스도론'과 '구원론' 내지는 '교회론'에 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리아론자들은 마리아의 사명이나 역할이 예수 그리스도에 본질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마리아를 자신들의 연구대상의 핵심으로 삼아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마리아론'을 내세웠다. 대다수의 마리아론자들은 마리아의 신적 모성-마리아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모친-이 곧 마리아에 관한 신학의 기본원리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마리아론자들은 구세사적인 관점에 착안하여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있어서 하나의 협력자로 받아들여 그 신학을 전개해 나간다. 전자의 경우에는 마리아의 신원이나 정체에, 후자의 경우에는 마리아의 사명이나 역할에 그 역점을 둔다고 하겠다. 여기서 신학적인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마리아의 신적 모성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협력자로서의 마리아 모습이 서로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적 모성이 구원사업에서 마리아의 참여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마리아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모친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협력해야만 한다는 충분한 이유조건이 되지 못할뿐더러, 또한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협력하기 때문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모친이라고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마리아에 관한 종래의 신학적 연구는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대전제로 놓고서 다양한 방법으로 마리아를 소개 묘사했었다. 지나칠 정도로 마리아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본모습이 가려질 정도였다. 갈라진 형제(개신교)나 타종교(유다교, 이슬람교)로부터 우리가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교를 '마리아상'라고까지 불리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교회일치운동에 있어서도 종래의 '마리아 신학'은 하나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인간의 지식은 유동적인 하나의 과정이다. 신학적인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신학의 동향이 그렇듯이 마리아 신학이 새로운 열기를 뿜고 확실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성서적 연구가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 본소고에서는 제한된 지면관계상 다만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마리아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곧 마리아께 대한 올바른 이해를 우려는 데에 그 의도가 있다.

II. 마르코 복음 차례로

마르코 복음에서는 마리아와 직접 관련이 되고 있는 예수탄생과 예수 유아기에 관한 설화(마태1,1-2,23;루가 1,26-56;2,1-52)가 없다. 예수 공생활동안 마리아는 꼭 한 번 등장(3,31-35)하며, 마리아에 관한 직접 언급(6,3)이 한 번 있고 마리아에 관한 간접 언급(15,40.47;16,1)이 있다. 마리아에 관한 성서적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마르코 복음서에는 이것들뿐이다.

1. 예수의 참된 가족(3,31-35) 차례로

문맥상으로 볼 때 3장 31-35절은 3장 20-21절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와 친척들 사이가 원만한 관계가 아님을 나타내면서(3,20-21.31-33)은 예수의 말씀(3,34-35)을 기록하고 있다. 원래는 3장 20-21절과 3장 31-35절은 서로 연결돼 있었으리라 보나, 편집자가 3장 22-30절을 삽입하여 이 문맥을 갈라놓았으리라 여겨진다. 이와 같은 수법이 마르코 복음서 안에 몇 군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예로 든다면 5장 21-43절이다. 여기서 5장 25-34절은 5장 21-24절과 5장 35-43절을 갈라놓은 삽입구다. 따라서 3장 31-35절은 3장 20-21절을 염두에 두고서 읽혀져야 한다. 참고로 부언한다면 마태오 복음사가와 루가 복음사가는 자기네 병행구절에서 3장 20-21절을 삭제시켜 버렸다(마태12,22-30;루가 11,14-23; 12,20).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께 왔으나 집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밖에 서서 예수를 부르러 누군가를 보냈다(3,31). 그들은 예수께서 "정신나갔다"(예수께서 실성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부모, 형제, 친척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정처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신 예수를 이해 못하고 단지 정신이상자로 취급했다는 뜻이다)고 생각하고서 예수를 데리러 나자렛에서 가파르나움의 베드로의 집(마르1,29;2,1-15)으로 왔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수를 "정신나간 자"로 취급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예수의 형제들(요한7,5)과 동향인물(마르6,1-6)은 예수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을 아니라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성서상 어느 텍스트에서도 마리아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3장 21절에서는 마리아의 이름이나 예수의 어머니라는 언급이 전혀 없고 그저 "예수의 친척들" 좀더 정확히 말해서 "예수의 사람들"(예수의 가족, 친척들, 친구들 그리고 동향인들, 즉 예수와 관계를 지닌 사람들을 총칭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잇다. 편의상 "예수의 친척들"이라고 의역한다)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마리아도 예수를 "정신나간 자"로 여겼는지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분명히 밝혀낼 수가 없다. 다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의 형제들과 함께 예수를 데리러 온 것만은 분명하며(3,31-33) 마리아는 예수에 대한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고서 예수를 찾아왔으리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데리러 온 자들을 가리켜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3,33)하고 반문하신다. 이 반문 속에는 예수의 냉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이어서 예수는 당신의 참된 가족에 대해 말씀하신다.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보다 예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영적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당신 주위에 둘러 앉아 있는 이들" 즉 당신의 말씀을 듣고서 행동을 같이 하는 자들(제자들)을 가리켜 예수께서는 당신 가족이라고 말씀하신다(3,34). 이들은 곧 모든 것을 버리고 특히 가족을 멀리하고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다(마르 10,28-30).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을 멀리할 것을 여러 번 요구하신다. 당신보다 가족을 더 생각하지 말 것(마태10,37;루가14,26), 아버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말고 당신을 따를 것(마태8,21-22;루가9,50-60),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를 나누지도 말고 즉시 당신을 따를 것(루가 9,61-62),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결혼생활까지도 포기할 것(마태19,12)등등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보다도 당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적인 가족관계를 분명히 높게 평가하신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곧 당신 가족의 일원들이라고 예수께서는 덧붙여 강조하신다(3,35).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만이 예수의 뜻을 식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한7,17). 그렇다면 마리아는 혈연으로 인해 예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서 예수의 어머니가 되었고 예수와 가족을 이루었다는 바로 이 점이 마르코 복음사가가 마리아를 그려봤던 관점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료 곧 "예수의 형제들"이 세 번이나(3,31-33) 거듭 언급된다. 하지만, 마리아가 낳은 예수의 형제들을 말하는지, 아니면 촌수가 있는 예수의 형제들을 말하는지가 분명치 않다. 6장 3절에 예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다시 언급되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 이 문제를 함께 다루기로 하겠다.

2. 마리아의 아들, 예수의 형제들과 누이들(6,3) 차례로

"마리아의 아들"이란 칭호는 신약성서에서 꼭 한 번 나온다. 유다인들의 풍습에 따르면, 예수는 오히려 "요셉의 아들"이라고 불렸어야 한다. 루가 3장 23절, 4장 22절과 요한 1장 45절, 6장 42절에서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께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소개되었다는 점이다. 왜 예수는 아버지 요셉을 통해 소개되지 않고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소개되었을까? 이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예수는 "한 여성에서 태어난 자"로서(갈라4,4) "목수"(마르6,3)일을 하던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예수가 메시아일 수 없다는 뜻을 지닌 표현이며 예수를 비꼬는 칭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의 동정잉태를 암시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나 루가 복음사가들처럼 예수의 동정잉태를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서에는 그런 가르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요셉을 언급하지 않고 어머니 마리아를 언급하여 암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셋째, 예수가 사생아임을 함축적으로 암시한 것이다. 사생아는 보통 어머니의 이름으로 아들을 명명하기 때문이다. 넷째,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죽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부의 아들은 어머니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상례다(1열왕17,17). 필자의 생각으로는 네 번째 가설이 그래도 납득할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마리아의 아들"이란 칭호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나 이 칭호와 함께 마리아에 관해 지나친 설명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 마리아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표현은 "예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다. 예수의 네 형제들의 이름은 야고보, 요셉, 유다 그리고 시몬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예수의 누이들의 이름은 소개되지 않는다. 여기서 언급되는 "예수의 형제들과 누이들"은 마리아가 낳은 예수의 친형제자매들을 뜻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예수의 친척들을 뜻하는지가 우리의 관심사가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리아의 '평생동정'에 관한 문제제기의 자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좀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든다면, 로마 9장 3절에서 신앙으로 맺어진 형제들, 마르코 3장 34-35절에서는 예수를 중심으로 맺어진 이웃사람을, 마르코 6장 17-18 절에서는 이복형제(필립보는 사실상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동생)을 뜻한다. 구약성서 희랍어 번역본 창세기 29장 12절에서는 '형제'나 '친척'을 뜻하는 넓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로 옮겨졌다. 다만, 분명한 것은 텍스트 자체만으로는 어떻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만일 마리아의 "평생동정"에 관한 문제를 전혀 고려치 않는다면, 여기서 언급되는 "예수의 형제자매들"은 마리아가 낳은 친자식들을 가르킨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예수의 형제자매들"이란 표현은 원래 아라메아어를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에 아라메아어를 사용한 샘족 계통의 풍습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예수의 친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예수의 同宗 형제자매까지도 가리키는 광범위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달리 말한다면, 예수가 마리아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의 형제자매들"이란 표현에서 반드시 마리아가 낳은 자식들이라는 주장을 펼 수 없다는 뜻이다. 둘째로 어느 전승자나 마르코 복음사가는 우리의 관심거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들 자신들도 자세히 모르고 들은 내용을 그저 옮겨놓았을 뿐이다. 셋째로 마리아가 예수 이외에 또 다른 자식들을 낳았는지의 여부에 대해 역사적으로는 증명해 낼 수 없다. 넷째로 마르코 복음사가의 "예수의 형제자매들"이란 표현이 곧 마리아가 친히 여러 자식들을 낳았다는 신약성서상의 유일한 증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리아의 "평생동정"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참고자료는 될 수 있다.

3.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15,40.47;16,1) 차례로

야고보와 요셉은 6장 3절에서 예수의 형제들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15장 40절에서의 작은 야고보는 곧 또 다른 야고보를 뜻하고 있을까? 작은 야고보는 신장이 작았거나 나이가 어린 탓으로 "작은"이란 별명이 붙여진 것 같다. 그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1,19)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사도1,13-14)와는 다른 사람이다. 마르코 15장 40절의 병행구절인 마태오 27장 56절에서 마르코 16장 1절에서는 단순히 야고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6장 3절에서 언급되는 야고보와 15장 40절에서 언급도는 야고는 동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갈라1,19). 만일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곧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일한 인물이라면 예수의 형제들(6,3), 특히 야고보와 요셉은 마리아의 아들임에 확실하다. 만일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면 작은 야고보와 요셉은 예수의 친형제들이 아닐 것이다. 즉 마리아의 친아드들이 아닐 것이다. 또는 6장 3절에서 예수의 친형제들이라고 소개되는 야고보와 요셉은 15장 40절에서 언급되는 작은 야고보와 요셉과는 서로들 다른 인물들일 것이다.

이 점을 우리는 또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3,31)를 여기서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라고 칭했을까? 어느 전승자나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를 동일한 인물로는 보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 관계를 몰랐을까?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모습과 그 주위 광경들을 보고서 고백했던 백인대장의 "이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15,39)라는 말에 역점을 두기 위해서, 즉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일부러 예수의 어머니 대신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칭했을까? 예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었던 여인들의 명단은 각 복음사가마다 각기 달리 기록하고 있다(마르15,40; 마태27,56;루가23,49;요한19,25) 이는 곧 전숭과 편집과정에서 오는 결과라 하겠다. 예수의 십자가 밑에 서 있던 여인들 중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함께 있었다고 요한 복음사가만이 분명히 명시해 준다(19,25). 이렇게 볼 때,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리아에 관해 별로 관심이 없었는 듯하다. 예수사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하는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신 내용 가운데 마리아는 직접 등장하지 않고, 단지 간접적으로 그것도 아주 모호하게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와 마리아의 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는 곧 다음과 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복음서가 형성되었던 초대공동체와 그 전승에서는 마리아가 특별히 언급되거나 묘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또한 마리아에 대해 그 이상 더 자세히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III. 마태오 복음 차례로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사가와는 달리 자기 복음서 1장과 2장 전부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탄생 그리고 유아기에 관한 이야기로 꾸미고 있다. 이 이야기 가운데는 마리아가 아주 돋보이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역사성이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곧 마리아와 관련이 깊은 실증적 자료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마태오 복음사가의 신학적 차원에서 마리아는 이해되어야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타난 여인들과 마리아(1,1-17) 차례로

문체상으로 볼 때 "'갑'을 '을'을 낳았다" 또는 "'갑'은 '병'에게서 '을'을 낳았다"라는 표현이 마리아와 예수에 와서는 "'을'은 '병'에게서 태어났다"라고 갑자기 바뀌게 된다. 즉 "예수는 마리아에게서 나셨다"(1,16)라고 표현함으로써 예수와 마리아의 관계를 우선 돋보이게 한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설화(1,18-25)로 이어진다. 그리고 왜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라는 표현이 쓰여져 있지 않는가에 대한 해답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설화 안에서 밝혀지고 있다고 본다.

족보에 여자들의 이름이 기재되는 것은 유다인들의 풍습에 낯선 일이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네 명의 여인들(다말, 라합, 롯,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과 함께 마리아가 언급된다. 구약성서에서,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잠자리를 함께 해 임신했던 여인(창세38,24), 라합은 창녀(요수 2,1), 롯은 보아주를 유인한 여인(룻기 3장), 그리고 우리야의부인 바쎄바는 다윗과 간음한 여인(2사무11장)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네 명의 여인들의 공통점은 첫째로 비합법적 인 결혼(남녀의 결합)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상당히 적극적인 여성들로서 활달한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여성들의 활동을 역이용하셔서 당신의약속과 구원계획을 계속 이끌어가셨다. 즉 다말은 유다와 결합하여 메시아적 혈맥을 이끌어준 여인, 라합은 하느님의 백성을 약속된 이스라엘 땅으로 안내해 준 용기있는 여인, 롯은 보아즈를 유인하여 다윗왕의 선조가 되도록 한 여인이고, 우리야의 부인 바쎄바는 다윗 왕위를 계승할 솔로몬을 낳은 여인이었다. 이들은 곧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에 힘입어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참여한 여인들이다. 마리아도 이런 맥락 속에서는 그들과 같은 부류에 속할 수 있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간택된 여인으로서 하느님의 메시아적 구원계획을 구체화시킨 여인이다(1,18-25). 그렇기 때문에 1장 16절에서 마리아와 예수의 관계가 돋보이도록 명시되어 있다고 본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불린 예수가 ぜ甄?"

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마리아(1,18-25) 차례로

1장 18절에서는 1장 16절의 내용이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마리아와 요셉은 결혼을 했으나 아직 같이 살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성령으로"인한 잉태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셈족 계통의 혼인은 2단계를 걸쳐서 행해지는 것이 상례였다. 제1단계는 배우자들간의 결혼동의가 증인앞에서 행해진다. 이때 남녀의 성적 결합은 행해지지 않는다. 약혼자끼리는 서로 떨어져 대략 1년간 정도 각자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제2단계는 신랑이 신부를 맞아들이는 예식이다. 이때부터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결혼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직 2단계 혼인예식을 거행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마리아의 임신은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하나의 간음죄로서 법적인 고발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돌팔매질을 당해도 마땅한(신명 22,13-24 참조) 죄목이며 수치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모세법대로 마땅한(신명 22,13-24 참조) 죄목이며 수치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모세법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의인'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한다(1,19). 이런 요셉에게 천사의 중개가 이루어진다.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요셉은 임신함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1,24) 태어날 아기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을 준다(1,21.25). 이는 곧 요셉이 아기 예수를 마리아와 함께 자기 혈통 다윗가문으로 맞아들이는 행위다. 이리하여 예수는 다윗 후손으로 불리게 된다(1,1).

하느님께서는 아주 놀랍고 기이한 방법으로 약혼 중에 있는 젊은 처녀 마리아로 하여금 당신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몸소 맞이하도록 하셨다. 바로 여기에 마리아의 위치가 돋보여지는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경륜에 초대되었고 메시아 오심에 적극 참여한 여인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하느님으로부터 간택된 여인 마리아를 예언자 이사야가 이미 언급한(7,14) "동정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1,22-23). 그러나 이사야 7장 14절의 히브리 텍스트에서 나오는 단어 '한 젊은 처녀' 또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 여인'(동정녀) 즉 '결혼 적령기가 다 된 처녀'를 뜻한다. 히브리 번역본인 희랍어 텍스트에서 나오는 단어도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볼 때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동정녀'는 미구에 남녀 성적결합을 갖을 정결한 여인을 뜻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예언자 이사야가 과연 대략 7백년 후에 있을 소위 동정녀 마리아를 두고 말했는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어떤 유다인도 메시아의 "동정잉태"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이사야 7장 14절의 내용을 근거로하여 "동정잉태" 에 관한 생각을 인출해 냈다고 볼 수 없다. 예수의 동정잉태에 관한 생각은 초대 그리스도교인들간에 이미 두루 알려진 것으로 보며, 마태오 복음사가가 다만 이사야 예언서 7장 14절의 내용을 마리아에게 적용시켜 그 의미를 부각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라틴어 번역본의 텍스트에서는 이사야 7장 14절을 마리아와 직결시켜 '동정녀'로 번역되었음을 참고로 부언해 둔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서 마리아의 동정이 연유되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명확치가 않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의 동정잉태에 관한 전승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설화에 삽입했으리라고 본다. 복음서 연구를 통해서 마리아의 동정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을 입증할 방도는 없다. 이는 마리아의 동정을 믿고 받아들이는 대다수의 크리스찬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전승돼오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라는 신앙조문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이지, 마리아의 동정에 대한 신앙고백은 아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설화에 따르면,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잉태할 때 동정녀였고(1,18-22), 또한 예수를 낳을 때까지도 계속 동정녀였다(1,25). 그러나 예수를 낳은 후 마리아의 동정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상 더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1장 25절의 표현 중 '-때까지'는 재고의 가치가 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동침하지 않았다는 이 표현은 우리말 어감상으로는 아들을 낳은 후에는 동침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셈족 계통과 희랍어 계통의 어감상으로는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계속적인 동작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문맥에서 예수의 동정잉태에만 관심을 쏟고 강조한 것 같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참아들"임을 마리아의 동정성과 관련지어 이해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동정성은 예수께서 곧 인간적 아버지를 갖지 않았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비록 마리아의 태중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가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이긴 하지만, 그 사건이 이루어진 방법은 인간의 역사와 한계를 초월한 하느님의 주도관에 속한다. 이 방법을 마태오 복음사가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고 표현한다. 이점에 대해서는 루가 복음사가가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루가 복음서편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3. 예수의 참된 가족(12,46-50) 차례로

이미 마르코 복음서편에서 이 문제에 대해 살펴봤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르코 3장 31-35절의 기록 내용을 그대로 전수했다. 내용상으로 볼 때 새로운 점이나 서로 다른 점은 없다. 다만 주시해 볼 만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의 "주위에 둘러 앉아 있는 이들"(마르3,34)이란 표현을 마태오 복음사가는 "제자들"(12,49)이라고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혈연으로 맺어진 예수의 가족과 제자 신분을 대조시켰다. 둘째,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자"(마르3,35)란 표현 대신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12,50)라고 하였다. 즉 예수와 성부의 관계가 명시되면서 동시에 예수의 참된 가족(제자들)의 신원이 시사된다. 셋째, "예수가 정신나갔다" 고 여기던 예수의 친척에 관한 언급(마르3,21)이 마태오 복음서에는 없다. 아마도 마태오 복음사가의 신학적 논리에 걸맞지 않기 때문에 편집과정에서 삭제되었으리라 여긴다. 달리 말한다면 예수의 "친척"(마르3,21)이라고 표현되는 무리들 가운데 편집자는 마리아를 봤을 것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자기가 낳은 예수를 마리아 자신이 "정신나간 자"로 취급할 수는 없다고 편집자 나름대로 생각했었기 때문에 삭제했으리라 본다. 이는 또한 마태오 복음사가의 '마리아 신학'성립과정의 한 단면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4. 예수의 부모와 형제 누이들(13,55-56) 차례로

이 구절은 우리가 앞장에서 이미 살펴봤던 마르코 6장 3절의 병행구절이다. 마르코 복음사가와는 다른 점이나 새로운 점이 없고, 다만 예수의 아버지가 부언(루가4,22;요한6,42 참조)된다. 이는 아마 예수가 요셉의 아들로서 다윗 후손임을 재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설화에서 보았듯이 예수는 요셉에 의해 다윗 후손에 입적되었다.

IV. 루가 복음 차례로

마리아에 관한 언급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루가 복음서에는 비교적 많이 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서처럼 1장과 2장에 예수탄생에 얽힌 설화와 예수의 유아기가 소개된다. 마르코복음서의 병행구절 8장 19,21절 이외에 11장 27-28절은 마리아에 관한 루가 복음사가의 자료라 할 수 있다. 사도행전 1장 14절도 루가 복음사가만이 전하는 마리아에 관한 자료라고 하겠다.

1. 예수 탄생의 예고(1,26-38) 차례로

루가 복음사가는 "엘리사벳이 임신 후 6개월이 되었을 때"(1,26.36)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기 예수를 잉태하리라는 전갈을 받았다고 상당히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복음사가 자신이 복음서 서문 1장 2절에서 밝힌 바에 상응시키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기교라고 여긴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반문을 던진 마리아의 말(1,34)은 자연적인 남녀 성적 결합에 관한 것이다. 마리아의 이 말은 천사의 설명(1,35-37)을 유도한다. 만일 1장 34-37절의 내용이 예수 탄생의 예고에서 없었더라면, 예수의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의 성적 결합을 전제로 하게 된다. 만일 마리아가 요셉과의 성적 결합으로 예수를 낳았다고 가정한다면, 예수탄생에 관한 사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즉 1장 34-37절의 내용은 예수 탄생의 예고에서 그 핵심을 이룬다. 달리 말한다면, 루가 복음사가는 예수의 동정잉태를 선포할 의도가 있었다. 요한 세자 출생의 예고(1,5-25)와 예수 탄생의 예고(1,26-38)를 비교 연구해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석녀였고 고령의 엘리사벳에게도 하느님의 관여로 인해 임신이 가능했던 것처럼 동정녀 몸인 마리아에게도 역시 가능했다는 것이다.

"성령이 마리아에게 내려와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줄 것이다"(1,35)라는 표현에서 루가 복음사가는 하느님이나 성령을 결코 마리아의 이성적 상대로 보지 않는다. 성령과 마리아의 관계는 다른 차원에서, 즉 하느님의 차원과 피조물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성령은 새 창조를 이끌어내신 하느님(창세1,2)이시고 "죽은 뼈들"(예레37,5-6.9)에게 새생명을 불어 넣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창조적 권능에 의해 동정녀 몸에서도 아기가 태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 루가 복음사가의 견해다(1,37). 성령이 마리아를 감쌀 때, 즉 성령이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활동하실 때, 그녀는 마치 피조물이 창조주께 하듯이 전적으로 그분의 뜻에 동의하며, 그분의 처사에 내맡김으로써(1,38)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역사안에 들어오시는 구체적인 장소(갈라4,4참조)로 드러난다.

동정잉태는 따라서 구원사업에서 하느님의 주도권을 말해줄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로 깊숙이 파고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의 태중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진 방법은 배우자간의 성행위가 아닌 "동정"이라는 것이다. 이 점이 곧 역사와 관련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시사해 준다. 이는 또한 부활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런 새 삶을 시작하듯이, 동정잉태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는 신비다(필립 2,6-11참조).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마리아의 동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소극적인 면에서 "동정"을 생각할 때 동정은 성행위를 자제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위해 창조되었다(창세2,20-24). 동정이 만일 이런 일치를 거부했을 때, 그 동정은 비자연적이다. 적극적인 면에서 "동정"을 생각할 때, 동정은 사랑하는 자에게 전자아를 주는 행위이며, 그 행위의 인격적 성실성이다.

동정을 지키는 자는 자기 자신을 보존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자아를 줄 수 있다. 수도자의 동정은 하느님께 드리는 전자아의 선물이고, 그 표시는 어떤 사람과도 성적 친밀함을 거부하는 행위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면서 하느님께 전자아를 위탁했고 자신을 선물로 드꼭막館?1,38) 마리아의 동정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즉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의 몸에서 육신을 취했고, 마리아는 그의 어머니가 되었다. 따라서 마리아의 동정은 모성으로 꽃피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마리아의 동정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조건없이 받아들여 마음속에 간직玖庸?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자"는 예수의 참된 가족의 일원(8,21), 즉 예수의 제자라고 한다면, 마리아는 루가 복음사가가 보는 예수의 첫 제자이다. 마리아의 이런 모습은 곧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마리아가 받았던 "넘치는 은총"(1,28)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데 있었다.

2. 마리아와 엘리사벳 차례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줄 아는 마리아는 자기 친척 엘리사벳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임신한 지 6개월이 되었다는 천사의 말(1,36)을 듣고 하나의 믿는 행위로써 엘리사벳을 방문한다. 이때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님의 어머니"(1,43)라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참으로 복되다고 찬양한다(1,45) 즉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였음을 증언해 준다. 따라서 마리아의 축복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름으로써 곧 태어날 아기 예수와의 혈연관계를 맺은 대에 있다고 보겠다. 엘리사벳의 찬양노래에 이어 "마리아의 찬양노래"(1,46-55)를 루가 복음사가는 소개한다. "마리아의 찬양노래" 속에는 교만한 자, 권력을 가진 자, 부유한 자의 운명과 비천한 자,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 배고픈 자의 운명이 서로 대조를 이룬다. 이는 루가 복음서 전반에 결처 나타나는 내용들이다.(6,20-26;7,11-17;36-50;10,29-37;12,16-21;14,7-11;16,19-31;17,11-19). 이 마니피캇을 마리아의 입에 담음으로써 루가 복음사가는 자기 복음서 전반에 흐르는 내용을 고취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마니피캇 노래를 부른 마리아는 루가 복음사가에 있어서 예수의 참된 가족의 일원(8,21)이요 첫 크리스찬으로 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3. 마리아와 베들레헴에서 예수의 탄생(2,1-20) 차례로

2장 4-5절은 1장 27절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양 기록되어 있다. 마리아는 요셉과 이미 약혼했고(1,27;2,5), 요셉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이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2,5). 마치 결혼의 두 번째 단계인 성적 결합이 이루어진 것처럼 쓰여 잇다. 그러면서도 루가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요셉의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약혼녀로서 소개한다. 마리아의 동정성을 계속 말하고자 하는 루가 복음사가의 의도가 반영된 까닭일 것이다. 루가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가리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마음속에 새겨 간직한 여인"(2,19.51)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여인으로서 마리아는 여기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예수의 참된 가족일원, 즉 예수의 어머니로 묘사된다(8,21). 마리아는 한마디로 자기가 들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구체화시킨 삶을 살던 여인이다. 이런 마리아의 모습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꾸준히 열매를 맺는"(8,15) 신앙인의 모습이다(1,38,45 참조). 마리아의 이런 신앙행위가 곧 예수 잉태를 가능케 했다. 충만한 믿음을 가진 마리아를 향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Maria credendo concepit sine viro"(마리아는 믿음으로써 남자없이 잉태했다).

4. 예수의 부모(2,22-52) 차례로

루가 복음사가가 예수의 부모에 대해 언급한 점만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 예수의 부모는 봉헌과 정결례를 지키는, 즉 법대로 성실히 사는 자들로 나타나 있다(2,22-24). 그들은 또한 매년 빠스카 축제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경건하고 신심 깊은 자들이었다(2,41).

둘째, 시메온의 칼날같은 예언(2,35)은 마리아를 슬프게 했다. 마리아의 심장을 꿰뚫은 칼은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신분에서부터 멀리해야 하는 그 어려운 과정을 칭한다(마태10,34-39;루가 12,51-53;14,26-27참조). 마리아는 이 예언을 실제로 체험했다(2,48-49).

셋째, 예수의 부모는 예수의 언행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2,50). 그러나 마리아는 알아듣지 못한 것까지도 마음속에 새겨 간직하였다(2,51).

5. 예수 공생활에 있어서 마리아 차례로

루가 복음서에는 예수 공생활과 수난사(3-24장)에서 마리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으로서는 두 군데가 있다(8,19-21;11,27-28). 8장 19,21절은 우리가 앞서 다루었던 마르코 3장 20-21.31-35절과 마태오 12장 46-50절의 병행구절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좀 색다른 점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 마태오 복음사가와 마르코 복음사가는 혈연으로 맺어진 예수의 친척(집밖에 서서)과 제자들로 구성된 예수의 참된 가족(집 안【?을 서로 대조시키는데, 루가 복음사가는 그렇지 않다. 둘째, 예수께서 혈연으로 맺어진 당신의 가족을 향해 던진 반문인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는 구절은 루가 복음서에는 없다. 셋째, 루가 복음서에는 예수의 친척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다. 예수는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밖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고서 그들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린다. "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듣고 행하는 자들" 은 계속해서 듣고 행하는 자들 제자 신분을 뜻한다. 달리 말한다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한마디로 제자 신분이라는 것이다. 넷째, 마르코 복음에서와는 달리 예수와 예수의 친척간에 상당히 원만한 관계로 나타나 있다. 루가에서는 마르코 3장 21절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11장 27-28절은 루가만이 전하는 내용이다. 어떤 여자는 예수와 같은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복되다고 찬양한다. 엘리사벳은 아기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축복받은 여인이라고 찬양했고(1,42), 주님의 말씀을 꼭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마리아는 더더욱 복되다(1,45)고 말했다. 예수의 대답(11,28)도 역시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서 실천하는데 있다고 하신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찬양받을 만하다. 그것은 그저 단순히 구세주를 낳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으며, 그 말을 마음속 깊숙이 새겨 순종했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6.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서의 마리아(사도1,14) 차례로

마리아는 예수승천 후와 성신강림 사이에 사도들 가운데 항시 머물렀다고 한다. 복음서에 보면, 마리아는 예수 공생활 동안 예수의 제자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즉 마리아는 예수의 사도들이나 제자들 틈에 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루가는 다른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마리아를 예수의 잉태 순간부터 "제자 신분"으로 보고 있다. 8장 19-21절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참된 가족의 일원, 즉 제자 신분으로 그려진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마리아와 당신이 총애하던 제자 사이에 하나의 가족관계를 맺어준다(요한19,25-27). 이렇게 볼 때, 마리아는 초대교회의 공동체에 소속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행전 1장 14절이 비록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지만, 마리아가 초대교회 공동체의 일원이었음을 증언해 주는 유일한 성서적 자료라고 하겠다.

V. 맺는말 차례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공관복음서의 예수탄생에 얽힌 설화와 유아기(마태오와 루가)를 제외한다면 거의 언급되지 않는 편이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의 동정잉태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고 마리아에 관해서는 상당히 소극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에 반해서 루가 복음서에는 예수의 동정잉태와 관련하여 마리아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각색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예수의 동정잉태가 언급되기는 하지만 마리아에 관한 언급은 거의 마르코 복음서를 따른다.

예수탄생에 얽힌 설화는 마리아 자신을 통해서 전달된 것으로 보기엔 무리가 크다고 생각된다. 특히 루가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탄생의 설화가운데 나오는 마리아의 모습은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하느님께 전인적으로 참신앙인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루가 복음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예수의 제자 신분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마리아가 찬양노래를 부른 "마니피캇"은 하나의 신앙고백이요, 동시에 루가 복음사가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선포다. 루가는 자기 복음서에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말씀에 경청하고 그 말씀을 마음속 깊숙이 새겨 간직하는 여인으로 나타내고 있다. 마리아의 이런 모습은 곧 예수잉태가 순간까지 거슬러가고 예수탄생의 설화에서는 더더욱 돋보인다. 또는 루가는 자기가 받아들인 "동정 잉태"에 관한 전통에 영향을 받아 마리아를 더욱 각색해 냈다고 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만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해 언급한다. 마태오에 따르면, 마리아가 낳은 아기 예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다윗 후손 요셉이 마리아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이고, 그녀가 낳은 아기에게 "예수"란 이름으로 다윗 가문에 입적함으로써 다윗 가문과 관련된 구약의 메시아적 희망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렇게 볼 때, 마리아보다는 요셉이 더 부각된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기가 전수한 예수의 동정잉태와 관련된 마리아의 동정성에 역점을 둔다. 즉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하고(1,23),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沮測?요셉이 마리아를 "알지 못했다"고 부언한다(1,25). 루가 복음사가 역시 "동정잉태"를 전수하나 마태오 복음사가에 비해서 마리아의 동정성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탄생의 설화는 전통적인 그리스도론(로마1,3-4참조)의 하나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예수 부활, 현성용 그리고 세례라는 역사적 사건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예수의 신원과 정체가 밝혀지듯이, "동정잉태"로 태어난 예수는 곧 하느님의 아들임을 탄생설화에서는 말해준다고 하겠다. 그러면, 동정잉태에 관한 생각은 과연 어디서 연유되어 나왔을까? 이에 대한 가설은 가지각색이고, 납득이 갈 만한 학설은 아직까지 없는 셈이나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직 결혼의 제2단계 절차를 행하지도 않았는데, 아기 예수는 태어났을 것이다(마태1,18참조). 이 아기 예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크리스찬들을 미워하거나 적대시하는 자들의 눈에는 "사생아"로 여겨졌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이나 크리스찬들의 눈에는 하나의 기적적인 탄생(창조주 하느님의 개입으로 인항 잉태 즉 동정잉태)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따라서 동정잉태는 초대교회에 두루 알려진 사실이고, 이 전통을 복음사가들(마태오와 루가)이 복음서에 삽입함으로써 전승되었으리라 여긴다. 그러나 동정잉태의 역사성은 역사비판적 주석방법으로는 증명될 수가 없다. 마리아의 평생동정에 관해서는 신약성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예수의 형제들과 누이들에 관한 언급은 오히려 마리아의 평생동정에 대해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고 하겠다.

마르코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와 예수의 친척들은 서로 원만하지 못한 사이였다. 예수와 마리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함축적으로 생각해 볼 수는 있다고 여긴다. 예수의 참된 가족, 즉 제자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예수의 친척들보다는 예수에게 더 가깝다. 달리 말한다면,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고 해서, 즉 혈연관계 때문에 마리아가 예수와 더 가깝고 예수의 참된 가족의 일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마르코 복음사가의 견해다. 마태오와 루가 복음사가는 마르코에 비해서 예수의 참된 가족(예수의 제자들 내지는 예수의 종말론적인 가족)과 혈연으로 맺어진 예수의 가족을 두드러지게 분리시켜 놓지는 않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채우거나(마태오 복음사가의 표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루가 복음사가의 표현)는 누구나 다 예수의 참된 가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성실히 따랐기 때문에 예수의 종말론적 가족에도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루가 복음사가는 이 점을 더 발전시켜 나간다. 마리아는 순종할 줄 아는 "주의 종"이기 때문에(1,38) 잉태 때부터 이미 그녀는 예수의 참된 가족의 일원이었다. 예수와의 혈연관계 때문에 마리아는 진복자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했기 때문이다(11,27-28).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꾸준히 실천해 나가는 자들이었다(8,21). 이런 맥락 속에서 루가가 보는 마리아의 모습이 더욱 부각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상당히 소극적으로 그려진 마리아는 루가에 와서는 적극적으로 소개되었다고 하겠다. 마태오는 그 중간 노선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마리아 신학의 성립 및 그 발전과정을 다소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이영헌(신부)
사목 105호, 1986년 5월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