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대학교 임병헌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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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우리가 신앙하는 그리스도는 원래 희랍어로 χριστοs 로 이는 ‘도유된 자, 기름을 발리운 자’라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특별히 ‘메시아’ 즉 ‘구세주, 구원자’를 지칭한다.
첫 세대부터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신앙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분을 그리스도로 선포하기 시작했다. 초대 교회 복음선교의 핵심은 종말론적 구원과 그 실현이 예수라고 하는 인물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을 상기시켜준다. 더 나아가서 약속으로 시작된 역사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확실케 해준다. 따라서 우리들이 현재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실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자비의 하느님께 대한 고백이다. 그리고 역사를 인류 구원의 장소, 즉 구원경륜의 장소로 끌어 올리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수가 나의 구원자이며,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나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 시대에 있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역시 질문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제 1 장 현대 그리스도론의 동향
그리스도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이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에 관한 모든 것을 재검토하고 비판해야 하며, 모든 것을 종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그리스도론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 교회 밖의 사람들을 포괄하는 그리스도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도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의 힘이 펼쳐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리하여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풍요로와 져야 할 것이며, 이럴 때 그리스도론은 교회론의 올바른 방향을 정립가능케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에 관한 문학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성서와 함께 교회 전승을 통해서만 그 올바른 추구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성서와 교회 전통을 통하는 것은 일단 훌륭하지만 그것들이 Formula 즉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하기에 그것을 진리 자체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전통을 물려주되 생동력있게 전해주어야 한다.
신학은 시대의 필요에 대응해야 하며 각 시대의 질문에 맞서야 한다. 따라서 성서와 전통의 현실화가 필요한 것이다.( Traditio의 realizatio ) 이는 과거의 신앙고백과 가르침이 오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찾아야 하는 것이다. 즉 예수가 왜 우리의 그리스도이며 구원자인지 밝혀야 하는 것이다.
1. 현대 그리스도론의 위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제 중 하나는 교회의 쇄신이었다. 이와함께 교회의 본질, 일치 문제, 구조적 문제 등에 대한 질문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교회론에 대한 문제제기로 해결되지 않고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아야만 교회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즉 근원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이럴 때 올바른 교회의 쇄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항상 日常化(Aggiornamento)작업을 추진하여야 하나 여기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는 자기 정체를 명백히 하여 안주하려 할 때에는 자기의 소명이나 중요성을 상실할 수 있다. 따라서 몰트만이 이야기하듯이 이론과 실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필요한 것이다. 즉 십자가의 신학이 문제해결의 열쇠이다.
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는 그 근원의 존재의미를 찾아야 한다. 교회 그 근거와 의미는 관념일 수 없고 신학의 나열도, 신앙의 고백도 교의의 결집도 아니다. 그 핵심은 예수의 인격(person)과 행적(opera)이다.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체험된 예수가 타인에게 공감될 수 있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따라서 각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신앙고백으로써 전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함축하고 있는 약식 신앙 고백문이다. 그리스도론이라는 것은 이 함축적인 약식 고백문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리스도교회의 존폐가 달려 있는 분, 즉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로 인정되고 고백되는 예수께 대한 연구이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의미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특정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그리스도교적임이 무엇인지 교정해나가는 것이며, 나아가 비그리스도교는 무엇인지 구별하는 것이다. 즉 범 우주론적 그리스도론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현대의 믿음과 삶의 이분화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 둘 사이에 균열이 있다면 거기에는 소외가 생기며 따라서 종합을 꾀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날의 허무주의가 대두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의 극복을 위하여 그리스도론의 재정립이 필요한 것이다.
특별히 라틴 아메리카와 같은 억압의 상황에서 예수는 과연 구원자일 수 있는가? 나아가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의 합일에 이를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강생의 현실적 의미를 깨달아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강생의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되물어야 한다. 또한 인간적 차원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의 화해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강생은 억압에서의 해방과 동시에 하느님과 인간과의 화해를 의미한다. 그런데 전통적으로는 화해라는 측면만 지나치게 부각하여 왔다. 우리는 해방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해방의 주체가 하느님임을 고백하며 인간은 2차적이라고 하는데 이는 지나친 분석화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神人(Deus Homo)으로서 그 사이의 구별은 무의미한 것이다. 교회의 정체성도 중요하고 교회의 사명도 중요하며 또 존재와 그 의미가 완전히 일치되는 근거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끊임없는 숙고와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론은 사회와 교회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데 그 핵심이 될 것이다.
2.현대 그리스도론의 동향 (그리스도와 구원 131-41참조)
전통적 그리스도론 : 존재론적 본질 규정이 그 목표. 영원으로부터 선재하셨던 성삼위의 제2위격이신 성자께서 사람이 되신 육화, 인간화의 신비에 주로 역점을 두는 사변신학이었다. = 하강식 그리스도론
현대적 그리스도론 : 이는 역사의 예수에서부터 신앙의 그리스도를 찾아나서는 상승도식 즉 아래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다. 예수의 역사적 생애에서 출발해서 부활 사건까지 전개한다. 예수라는 인물을 통한 하느님의 계시와 바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서 드러남을 밝히려는 것이다.
가톨릭에서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새로운 동향은 라너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책 17면 이하 참조)
교의 정식은 다음 시대를 위한 새로운 문제제기 : 현대의 그리스도론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 현대 그리스도론의 세가지 측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보편적 실재의 모델 속에서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
1) 우 주 론 적 그 리 스 도 론 (Logos-Christus;이레네오,유스티누스 등)
발설된 말씀, 말씀의 싹이 모두에게 내재하여 있다. 따라서 이교도의 종교나 철학에도 구원의 요소가 내재하여 있는 것이다.
샤르댕 : 우주적 지평 안에서 그리스도론을 전개. 우주는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운동을 통해서 계속 변화하는 약동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진화과정 속에서 인간은 여타의 모든 존재의 정상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자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출현과 함께 진화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진화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육화로 말미암아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화사건은 유일회적인 진화의 정점으로 이 우주 안에 발생한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육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초인류, 초그리스도, 초사랑으로 육박하는 운동을 촉진시킨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진화적 우주의 알파요 오메가로서 이해된다. 즉 우주 진화의 종착점이다.
2) 인 간 학 적 그 리 스 도 론
라너 : 인간을 하느님 지향의 절대 초월자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정신적 구조를 근거로 해서 다른 여타의 피조물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존재이다. 우주의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자신의 유래와 종말을 묻는 존재요, 현재로써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 그리고 만족과 충만을 찾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신 안에서는 자신의 최종적인 대답을 얻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자신의 완전한 행복, 완전한 충족을 그 자체 안에서는 얻을 수도 이룰 수도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리적으로 자신의 실존 전체와 함께 언제나 더 위대한 하느님의 신비를 지향하도록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고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갈 때만 인간은 자신을 능가할 수 있다. 즉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 자아 충족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인간학이고 인간학은 미완성 그리스도론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지향의 절대초월듸 도가 극에 달한 유일한 정점이다.
라너는 이 정식에 기초하여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론을 전개한다. 즉 만일 그리스도론이 인간학의 전무후무한 완성이라면 인간으로서 자기의 삶을 전폭적으로 수락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이미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자렛의 예수를 수락하고 만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론은 인간학의 하나로 타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몰트만은 “진실된 인간에 대한 언어는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아닌가?”라?? 질문하고 있다. 라너는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을 견지하고 있지만 그 외의 신학자들은 그렇지 못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인간 모델의 하나로 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3) 보 편 사 적 인 그 리 스 도 론
판넨베르그 : 예수 부활의 그리스도론. 부활은 그리스도의역사적 유일회성과 모든 시대 모든 이를 위한 보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예수 역시 인간인데, 인간은 누구나 개체로서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존재요 인류라는 하나의 역사적 전체에 편입되어서 연대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전 역사의 집약이며 역사의 종말을 성취한 인물이다.
이상의 유형들의 공통점 : 예수를 보편적 지평선상에서 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육화가 역사 안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단점 : 그리스도론을 하나의 철학이나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리스도 사건의 참신성(novum)을 강조하는 그리스도론 등장. 이는 그리스도를 통한 실재의 변혁이 목표이다.
① 발타사르 : ‘사랑’의 현상을 전개하면서 그리스도 사건의 보편성에이르는 통로를 추구하려고 시도.
② 메츠 : 설화적 그리스도론. 그리스도론을 예수 생애에 대한 신학으로 이해. 그리스도론이란 지상의 예수에 의해 현시된 바를 설화적으로 현대화하는 것으로 이해.
③ 큉 : 예수는 하느님의 위임자, 전권자, 대사, 대리인 등이다. 인간 예수는 우리에게 보여준 진정한 하느님의 계시이다.
그런데 전통적 교리에 대한 재해석은 전통스콜라의 반복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론적인 참된 신앙고백은 역사의 예수에 근거를 둘 때만 참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메츠는 “역사의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의 지상적인 것만을 추구하게됨으로 해서 그 초월적 의미, 부활의 예수 등에 대해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역사적 자료 미약). 따라서 예수와 케리그마, 예수와 역사에 대한 조화있는 연결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역사에 기초한 가운데 케리그마의 예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3. 현대 그리스도론의 과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신앙고백의 형태를 띤 이름이다. 항상은 아니나 원래적으로 볼때 “예수”라고 할때는 언제나 역사의 예수,인간 예수, 지상의 예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등 대체로 이런 측면의 예수성이 강조되고, “ 그리스도”는 신앙의 예수,초월의 예수, 하느님의 아들 예수, 부활의 예수 등을 나타내는데, 이 둘이 어떠한 관련성을 맺는가?
역사적 예수, 그는 실제로 어떻게 살았고,무엇을 이야기 했고,무엇을 가르쳤고,어떻게 실천했었는가 하는 그 예수가 규명되지 않는한 오늘과 같은 거대한 교회조직에서 논의되고 있는 그리스도는 ( 교회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리스도) 어떤 의미에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여야한다. 이런 고민이 우리들 안에 없다면 참된 예수에 대한 체험과, 또 그와의 만남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강의실에서 접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또 성당 전례를 통해 기억된 예수가 같아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실천적 의미로서 성숙한 신앙인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 현대 그리스도론의 과제 3가지 **
(1) 역사적으로 정향된 그리스도론
즉, 역사의 예수를 찾아가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 History 와 Geschichte= kerigma
꠆ꠏ History : 사건, 실재를 중심으로 한 기술의 역사
ꠐ 이 역사가 우리들에게 망각되고 있었기에 이 역사의 예수를 찾아가는
ꠐ 것이 신학계의 새로운 문제제기이다.
ꠌꠏ Geschichte : 설화적 사건 그런데 성서는 그런 사건 기술이 아니다. 이미 그리 스도를 받아들인 신앙고백의 형태를 띠고 있기에 설화적, 이야기적인 것이다. 즉 성서는 Geschichte 이며 History가 아니다.
불트만-- 케리그마의 예수만을 추구하고 나선다.
그러나 결국 케리마의 예수는 신화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신화
적인 요소가 덧붙여 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Geschichte 와 History가
진전되면서 대립 관계에 있다.
신화 일변도일 때는 역사가 배격되고; 역사 현실, 지상의 예수만
을 강조할 때는 부활과 신앙의 측면의 예수가 설자리를 잃게 된다.
예수의 특수한 생애, 즉 이 세상에 살다가 간 예수,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메세지와 모범을 남겨주신 예수가 있다. 그분의 삶은 하나의 유일회적인 사건이다. 나자렛의 예수는 누구였는가,그는 무엇을 원하였는가, 그의 메세지, 그의 행동, 그의 행위 자체는 무엇이었나. 그는 또한 하느님 나라의 임박을 선포했는데 어떻게 그 자신이 그리스도로 선포되고 믿음의 예수로 ( 즉 신앙의 대상으로 ) 다시 승화될 수 있었는가 ?
여기서 우리는 이 그리스도론 뒤에는 전승 (Traditio) 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그리스도론은 원시 그리스도론적 신앙 고백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다루어야 헐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물음들은 역사적인 것에 신학적인 중요성을 함께 연구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역사가 단순한 역사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역사성이 전제가 될때 예수 역사성에 근거해서 예수의 신학적인 의미가 확인된다. 예수의 역사의 역사성에 근거하지 않은 신앙의 예수에 대한 설명은 때때로 관념에 불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선 역사의 예수를 찾아가자는 그리스도론이 촛점이 되고 있다.
(2) 보편적으로 책임있게 답변할 수 있는 그리스도론
현실적인 문제와 그 요청에 응답을 주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즉, 관념론적 그리스도론은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구체적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그리스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기 희망에 대해서 어떤 해명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친구들에게 설득력있게 설명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 주변에 그리스도를 모르는 다른 이들에게 정말 내가 그리스도로 접한 그 예수를 이야기함으로써 나의 말을 들은 친구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을 지녀야 한다. 우리 현실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해 주는 그리스도론을 형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
“ 그리스도론은 설화적이어야 함과 동시에 논증적이어야 한다. 이 둘이 모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예수, 설화의 예수는 논증적인 예수, 역사의 예수가 되어야 한다.”
== 철학과 그리스도론과의 관계 ==철학에서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해 주어야할 그리스도론
우리에게 주어지는 형이상적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된다. 예) 사회학적인 인간 과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데 이런 고민도 함께 해결해야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의 형이상학은 주로 스콜라 철학을 중심으로 해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토마스 계통의 중심으로 형이상학을 대표로 했는데 그 스콜라 철학이 철학의 모두가 아니다. 이 우주 만물과 세례와 인간 본질에 관해서 논했던 다른 철학사조의 그 고민도 함께 생각하면서 그 문제와 대입시키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론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도식적 관점에서만 그리스도를 논했는데 그럴때는 지났다는 것이다. 즉 현대 철학과의 대화를 위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는가. - 이런 문제들이 될 수 있다.
신학의 다양성 이전에 이미 사상의 다양성이 있었다. 그것을 전제로 해야 된다. 즉, 특에 맞춘 교조적 , 교의적 예수를 선포하기 이전에 다양하게 체험된 예수를 이야기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모든 것을 문제 삼는다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와 그리스도에 관한 문제는 모든 것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현실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의 근본적인 것을 가르쳐 준다. 정치, 경제 , 사회 모든 것에 문제삼고 모든 것 안에서 해결을 찾으려는 고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 뿐만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이 종교든 사회든 정치든 그리스도론에서 모든 것을 비판한다. 즉, 신학의 비판적 기능의 원형은 바로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역사에서 최종적인 하나의 해결답으로서 주어진 존재이다. 따라서 예수에 대한 어떤 본질 이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역사적 , 인격적으로 정향된 존재론이 항상 우선하고 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론은 어떤 의미로서는 교회 자체가 준 전승과도 대결해야 한다. 전통적인 존재론적 그리스도론과 기능적인 비존재론적 그리스도론을 대립시키지 말고 조화시키자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그리스도론적으로 규정된 역사적 인격적 존재를 단순히 형성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론과 철학과의 관계 즉, 자연 이성과 은총을 조화시켜 보자는 것이다.
K. Rahner의 그리스도론은 하느님과 세계사이의 문제를 넓게 연관시켜서 고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비판은 신학이 철학으로 축소 지향될 위험이 있다.
바르트 : 하느님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그리스도론 자체 안에서 규명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될 때 신학 전체가 그리스도론으로 협소화 될 수 있다.
비이더 케어 : 그리스도론이라는 것을 단면적 이해보다는 두 개의 중심을 둔 타원형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과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해 만난다는 의미에서의 그리스도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가톨릭 신학의 고전적 유비론에 가장 잘 호응
예) 유비론 - 하느님께는 최상의 표현으로 즉, 인간의 긍정적인 것의 최상으로 하느
님을 표상한다. 또 인간의 부전적 측면의 다시 부정으로써 하느님 이해
에서 하느님 인식을 말한다.
꠆ꠏ 즉, 인간은 선하다.하느님은 최선이시다. - 적극적 방법으로 하느님
ꠐ 인식
ꠐ 인간은 죽는다. 하느님은 영원하다. - 부정적 방식으로 하느님
ꠌꠏ 인간은 악하다. 하느님은 악하지 않다. 인식
결국 그리스도론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실재 이해를 다루어야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교와 문화, 그리스도교와 정치, 그 밖의 모든 것을 함께 논해야 한다. 즉, 세상의 문제를 포용하는 그리스도론이어야 한다.
(3) 구원론적으로 정향된 그리스도론
그리스도론은 구원론이다. 역사적으로 정향된 그리스도론과 보편적으로 책임있게 답변할 수 있는 그리스도론은 다시 한번 예수의 인격과 역사를 보다 승화된 차원에서 종합,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1,2를 분리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예수의 의의는 그분의 인격과 역사에서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고 그것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은 바로 통합을 이룬다.
** 이 통일 내지 일치는 두가지 측면에서 깨질 수 있다.
첫째, 중세의 스콜라 신학 - “하느님의 신성과 인성 =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가르침
이 일치를 예수의 업적.직능들과 분리켜서 설명했다. 따라서 관념적, 추상적, 고립된 신학의 입장을 취했다. 즉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를 주는지 중세신학은 망각하고 소홀했다. 이때문에 현대인들이 그리스도론에 무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 전통 : 삶안에서 체험된 예수 ! 즉 예수의 참된 신성과 마찬가지로 참된 인성을 고백하고 변화한 것은 구속의 현실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현상을 통한 실재 인식하는 철학의 원리와 같이 예수가 행한 업적을 통해서 역사의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론은 구원론이며 해방론이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과거 스콜라 신학에서 설명했던 분리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을 극복할 수 있었고 현대인에게 기쁨을 주는 그리스도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해방과 구속의 의미 추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및 그리스도론적 교의의 구체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론을 구원론으로 축소시키는 위험이 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의 근거는 그리스도를 올바로 이해하자에 있다. 그는 예수의 ‘나를 위하심(Pro me)’을 역설한다. 그리스도론적 고백의 객관적 의미는 역사적 예수를 끝까지 고수하나 멜랑호톤에 와서는 ‘나를 위하심’이라는 원리가 확대해석되면서 ‘그리스도를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그분의 은혜를 인식하는 것이다.’즉 역사에 대한 예수의 인식보다는 그 분이 이룩하신 은혜를 감지하는 것이다라고 이해하고 설명한다. 이러한 가르침을 이어받은 사람이 ‘슬라이어마허 (Schleiermacher)’와 네오프로테스탄티즘. 구원에 대한 현실적 체험이 바로 예수를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게 하는 결론을 이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론적 명제들은 그리스도교적 자의식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적 인간의 원형에 지나지 않는다.
** 존재와 의미 문제**
불트만 : ‘존재와 의미 문제’를 대두시킴. 신앙의 설명은 하느님 Natura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삶의 의미에 관한 언급이다.
kasper의 염려 : 그리스도론이 예수의 삶이 준 의미만으로 축소된다면 인간학의 한 변조에 불과하지 않을까 ? 루터의 ‘Pro me' 나를 위한 예수의 삶과 죽음의 주관적 의미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의를 제기하고 있다.
예수가 우리에게 제시해준 의미는 바로 예수의 역사적 존재에 근거하고 있다. 의미가 존재에 근거하고 있다는 이 사실은 견지하지 않을 때, 포이에르바흐와 같이 “모든 종교적 표상들은 구원과 신화를 바라는 인간의 염원과 아쉬움을 반영한 것이다.” 라고 결론짓게 된다. 따라서 육화 강생도 신이 된 인간의 출현에 지나지 않는다.즉, 신이 된 예수에 대한 고백의 역논증인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인간으로 낮추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으로 높여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 그리스도론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존재와 의미의 균열이라는 근대 특유의 정신사적 운명에 나름대로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 믿음과 내용,믿음과 행위를 대립으로 이해할 때 문제가 발생하기에 상호 통합의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앙 고백이 사물화 된다면 죽은 믿음에 불과하다. 또 그리스도 신앙 고백이 주관적으로만 이해된다면 도피적이며 신앙의 공백화 현상을 가져온다. 따라서 전통적 초자연주의와 근대주의적 내재주의는 서로 보완되어야 한다.
예)
b.c 3000 년 - 중세 15 c. 신관
계몽주의 이 후 신관 갈라진다.
하느님의 신관 내재성
내재된 신관 내재성
내재된 하느님이 초월된 하느님이 강조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내면적으로 들어가게
된다.
↓
이 다음 단계에서 통합
평신도, 여성 중심, 제 3세계가 중심이
되는 세계가 도출되어야 한다.
* 그리스도론이 교회 지배논리의 정당성을 찾는 방법이 되어서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함.
신앙의 내용은 신앙행위로 통해 깨닫게 되고, 즉 믿음은 실천을 통해 확인되고 실천은 신앙에 근거할 때 확인될 수 있다. “ 신앙 내용 = 신앙 행위” 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그리스도론과 기능론적 그리스도론은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상호 수렴적인 그리스도론을 펼쳐야 한다.
제 2 장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질문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늘의 신앙의 출발점: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현상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서구 문명 전체를 지배하고 이념의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교회가 위대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것의 기준은 나자렛의 예수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교회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나자렛의 예수에 관한 연구를 해야 할 필연성을 만난다. 이제까지 교회가 걸어온 길을 역으로 되올라가면서 교회의 원천인 나자렛의 예수를 만난는 것이 역사적 측면에서의 연구이다.
그런데 예수에 관해서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권위있는 교재는 역시 신약성서이다. 신약성서라는 것은 예수의 죽음 이후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사도들과 그리스찬들이 그 죽음을 넘어서서 공동체를 형성했고 예수의 죽음을 재형성하면서 남겨준 메시지이다. 그런데 그 성서를 잉태한 삶의 자리는 바로 교회이다. 제도적이긴 하지만 그 교회에서 성서가 태어났고 성서가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성서가 예수를 인식할 수 있는 기술적인 역사적인 자료이다. 물론 현대적 의미의 역사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성서는 예수의 어떤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성서는 바로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고백이요, 따라서 교회의 성교리를 전해주는 것이다. 즉 성서는 신앙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카스퍼 : 성서연구는 신앙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일부학자들 : 하나의 학문으로서 비신자들도 성서 연구가 가능하다.
진취적인 학자들의 이의를 제기 : 성서에 그리스도의 종말의 핵은 분명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시작된 것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분명 문제가 있다. 따라서 예수가 어떤 소신을 가지고 있는지, 예수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지 예수에 의해서 결과로 나타난 교회의 믿음을 우리가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즉 예수가 가졌던 그 신앙에 대해서, 인간들에 대한 예수의 헌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교회 신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 이런바 제도 교회에 대한 이의를 제기
카스퍼의 설명 ; 개개인의 주체성과 개개인의 삶에 한계가 있는 것과 같이 개개인의 집합인 공동체 역시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이 체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라는 것은 나름대로 어떤 장점도 지니고 있다. 즉 체제는 진실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 진실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꼭 필요 불가결한 진리를 담는 그릇이다. 즉 체제 안에서만 체제를 통해서만 비로서 어떤 메세지나 관습이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교계제도 자체도 체제적인 요소, 가시적인 요소를 지니고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상대적인 안정성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공동체의 가치는 주관적인 자의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체제, 제도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실을 보호해주는 보호막 역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 그리스도인의 종교가 조금 제도성이 약화되면서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교라 부른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회안에 형식을 갖고 구체화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역사적 예수 강생의 재현이다. 한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성 안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제도의 장점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자기 반성과 자기 쇄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멜러의 입장 (Mohler)
첫째는 진리가 좀 상대화 될 수 있다. 한 개인의 존속과 사회적 체제의 존속을 위해 이해관계에 매여 있는 가운데 진리가 그 제도를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한다면 그 제도에 너무 종속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 자체가 결국 상대화될 위험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가 교회에 의해서 전매되었다. 교회만이 그리스도를 독점했기 때문에 예수 대신 교회?? 권위를 행사해 왔다. 따라서 예수보다 교회가 더욱 우세하게 되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 그래서 교회는 스스로 자기 체제옹호, 자기 제도 옹호, 자기 방어적인 자세를 따르기 쉽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은 교회자체의 방어를 위한 어떤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될 수 있다. 이렇게 논의된 그리스도론은 둘다 참된 의미를 상실한다.
신앙 공동체는 독립적인 존재나 자존적인 단위가 결코 아니다. 교회는 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교회 스스로를 넘어서야 된다. 그리고 늘 원천에 비추어서 자기의 모습을 새롭게 여미어야 한다. 따라서 쇄신운동의 핵심은 예수에 대한 철저한 기억에서 시작되어야 된다. 이러한 분명한 기억 속에서 원천에 도달는 것, 이것이 바로 쇄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활력의 힘을 주고 있고 바로 이런 예수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따른 모범적 인물들이 모든 수도자들의 창시자들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결론 :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은 그리스도 신앙이다. 이 그리스도 신앙은 그리스도 신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최종적인 기준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러나 이 둘이 결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즉그리스도와 교회를 함께 다루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교회에 대한 쇄신을 가져오는 것이고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원천적인 기억으로서 돌아가게 한다.
2. 근대적 “예수의 생애 연구”의 정당성과 한계
앞에서 이야기 되었듯이 현대 그리스론에 있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
(1) 루터의 종교 개혁
원천에 대한 기억과 반성의 극치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즉 Fider quit Cristus fecit 그리스도가 행한 바를 우리가 파악해야 된다. 그런데 루터는 “오직 성서”를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 라는 원리로 귀결시킨다.
⇒ 비판적 의미
복음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염원, 성자의 말씀, 하느님의 말씀 자체에 관심을 가졌던 여기에는 아주 큰 변형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루터의 이런 운동과 함께 중세 때 이른바 성서신학이 출현되었다. 성서신학이란 성서를 통해서 예수를 만나는 작업이다. 이 때의 성서신학은 기존 교의 신학에 대한 어떤 비판기능을 지니고 있다. 성서 연구라는 것은 예수를 이해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제까지 모든 신학에 대한 비판적인 기능을 확인하는 것이 성서신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비판의식이 결여된 성서 신학은 존재 가치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를 넘어서는 성서신학의 비판적 기능을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이 때 참된 쇄신이 가능할 것이다.
(2) 역사비판적 사고
성서가 기존 교조신학을 넘어서는 것과 같이 그런 기존 전통을 넘어서자는 욕구가 우리에게 분출된다. 그런데 역사비판적 사고는 우리에게 어떤 경건주의를 가져왔다. 이는 교회생활과 표본적 ,외적 생활형태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성서신학을 기준으로 하여 어떤 실천적인 삶, 개인적인 삶, 인격적인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 경건주의적인 삶의 양식은 계몽주의 사상과 접합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사상으로 형성된다.
결국 예수의 생애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서이다. 하지만 성서 이전에 그 성서를 탄생케한 원천적인 체험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문헌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 슈바이쩌 : “예수 생애 연구” -- 도그마 (교조주의)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역사의 예수를 연구. 역사의 예수가 교회의 신앙이 믿고 가르치는 그리스도와는 다른 분임을 주장 !
* 라이마루스 : 성서의 Prima 즉 첫번째 체제와 두번째 체제를 구별. 즉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이것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메시아 왕국은 현실적이며 정치적인 관점에서 알아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이 라이마르스의 것을 연구하면서 참으로 2-3세기전에 예수의 생애를 보면서 엄청난 변혁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었다. 즉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소재들의 집약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즉 역사의 예수,신앙의 예수, 다음에 미시오(Missio)의 예수와 종말론적인 성격, 또 대림이 늦추어진 그러한 문제라든지 또 정치적 예수의 소재라든지 또 그리스도 이후의 펼쳐진 영성이라든지 이런 모든 전반적인 것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포괄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 렛싱 : 그리스도 자신의 종교와 그리스도교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라이마르스의 이런 주장과 함께 자기 시대의 나름대로의 진보적인 신학들도 불신한 것이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세울러 : 원천적으로 너무 근원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예수에 대해서 어떤 현세적인 이해, 정신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 빠울루스 : 합리적으로,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공통된 의견 = 예수의 본 삶과 그리스도교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 쉬트라우스 : ① 예수에 대해서 초자연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② 둘째는 합리적인 접근 방법도 피상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제 3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신화적인 방법이다. 여기서 역사적인 핵심을 분리하지는 않는다. 신화적이 해석이라고 할지라도 즉 예수의 메시아성, 자기가 메시아라는 어떤 확실성을 지녔다. 이런 것에 의해서 예수의 생애가 그려져야 한다.
⇒ 역사적인 핵심과 그 해석을 구멸하고 있고,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도 구별하고 있고 또 이제 역사적인 그리스도와 이상적인 그리스도를 구별하고 있다.
쉬트라우스의 경고 : 역사적인 그리스도와 이상적인 그리스도가 구명된다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인가? 솔직히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 않느냐?
이것이 새로운 위기,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인 예수와 이상적인 해석 사이에 어떤 신학적인 부담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신학적인 부담은 곧 철학적인 부담인데, 이는 역사적 실재에 관한 것과 현상이란 말로 이야기될 수 있다. 현상이란 것이 이젠 해석이란 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재와 해석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어떤 상태에 대해서 주체, 실제로 인식하는 주체로 동일시한다는 것은 오히려 실재( realitas, factum)로 격하시킨 결과를 가져온 것 밖에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이 실재는 단순히 대상일뿐이고, 또 기술적인 지배적인 것의 대상이될 뿐이고, 학문적으로는 사물세계나 작업세계로 격하될 뿐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 계속해서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이원성, 사고주체와 외연적 객체와의 이원성이라는 논리이다. 이런 이원적인 해석 역시 신학에 부담을 주게 된다. 그래서 신학에서도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구별하고 있다.
예수께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역사비판적인 합리적 방법도 있고, 내면적, 정신적, 영적, 실존적, 인격적 방법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을 함께 포괄하는 통합하는 신앙을 통한 이해를 할 때 예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시대에 쉬트라우스가 제시한 이런 물음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정말 역사의 예수와 해석의 예수, 이상의 예수에 어떤 동일성과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고민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균열이 있다면 그것은 문제이다. 따라서 이것의 어떤 일치, 바로 “역사의 예수가 신앙의 그리스도이다”라는 일치가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론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된다.
위의 문제를 회복시키는 것이 19세기의 그리스도론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것이 다분히 호교론적인 시도라고 말하면서 비판하고 등장한다. 카스퍼는 여기서 傳記 즉 vita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사상이나 신원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도그마의 거부가 아닌 새로운 해석이 펼쳐지게 된다. 역사에 대한 연구는 어떤 의미에서 성인들의 방법이 아닌가? 또 역사 연구를 하는 주체에 대한 전향이 아닌가? 또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 심리학으로 전환하지 않을까하는 염려를 하게된다. 예수의 생활에는 신성이 반영된 것이다. 예수의 인간성은 신적인 것을 표출하는 장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생할에 대한 인식은 예수의 내면성에 관한 질문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기현시에 관한 문제가 끝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특징은 이제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 지속적으로 설명될 때 우리가 이해했던 예수에 대한 내면적인, 영적인, 도덕적인 그리스도론과 함께 예수의 업적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 정치적인 예수, 현상에 영향을 준 예수와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르낙 : 우리 인간 영혼, 내면성을 강조할 때에는 하느님과 영혼에만 너무 국한될 수 있지 않을까 ?
==카스퍼의 평가 : 자유주의파 신학의 시도는 예수의 생애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귀결점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내면성, 또는 우리 내면의 영혼문제로 국한시켰기 때문에 결국 자유주의의 신학이 크게 시작되었지만 결국 실패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 실패에 대한 원인 - 직관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 잘못된 직관 셋
1) 슈바이쩌; 역사의 예수는 신학자들 각 개인의 사상과 관념들의 반영
어쩔수 없이 내가 예수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자기 생각의 반영이 아닐까? 또 자기 체험의 외연적인 표현이 아닐까? 따라서 합리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를 도덕가로보고 이상주의자들은 인도주의의 화신으로 보고, 또 심리주의자들은 화술의 천사로 보고, 또 여러가지 사회주의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개혁가로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슈바이쩌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 즉 예수를 찾다가 우리 손에 잡힌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합리주의자가 그려낸 초벌에다가 자유주의자가 다시 이를 되살려내고 또 근대 사학이 역사에 옷을 입혀서 엉뚱한 예수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그러면 결국 예수는 누구인가? 모른다. 수수께끼다. 다만 그분은 하느님 나라, 새 세상도래를 선포했을 뿐이다. 즉 영영 붙잡히지 않는 예수, 어떤 신비한 예에수로 이해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어떤 자기 주관주의의 객관적인 표상, 잘못된 직관에 근거했기 때문이 아닐까? ==46면
2) 양식사 학파 : 복음서는 역사가 아니고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복음의 예수는 역사의 예수가 아니다.
여기서도 실패의 요인은 직관이다. 그런데 복음의 가치는 초기 공동체의 복음선포라든지 전례, 실천적인 삶, 현존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은 것은 사도들의 신앙일 뿐이다.
“참된 예수는 선포된 그리스도이다. 복음의 예수만이 진실된 예수이다. 따라서 원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자신의 그리스도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켈러.
결국 선포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면 그리스도의 종교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척도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교를 떠나는 것이다. 원천, 역사의 예수를 찾아간다는 것은 그 찾아간다는 미명하에 그리스도를 떠나는 결과가 된다.
3. 해석학적인 관점 ; 역사학적 비판은 원형에 불과하다!
결국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라는 것은 계란과 닭의 관계와 같이 끊임없는 반복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신앙은 무방비의 군대와 같이 누가 공격하면 그냥 무너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거기에 신앙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칼 아담: 과학문명의 발달과 그리스도교는 어떤 불안한 그리스도교, 초라한 그리스도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희망이 있다. 여기에서 간과되고 있는 것은 19세기 말엽의 교회라는 제도적 교회의 위력과 문제점, 야합하는 교회를 빼놓은 것이다. 19세기 말 현대사상이 크게 대두되면서 신앙에 위기가 오게 되고 이에 자기 항변으로서 “교회는 초라하다, 그러나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신앙을 지키는 현주소는 일반 신자들이다. 신학자들이 아닌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1차대전 이후 불트만은 교의적인 그리스도론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게리그마의 그리스도, 복음선포의 그리스도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여기서 가톨릭계 교회론은 자극을 받아 교회쇄신을 모색하게 된다. 그래서 19세기 튀빙겐 학파 등이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이라는 사상 속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밀접한 관계 아래 그리스도론을 재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론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또 후에 본 회퍼는 공동체 안에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했다. 이후 우리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 쇄신 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
신앙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은 불트만이 제기한 그러한 문제를 다시 갖게한다. 즉 역사적인 것에 신학적인 중요성이 접목될 수 있겠는가? 불트만은 신학적인 예수와 게리그마의 예수를 강조했고, 역사의 예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와의 관계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3. 역사적인 것에 대한 신학적인 중요성
역사적인 것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인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케제만: 바로 복음 안에 역사적인 것이 있다. 거기에 바로 예수의 파견소명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단순히 역사적인 것의 신화화가 아니라 신화의 역사화가 요청되는 것이다.
복음의 역사적인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 과제이다. 우리가 이미 보는 복음은 신앙으로 씌여진 것이다. 따라서 이 신앙을 통해서 다시 역사적인 실재를 찾아가야 된다. 따라서 첫째, 모든 신화는 일단 신화라는 것을 배격할 필요가 있다. 즉 엄연히 외적인 사건이고, 또 예수의 생애는 나름대로 어떤 종말론적인 사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순간 순간의 삶이 또 어떤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를 넘어서서 역사적인 실재를 향해서 다가가야 한다. 우리에게서 역사적 우연성이란 것이 하느님의 섭리에서 볼때는 , 그 우연들이 바로 하느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화화에서 어떤 kairos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moment 결단의 시간인 것이다. 선택의 시간, 역사적인 우연이 선택의 시간이란 것이다.
두번째 중요한 점은 그 가현성도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시란 것은 바로 구체적인 삶 안의 인간 예수의 육체 안에, 현실 안에 실현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예수와 현양된 그리스도의 동일성을 강조하고 이해해야 된다.
세번째는 어떤 열광주의와 현세주의적 구원의 이해, 현실론적인 것도 함께 배격해야 한다. 즉 구원은 하느님이 주체이다.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예수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현양된 그리스도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새로운 질문은 다만 그리스도교의 소명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적인 예수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즉 교회가 걸어온 길을 역으로 되돌아가면서 그 역사적인 지상의 예수를 만나자는 것이다.
<케제만>; 해석학과 전통 해석은 원칙적으로 분석해서는 안된다. 전통은 이미 그 시
대의 해석이다. 따라서 이 전통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우리 시대의 해석이다.
따라서 실제와 전통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지 말고 좀 포괄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게시스테(geschichte)와 히스토리(history)를 종합해야 하는 것이다. 게리그마와 역사적 예수의 삶 안의 어떤 불가분의 관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서 부단히 앞으로 진전되는 삶의 양식을 이끌어야 된다.
결국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함께 이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 그 방 법 **
먼저 철학적인 성격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우선 역사의 의미가 분명히 밝혀져야 된다. 예수의 종말론적인 성격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이해,설명될 수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먼저 풀어져야 한다.
두번째는 신학적인 성격이 전제되어야 되겠는데, 즉 예수의 실재가 즉 지상의 예수 즉 역사의 예수가 모두라면 현양된 예수, 부활의 예수, 신앙의 예수는 도대체 역사의 예수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인가? 신앙을 통한 예수의 영역은 그럼 배제되어야 되는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부활의 예수, 초월의 예수를 역사의 예수로 이해하면서 함께 수렴할 수 있겠는가 ?
인간적으로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고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神人 양성을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적인 신앙고백으로서가 아니라 삶 안에서 고백하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가 결합되는 실존적인 고백으로 연결되어야 된다. 그럴 때 Deus Homo , Homana persona과 Divinitas, 즉 Divinitas와 Humanitas 가 함께 종합될 수 있는 예수를 이룩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개신교 : 영육의 설명에 대한 근거를 필립비서 2장에 두면서 이제 Chritologia, Elevatus , katabaticus, 즉 현양된 예수, 비하된 예수, 겸허한 예수로 설명하면서 이 두가지 관점이 종합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가톨릭 : 대체로 영육의 관점에서 설명. 현양된 그리스도, 낮추신 그리스도, 이 둘의 관계를 또 어떻게 종합해야 하는지 문제로 남게 된다.
바르트 : 이 두가지를 종합하는데 나름대로 크게 성공했다. 즉 현실 안에서의 그리스도와 초월적인 삶에로 이행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향성, 그래서 이 둘의 일치를 함께 추구할 때 참된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조화를 꾀하기 위한, Deus-Homo를 이해하기 위한, 어떤 중간의 마지막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요약 **
1.결국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신앙고백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 안에서 늘 예수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만나도록 해야 되겠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성과의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2. 그런데 예수에 있어 그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즉 십자가의 구체적인 죽음, 그분의 vita practica, 현재적인 삶이 또 이야기 되어야 한다.
3. 십자가의 부활은 결국 상승과 하강의 원리로서 이야기되었듯이 가정이 아닌 정말로 예수가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을 그 예수를 근거로 해서 다시 높이는 상승의 길이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이다. 즉 보존적인 의미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출발신학과 귀환신학을 하강신학과 상승신학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은 구원신학이다. 그리스도의 하강의 삶에서 그가 부활했다는 것은 그와 함께 우리가 상승할 수 있는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믿음, 또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죽음과 부활, 다시 그 부활의 결실로 나타나고 있는 강생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하강과 상승, 이렇게 종합적인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 포괄적이면서 또 수렴적이면서 종합적인 역사의 예수와 그리스도를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제 3장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적 질문
1.세속화한 세계의 도전
세속화한 세계의 도전-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 세상이 어떤 질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가를 다룬다. 즉 일체의 신화를 배척하는 세속화된 세상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 베르질리우스의 희망의 시
식민지 치하 억압의 상황에서 아픔을 이야기 하면서 그 당시의 유다인들은 묵시문학적 사상을 통하여 아픔을 극복하려 하였다. 그래서 어떤 미래에 대한 희망과 동시에 하느님나라의 임박과 도래에 대한 진한 염원을 나타내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예수께 제자들을 보내 질문을 던졌다.“당신이 오셔야 할 바로 그 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어떤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이 질문은 유대교의 범위 안에서 어디서나 절실한 질문이었다. 이 말씀은 고통과 불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인가를 묻는 절박한 목소리였다.
우리는 지금 세속화, 탈신성화, 비신화화,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최선의 것은 합리성에 바탕을 둔 접근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합리적인 것이 제시되는 곳에서는 기존의 권위, 신성성, 신화적인 설명이 설득력이 없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세속화는 언제든지 인간이 자진들이 역사의 주인이어야 하며 인간의 주체성이 모든 실체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근세에 있어서 Cogito ergo sum 이라는 대명제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인간의 인식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이 실재를 지배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는 인식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신성의 영역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인식으로 포착되기 때문에 신비가 깨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불필요하다.여기서 탈신화화의 정당성이 부여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느님으로 부터 탈피하는 것을 Emanzipatio(해방)로 설명하고 있다. 원래 해방의 의미는 법률적인 의미였는데 이것이 정치적인 개념과 연결되면서 그리고 종교적 개념의 변질로서 하느님을 떠나는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애초에 해방은 로마시대로 부터 자비, 은사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이제는 자율적인 해방의 개념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자율적인 해방이 인간의 모든 것에 앞서게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결국 이것은 법률, 정치, 이념적 또는 모든 포괄적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20세게에 K.Marx가 종교로 부터 해당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Emanizipatio가 우리 시대에 모든 것을 이해시키는 가장 중요한 용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줄것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불트만 : 복음을 모두 비신화화해서 설명하고 대화해야 한다.
라너 : 인간학적으로 전환된 그리스도론을 갖고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한다.
2.그리스도 신앙을 비신화화 하려는 시도 : 세속화된 세계의 도전에 대한 첫번째 대응 방안
인간의 자유와 성숙이 강조될 때 이것은 인간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중심이며 사색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이미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데 이런식의 신앙고백이 이미 신화화 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신학자의 고민은 정직한, 솔직한 언어를 쓰자는 것이다.
** 가 톨 릭 의 입 장 **
- 종교사학파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원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라면 비신화화는 수락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 그 자체까지도 거부하는 비신화화는 수락할 없다.
옛날에는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했던 모든 것을 신화로 해결하려 하였다. 이런 것은 미개한 신화적 단계를 걷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화적 믿음을 비신화화 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실행한 비신화 작업은 결코 제거한 것이 아닌 재해석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해석학이 그중요성을 획득하게 된다. 즉 해석이 문제이지 실재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슈트라우스 :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창작된 어떤 전설의 소산이다. 그리스도는 박애주의적인 개념으로 인간이 창출해 낸 소산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전면 부인하는 발언이다. 예수의 역사는 실재가 아니고 이미 신앙으로 창작된 내용이 우리에게 전달되었으며 신앙으로 만난 예수와 역사의 예수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많이 나왔다.불트만이 이러한 영향을 많이 받아 비신화화 작업을 해나갔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실존이해에 대한 적극적 개념을 소극적으로 표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집약시키기 때문에 개방적인 것을 소극적으로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필요성을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 될 때 비신화화의 문제점은 없다.
그런데 불트만의 한계는 중도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신앙이라는 것이 예수안에서 하느님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에 불트만은 곤경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여기서 비신화화의 방법에도 한계가 있다. 문제는 절대자 하느님은 신화적이든지 비신화적이든지 시간적 공간적 절대자인 하느님을 역사라는 이름 속에, 장소안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부리박사 : 결국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인간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일무이한 구원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를 그리스도 신화에 표현되어 나오는 대로의 자기 본연성에 입각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하나의 사건으로 현실화 할 수 있다는 데 있음을 주장한다. 그 분을 기점으로 나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나타내는 것이라 설명하는 것이다.
-- 카스퍼는 이것을 이상적인 인간의 실현, 박애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가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관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상대화 될 때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 깨지기 때문에 이 경우에 이것이 보존될 수 있겠는가가 신학자들의 끊임없는 물음이 되고 있다.
스힐러베엑크스 : 예수 이야기에서 “하느님 자신에 관한 하나의 위대한 비유와 동시에 우리 ‘인간존재’의 인간성의 모형”을 본다. 그러기에 예수 이야기는 “인간성을 아끼시는 하느님께서 제공하신 하나의 새롭고도 전무후무한 현존재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는 하나의 길잡이고 하느님은 그것을 능가하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비신화화의 노력은 결국 비판적이며 적극적인 의미는 남아있고 또 비신화화의 노력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의 언어이다. 언어를 통하여 핵심을 찾고 비신화화의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불트만의 비신화화의 한계점-- 비신화화라는 목적 자체는 좋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메시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신화가 아닌가? 여기에 비신화화의 한계점이 있다고 본다.
K. Jaspers : 비신화와 역시 무한한 하느님을 결국 공간화시키고 시간화시키는 하나의 신화라고 생각하여 이의를 제기.
F.Buri : 절대적 하느님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하느님, 또 그리스도교와도 다른 그런 하느님이 아니겠는가? ‘Deus Christi보다 훨씬 더 큰 분이다’라고 가정.결국 그리스도론은 이상적인 인간의 실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또한 박애주의자 이외에 그분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는가.
⇒ 따라서 이러한 개신교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견해에 가톨릭 학자들이 하나의 해답을 추구하게 된다.
H.Halbfas : 인간이 자기를 발견함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안에서 가장 고도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 중심으로 설명. 그러나 그의 유일회성이 보존될 수 있는가?
J.Nolte : 예수의 구원적인 의미가 이른바 ‘유일회성’이 아니라 상대화될 염려가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제 3자도 그럴 가능성을 이룰 수 있다고 하면서 상대화의 위험을 염려.
또한 스킬라벡같은 학자들은 그런 주장에 동감하면서도 그러나 이 유일회성만큼은 늘 보존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 Salve Unicitas → 크리스챤의 고민이면서 타종교와의 대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비신화화 작업은 인정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대중신심에서 전달된 신화적인 의미를 지닌 분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이런 의미에서 비신화화 작업은 의미가 있으며 우리의 의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비신화화의 실존적 인간학적 해석은 참으로 중요하며, 정당하다. 그런데 계시는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언어, 언표는 다시 인간학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건은 인간학을 출발점으로 한 전이해가 있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깊은 자기고찰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찰이 되며 곧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고찰이 된다. 비신화화 문제는 합리성과 자유의 문제를 큰 축으로 다루게 된다. 이런 합리성과 자유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만이 인간 자신을 이해하게 되고,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1) 합리성에 관한 문제: 계몽주의의 근대적 특징에 따른, ‘합리적인 것만이 진리이고 합리성이 모든 것의 척도’라는 주장.
합리성만을 강조할 때 개인이 전체성에 빠질 염려가 있다. 계몽주의적인 변증법을 통하여 합리성 자체가 비합리적인 것에 처할 위험이 있으며 합리라는 미명 아래 이데올로기화할 수 있다. 계몽주의의 기본전제는 이성 중심으로서, 이성원리로서 모든 것을 파악하게 되며 모든 것이 같다는 것과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주체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특수성이 늘 배제되기 마련이므로 인간의 개인적인 자유가 희생될 수 있게 된다. 유일회성과 특수성이라는 것은 일반을 위한 기계적인 부속품에 불과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자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합리성을 넘어설 수 있다.
2) 자유: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되려면, 실재 전체가 자유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한다. 즉 합리성을 넘어서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유일회적, 새로운 것, 연역불가능한 것은 인간의 자유때문에 실재를 넘어설 수 있는 여백이 있는 것이며 이런 이유로 유일회성이 보존된다. 따라서 그리서도교적 입장은 비신화화작업이 정당한 것인지, 부당한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비신화화 작업이 정당한 것이 되려면, 그것이 예수 그리슫를 하느님 및 인간의 자유를 위한 거점으로 제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3. 인간학적으로 정향된 그리스도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
키에르케고르나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적 입장 = 하느님과 인간의 공백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심연으로서, 결국은 죄인인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없다. 오직 하느님의 Gratia로써 가능하며 거기에 인간의 Fides만으로 주어진다. 즉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가능하다.
가톨릭 입장 = 라너; “인간 안에 무한을 향한 염원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인간을 하느님에게로 elevatio시킬 수 있다.” 무한을 지향한 하나의 염원이라는 것은 인간이 초월을 향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 안에 초월 가능성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것을 가시적으로 실현시켜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ꡔ초월적인 그리스도론, 아래로터의 그리스도론ꡕ
⇒ 카스퍼 ; 무한을 향한다는 염원이 무한자체의 실재를 입증한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이의를 제기.
라너의 비신화화에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실제적인 상징이라고 하며, 이를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라너는 강생이란 인간을 보존하고 하느님을 스스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이며,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론이며 이는 또한 초월적인 그리스도론의 연장일 수 있다.
*비판 = 라너의 그리스도론의 내용은 인간의 사고, 혹은 실존으로부터 선험적으로(a priori) 그리스도론의 내용이 이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은 무엇인가라는 이의가 제기된다.
따라서 카스퍼는 라너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종합하는데
1) 라너는 그리스도교의 여러가지 상태(현상)에서부터 출발하고 았다.
2) 초월적 조건에 대한 반성(Reflexio)에 이르게 된다.
3) 그리스도 관념의 인간과 초월적 구조에 대한 상관관념임을 입증하게 된다. 이는 곧 그리스도 관념이 유일회적이지만 이웃과 상관관념 속에서만 이해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정리하면 다음 세 단계로 전개될 수 있다.
① 인간의 인식은 자신과 범주적 대상을 초월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곧 유한한 것을 유한한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벌써 무한한 것에 대한 어떤 선파악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이 실현될 때만 자유라는 것도 가능하다. 결국은 인간은 무한을 추구하면서도 인간이 선 자리는 가련한 자리이며 여기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자리이다.
② 인간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즉 무한을 지향하며, 유한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도 힘을 지니고 있는 ‘희망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역사를 통해 만난 하느님을 우리는 그리스도라 부른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으로서 구세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③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강생에 대한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결국 육화는 전무후무한 유일회적인 의미로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기 위한 구체적인 하나의 사건이요 장소이다.
인간학적으로 정향된 라너의 그리스도론은 역사적 그리스도교를 일방적 형이상학화하였고, 그 특수성이라는 걸림돌은 철학적 사변으로 제거한 것이 아니냐 하는 물음제기가 되며 따라서 라너에 대한 비판은, 인간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므로 상호주체성이라는 현상을 경시했다고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즉 라너는 보편적인 인간만을 이야기했을 뿐 구체적인 상황은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호주체성의 특징은 언어의 상통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나중에 라너는 초월성과 인간의 연관성을 융합하려고 시도한다. 역사적인 실재와 초월적인 가능성 안에는 항상 긴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으면서도 항상 긴장이 존재하는 구조적 긴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결국 라너의 약점은 무한한 염원에서 곧 무한실재가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한을 염원해도 결국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다. 초월의 가능성이 초월의 실현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J.E.Kuhn : 그리스도론은 초월적인 인간학만은 아니며 미결에 남아있다. 이 둘의 관계는 유비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유일회성이라는 것은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만 이런 역사성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이런 유비적이라는 설명 때문에 예수의 유일회성이 상대화될 염려를 배제할 수 있다.
발타사르 : 그리스도와 마리아와의 차이에 대해 반문. 마리아 역시 철저한 개방성, 헌신의 인물이므로 라너의 설명에 한계가 있다고 함으로써, 유비적 설명을 통해 같은 점이 있지만 또한 다른 점이 있음을 전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이 살아남을 수 있다.
슈트라우스 : 하나의 관념이 일정한 모양이 아닌 상대방을 보완해 주는 다양한 모형을 만들어내야 한다. 따라서 다시 신앙으로 되돌아가서 예수 안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겸허한 고백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다시 예수의 역사 속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4.역사화한 세계에 있어서 구원에 대한 질문
역사는 인간의 삶의 연장이며, 내적 역사성은 외적 역사성에 우선하며 역사는 시간 이전에 이루어지고 있는 통합이다.
역사는 인간과 세계 사이에 주고 받는 변화의 교호관계로서 그것은 위력과 무력의 변증법이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또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현장이다. 단순히 시간과 횟수의 연속도 아니다. 또 발전과 진화와의 동의어도 아니다. 또 어떤 선후계기도 아니다. 역사는 인간이 지니고 있던 자유, 기억 능력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시키는 가치와 연결된다. 아우구스띠노의 시간에 대한 설명도 이렇게 역사를 이해하고 있다.
* 카스퍼의 역사 이해 : 외적 시간과 즉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시간과 역사를 내적 역사성에 의한 종합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내적 역사성이라는 것은 외적 역사성에 우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라는 것은 구체적인 종합이다. 어떤 시간의 단순한 이전에 현재 미래의 통합을 생각해야 한다.
이때 역사는 결국 인식하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변화(mutatio)가 이루는 개념이 아닐까? 상호매개사건 또 세계는 인간을, 인간은 세계를 서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 비판 ;그런데 이런 역사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과연 언급할 수 있는가. 또 그리스도교적 희망이 이런 역사 안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서 우리의 시도는 첫번째 우리 삶에 대한 진단이다. 역사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교호 (communicatio) 상호관계이다. 그런데 인간이 실제는 이런 역사 realitas historia, factum historia 역사적 실재 사건보다 더욱 더 위대하고 동시에 그것을 비약할 수 있는 초월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한편 역사 앞에서 인간은 이렇게 위대하지만 또한 무력할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구조를 생각해 보자. 인간의 위대함. 동시에 무기력-역사 앞에서, 구조 앞에서, 제도 앞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읽어볼 수 있다. 역사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제한받고 있는 인간의 한계성, 무능성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자유가 문제를 푸는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칸트는 자유를 위한 여백, 자유를 위한 세계를 이야기하면서 바로 이 자유때문에 그 자유의 확산으로서 하느님이 인간 자유의 근거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하나의 관건을 제공한다.
두번째, 역사의 위력 또한 무력의 변증법이다. 역사 안에 내재된 악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 철학에서 악은 단지 존재의 결핍 선의 결핍이라고 보는데 이는 정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은 존재의 전도된 의미라는 것이다. 악의 문제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역사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인간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 바로 악으로 만연된 현실이기 때문에 그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여기서 구원의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세번째, 역사는 자기 힘으로 완성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악은 인간에 대한 자기 모순이고 자기모욕이란 것이다. 폭력의 악순환때문에 역사는 쳇바퀴돌 듯 계속되는 것이다. 역사는 결국 자기 힘으로 완성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구원에 대한 힘이 요청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유한성, 역사현장에 제기되어 있는 악성,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여전히 이는 미해결의 숙제로 우리 안에 남아있다. 그래서 여기에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종말론적 희망을 제기하게 된다. 여기서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인간을 이야기하고 악을 이야기하고 또 구원을 실현시킨 예수의 위치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샤르댕과 같은 사람들은 여기에 그리스도 안의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라너는 나름대로 미래에서부터 위로 상승된다는 진화법칙으로 설명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가능성이 있다. 이런 자기초월을 ‘창조적’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 속에는 존재에 대한 징표와 암시가 있을 수 있는가. 필연인가 우연인가. 이런 문제와 함께 항상 희망 쪽으로 다가와야 할 우리들의 소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헛수고도 있다. 실망과 좌절 등.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인간의 한계성, 역사의 악성, 그러한 모순과 좌절과 실망 또 초월성을 모두 cover하는 존재이다.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성,위대성, 역사의 장단점, 희망, 실망,좌절, 또는 초월성이 이 모두를 자기 안에 실현하는 존재, 그럼으로써 총체적인 존재 역사의 집약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때문에 예수가 우리에게 있어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 대체로 인간의 문제, 역사의 문제로 총체적으로 접근을 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을 샤르댕은 이른바 오메가 포인트로 이해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말했듯이 영성의 마지막 단계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된 우리’라는 관점에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문제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의 위대함과 존재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예수를 역사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에서와 같이 세자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을 계속 예수 앞에 제시하면서 예수를 수락하도록 노력해야 한다.--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당신입니까?
구체적으로 우리 현실에 예수가 답이 될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것인가. 이것이 우리 시대에 찾아가야 할 그리스도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종합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집단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개별적 자유를 확인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택일의 근대적 사고방식에 내재하는 변증법 원칙에 의해 자유로 얻어진 결론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 안에서 자신을 능가할 수 있는 반면 또 자유가 인간을 특징지우는 연대적 요소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역사 안에서 유한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적 유한성에 대한 체험도 좀더 주체성 내지 보편적인 전체성을 극복하고 있는 독특성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자유와 한계라는 개념은 연결되면서 새로운 초월체험을 우리에게 가능케 해 준다. 거기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상승과 진전이라는, 도피로서가 아니라 유한이라는 한계와 악의 결실 혹은 그 악과 싸워 이기고자 하는 의지의 선택으로서 우리의 희망이 있다. 바로 이것이 결국 초월의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하나의 상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싹인 것이다. 즉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을 넘어설 수 있는 희망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향하게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론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지녀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기 존재를 자인하면서 의지의 선택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결단, 그것은 희망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과 연결이 가능하다. 이제 위와 같은 상황에서 역사적 예수를 찾아 가는 것이다.
2) 인 간 학 적 그 리 스 도 론
라너 : 인간을 하느님 지향의 절대 초월자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정신적 구조를 근거로 해서 다른 여타의 피조물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존재이다. 우주의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자신의 유래와 종말을 묻는 존재요, 현재로써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 그리고 만족과 충만을 찾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신 안에서는 자신의 최종적인 대답을 얻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자신의 완전한 행복, 완전한 충족을 그 자체 안에서는 얻을 수도 이룰 수도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리적으로 자신의 실존 전체와 함께 언제나 더 위대한 하느님의 신비를 지향하도록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고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갈 때만 인간은 자신을 능가할 수 있다. 즉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 자아 충족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인간학이고 인간학은 미완성 그리스도론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지향의 절대초월듸 도가 극에 달한 유일한 정점이다.
라너는 이 정식에 기초하여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론을 전개한다. 즉 만일 그리스도론이 인간학의 전무후무한 완성이라면 인간으로서 자기의 삶을 전폭적으로 수락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이미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자렛의 예수를 수락하고 만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론은 인간학의 하나로 타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몰트만은 “진실된 인간에 대한 언어는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라너는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을 견지하고 있지만 그 외의 신학자들은 그렇지 못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인간 모델의 하나로 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3. 인간학적으로 정향된 그리스도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
키에르케고르나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적 입장 = 하느님과 인간의 공백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심연으로서, 결국은 죄인인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없다. 오직 하느님의 Gratia로써 가능하며 거기에 인간의 Fides만으로 주어진다. 즉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가능하다.
가톨릭 입장 = 라너; “인간 안에 무한을 향한 염원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인간을 하느님에게로 elevatio시킬 수 있다.” 무한을 지향한 하나의 염원이라는 것은 인간이 초월을 향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 안에 초월 가능성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것을 가시적으로 실현시켜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ꡔ초월적인 그리스도론, 아래로터의 그리스도론ꡕ
⇒ 카스퍼 ; 무한을 향한다는 염원이 무한자체의 실재를 입증한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이의를 제기.
라너의 비신화화에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실제적인 상징이라고 하며, 이를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라너는 강생이란 인간을 보존하고 하느님을 스스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이며,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론이며 이는 또한 초월적인 그리스도론의 연장일 수 있다.
*비판 = 라너의 그리스도론의 내용은 인간의 사고, 혹은 실존으로부터 선험적으로(a priori) 그리스도론의 내용이 이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은 무엇인가라는 이의가 제기된다.
따라서 카스퍼는 라너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종합하는데
1) 라너는 그리스도교의 여러가지 상태(현상)에서부터 출발하고 았다.
2) 초월적 조건에 대한 반성(Reflexio)에 이르게 된다.
3) 그리스도 관념의 인간과 초월적 구조에 대한 상관관념임을 입증하게 된다. 이는 곧 그리스도 관념이 유일회적이지만 이웃과 상관관념 속에서만 이해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정리하면 다음 세 단계로 전개될 수 있다.
① 인간의 인식은 자신과 범주적 대상을 초월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곧 유한한 것을 유한한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벌써 무한한 것에 대한 어떤 선파악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이 실현될 때만 자유라는 것도 가능하다. 결국은 인간은 무한을 추구하면서도 인간이 선 자리는 가련한 자리이며 여기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자리이다.
② 인간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즉 무한을 지향하며, 유한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도 힘을 지니고 있는 ‘희망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역사를 통해 만난 하느님을 우리는 그리스도라 부른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으로서 구세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③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강생에 대한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결국 육화는 전무후무한 유일회적인 의미로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기 위한 구체적인 하나의 사건이요 장소이다.
인간학적으로 정향된 라너의 그리스도론은 역사적 그리스도교를 일방적 형이상학화하였고, 그 특수성이라는 걸림돌은 철학적 사변으로 제거한 것이 아니냐 하는 물음제기가 되며 따라서 라너에 대한 비판은, 인간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므로 상호주체성이라는 현상을 경시했다고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즉 라너는 보편적인 인간만을 이야기했을 뿐 구체적인 상황은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호주체성의 특징은 언어의 상통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나중에 라너는 초월성과 인간의 연관성을 융합하려고 시도한다. 역사적인 실재와 초월적인 가능성 안에는 항상 긴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으면서도 항상 긴장이 존재하는 구조적 긴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결국 라너의 약점은 무한한 염원에서 곧 무한실재가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한을 염원해도 결국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다. 초월의 가능성이 초월의 실현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J.E.Kuhn : 그리스도론은 초월적인 인간학만은 아니며 미결에 남아있다. 이 둘의 관계는 유비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유일회성이라는 것은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만 이런 역사성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이런 유비적이라는 설명 때문에 예수의 유일회성이 상대화될 염려를 배제할 수 있다.
발타사르 : 그리스도와 마리아와의 차이에 대해 반문. 마리아 역시 철저한 개방성, 헌신의 인물이므로 라너의 설명에 한계가 있다고 함으로써, 유비적 설명을 통해 같은 점이 있지만 또한 다른 점이 있음을 전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이 살아남을 수 있다.
슈트라우스 : 하나의 관념이 일정한 모양이 아닌 상대방을 보완해 주는 다양한 모형을 만들어내야 한다. 따라서 다시 신앙으로 되돌아가서 예수 안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겸허한 고백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다시 예수의 역사 속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제 2 장 예수의 선포와 그 메시지
1.기본 소재:하느님 나라의 오심
마르꼬는 예수자신의 메시지의 핵심을 전해주며 ( 마르 1,15- “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읍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마태오는 유대교의 표현으로서 하느님 나라 βσθλεθα 대신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 Rerum Dei ( 하느님 나라,통치,다스림 )
1) 무엇을 행할수 있는 자유와 권리
2) potestas ( 능력,권한,권세 ) - 원리(정통성의 의미)로서의 권한
3) auctoritas ( 권위 )
그런데, 예수는 하느님 나라 내지 다스림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해주지 않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만 하신다. 당시의 사람들도 - 바리사이,열성 당원,묵시문학계의 사상을 따르던 사람들 등 -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각기 달랐다.
자유주의 신학 : 하느님 나라를 일종의 최고선, 정신 및 자유의 왕국 정도로 이해 하였고, 슈바이쩌,바이스의 ‘일관적 종말론’에 의한 종말론적이며 묵시문학적 하느님 나라는 윤리적으로 이해되었고, 이는 정치 신학에로 형태가 바뀌며 하느님 나라를 정치적, 사회적 유토피아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 역시 하느님 나라 사상의 본래의 의미를 박탈한다.
그런데, 당시의 감수성으로 볼때 하느님 나라, 다스림의 개념은 지상에서는 일찌기 실현되어 본 적이 없는 어떤 의로운 지배자를 그리워하면서, 이 이상이 언젠가는 실현되리라고 기대했던 당대 유대인들의 희망을 총괄한 개념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임하면 부당하고 불의한 지배자로부터 해방되어 이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가 관철될 것으로 기대했다. (옛 근동의 여러 민족들에게 정의란 편파성 없는 공정한 재판과 판결이라기보다는 의지할 데 없고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보호하는 데 있었다.)
결국,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는 평화와 자유, 정의와 생명에 대한 인류의 갈망과 추구라는 지평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서 : 인간이 어떤 결정, 선택을 하기 전에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즉 인간의 어떤 원초적 체험을 표현하는데, 이러한 성서의 관점으로서 인간의 근원적 의망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약속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은 하느님만이 주시는 지금까지 있어 본적이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 즉 하느님 자신이며, 하느님의 다스림이란 하느님의 하느님이심, 그분의 주님이심을 뜻하며, 동시에 인간의 인간임과 세상의 구원, 악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설파하신 메시지의 기본 소재이며 그분의 인격의 비밀이다. 따라서 장차 임하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메시지는 그리스도론의 기본적 사변 내용이다.
2.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지리라는 성서의 희망은 유토피아나 역사적 법칙에 대한 직관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이 역사에서 겪은 구체적 체험이 유일한 근거가 된다. 즉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 나라는 이스라엘의 오랜 신앙 고백 ( “하느님은 왕이시로다”)을 추상명사로 바꾼 후기 유대교의 개념으로서 다스림 자체가 역사안에서 인정 받고, 관철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역사의 쓰라린 체험은 예언자 출현 이래 이스라엘의 신앙 의식을 종말론화하여 확대 하였고 어떤 새로운 계약을 희망하게 되었다. (묵시문학에서는 이 종말론적 희망을 초월화 시켰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성서적 이해를 결론하면,
1)종말론적 희망이 표현되어있는 성서의 기사는 장차 일어날 사건들의 사전 보도가 아니다. - 오히려 괴로운 상황에 처했을때의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다.
2)종말론적, 묵시문학적 언명들은 현재 및 과거에 겪었던 구원체험과 구원 희망을 완성이라는 양식을 빌어 다시 옮겨놓은 것이다.(선취적 표현) - 이것은 하느님께서 결국 세상의 절대적 지배자로 당신을 실증하시리라는 신앙의 확신을 표출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의 신뢰)
예수는 이 종말론적 희망이 지금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선포한다. 그는 하느님을 하나의 감춰진 현실로 이해했기에 비유 화법으로서 적절히 표현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다스림이 하늘 저 너머에 감춰져 있지 않은, 일상적인 현재안에 바로 지금 이자리에 (Hic et Nunc) 감춰진 것이다. ( P 125-126 인용문 참고 )
① 하느님의 미래는 현재를 향한 하느님의 외침이요, 현재는 하느님의 미래에 비추어 내리는 결단의 시간이다. 그것은 시간과 영원의 철학적 변증법이 아니라 성서 특유의 시간관으로 부터 출발해야 할것이다 (성서적 시간관 및 역사관의 첫 특징은 시간을 양적인, 계속적이며 규칙적인 선후계기가 아닌 질적 단위이다.). 즉 현재라는 시간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하고 있으며, 따라서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이 무르익었다는 사실로 해서, 그 질이 규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② 그런데, 예수는 혹시 하느님 나라의 임박을 기대함으로써 스스로 착각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
성서적 시간관 및 역사관의 둘째 특징은 임박 기대와 재림천연(再臨遷延) 사이의 긴장 관계를 말한다. 이는 M.Buber의 ‘사건화하고 있는 역사 ’라고 한 사실과 관련한다. 그에 의하면 역사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주고 받는 대화중에 일어난다. 하느님의 언약은 인간에게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 언약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방식은 인간의 결단,신앙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와 있다는 예수의 선포(사신)는 결단을 촉구하는 하느님의 제안이요 새로운 가능성이며 인간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 제안은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 신앙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제안은 현재의 상황을 종말론적인 결단의 상황으로 재규정한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한 거부에도, 이스라엘에 대해 하느님이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셨듯, 당신의 다스림을 확립하기 위해 다른길을 택하신다.
정리하면,
장차 임하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예수의 선포(사신)에는 어떤 의미의 잉여언약이라는 여백이 있었다. 그의 선포는 어떤 희망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 희망은 예나 지금이나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 희망은 하느님께서 정말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일 그때 가서야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 1고린 15, 28 ). 어떠한 그리스도론이라도 이 종말론적 긴장을 계속 팽팽하게 유지해야 한다. 이 긴장은 인간의 희망에 호응하여 전개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3. 하느님 나라의 신론적 성격
구약성서 및 유대교의 전통에서 하느님의 다스리심의 도래는 하느님 자신의 오심을 뜻한다. 그날은 바로 종말론적 희망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선포한 복음은 하느님의 다스리심으로써의 어떤 왕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종말론적 언명과 신론적 언명이 긴장 속에서(‘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병존하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다스리심과 주님이심을 재해석하였다.
이 새로운 해석은 먼저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아빠)라고 표현함으로써 드러난다. 아버지라는 개념은 권위와 지배자적 성격의 요소와 함께 하느님의 통치를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리심’으로 집약된다. 하느님을 이와 같이 아버지의 개념으로 과감하게 표상한 것은 하느님의 가까우심을 독특한 방식으로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라는 지위는 창조와 함께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구원혜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 즉 어린이다움은 하느님의 왕으로서의 통치를 보여주는 표지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예수의 신이해의 새로운 면모(신론적 언명)가 드러난다. 그것은 하느님은 사랑으로 인간과 가까이 계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표상을 신학적 의미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와 연관지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분의 지고함은 인간과의 거리를 둔채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사랑과 용서를 당신의 자유스러운 의향대로 베푸시며, 인간의 기대나 예상을 도외시한 채 선물로 전해주심으로써 역사하시는 주님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회개와 신앙이다. 즉 인간이 하느님에게 여백을 마련해 줌으로써 하느님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는 것, 하느님을 하느님이시게 하는 신앙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역사의 현실에서 구체화된다. 따라서 하느님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관념의 하느님이 아니라 역사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자유는 당신 자신을 남김 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확인되면서도 한편 당신 안에서 머물러 계신다. 이러한 은폐성이 하느님의 영광이 어떻게 세상에 나타나느가를 보여주는 특성이요 방식이다.
이와 같이 예수 당시대의 신관에 혁명적 수정이 가해진다. 즉 세상은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며, 자기 존재는 전폭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행동으로 옮겨져 하나의 현실이 되며 이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4. 하느님 나라의 구원론적 성격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이 세자 요한에게는 위협적 심판으로 나타나지만 예수에게는 구원의 제안이며 기쁜 소식이다. 이러한 조짐은 진복팔단에서 잘 나타나고, 이로써 현존하는 모든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다. 즉 예수의 진복팔단은 인간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의 소산이 아니며, 일체의 세속적 가치의 전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참여라는 행복은 가난과 겸손이 전재된다.
예수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편파성은 사회의 부정과 억압을 비판하던 아모스?? 호응한다. 그러나 에수는 가난을 그 자체로서 찬양하거나 부자들을 원천적으로 증오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이 세상으로부터 아무 것도 기대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나아가 당시 종교적으로도 소외(율법을 지킬 수 없었던) 되어 하느님께로부터도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 ‘복되다’라고 선포한 이 구원의 의미는 ‘하느님의 참여’라는 기대로 집약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참여가 저 세상을 미끼로 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달래려고 했다는 뜻이 아니며, 영적인 면만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예수의 치유 업적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의 현실로 이루어진 영육을 포괄하는 전인간의 구원사실이다. 즉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구원은 죄의 사면과 함께 현실적으로 잃은 것을 되찾는 기쁨이다. 이러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다.
이와 같이 구원은 일차적으로는 죄의 용서와 함께 자격과 공로 없이 무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기쁨에 있다. 그러나 자신이 무상으로 받음과 같이 무상으로 줄 것이 동시에 요청된다. 즉 상대방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사랑으로써 세상의 악을 정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은 생명이요, 자유이며, 평화이고, 화해이며 사랑이다. 따라서 인간은 개인에게서 벋어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질서와 구원을 회복한다.
이제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희망하는 우리들이 세상 안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명백해진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폭력이라는 길을 거쳐 세상을 개혁하고 인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정의의 요구를 포괄한다. 사랑은 누구나의 정의를 위하려는 정열적인 투신인 것이다.
* * * *
서 론
우리가 신앙하는 그리스도는 원래 희랍어로 χριστοs 로 이는 ‘도유된 자, 기름을 발리운 자’라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특별히 ‘메시아’ 즉 ‘구세주, 구원자’를 지칭한다.
첫 세대부터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신앙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분을 그리스도로 선포하기 시작했다. 초대 교회 복음선교의 핵심은 종말론적 구원과 그 실현이 예수라고 하는 인물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을 상기시켜준다. 더 나아가서 약속으로 시작된 역사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확실케 해준다. 따라서 우리들이 현재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실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자비의 하느님께 대한 고백이다. 그리고 역사를 인류 구원의 장소, 즉 구원경륜의 장소로 끌어 올리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수가 나의 구원자이며,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나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 시대에 있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역시 질문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제 1 장 현대 그리스도론의 동향
그리스도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이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에 관한 모든 것을 재검토하고 비판해야 하며, 모든 것을 종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그리스도론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 교회 밖의 사람들을 포괄하는 그리스도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도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의 힘이 펼쳐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리하여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풍요로와 져야 할 것이며, 이럴 때 그리스도론은 교회론의 올바른 방향을 정립가능케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에 관한 문학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성서와 함께 교회 전승을 통해서만 그 올바른 추구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성서와 교회 전통을 통하는 것은 일단 훌륭하지만 그것들이 Formula 즉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하기에 그것을 진리 자체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전통을 물려주되 생동력있게 전해주어야 한다.
신학은 시대의 필요에 대응해야 하며 각 시대의 질문에 맞서야 한다. 따라서 성서와 전통의 현실화가 필요한 것이다.( Traditio의 realizatio ) 이는 과거의 신앙고백과 가르침이 오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찾아야 하는 것이다. 즉 예수가 왜 우리의 그리스도이며 구원자인지 밝혀야 하는 것이다.
1. 현대 그리스도론의 위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제 중 하나는 교회의 쇄신이었다. 이와함께 교회의 본질, 일치 문제, 구조적 문제 등에 대한 질문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교회론에 대한 문제제기로 해결되지 않고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아야만 교회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즉 근원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이럴 때 올바른 교회의 쇄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항상 日常化(Aggiornamento)작업을 추진하여야 하나 여기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는 자기 정체를 명백히 하여 안주하려 할 때에는 자기의 소명이나 중요성을 상실할 수 있다. 따라서 몰트만이 이야기하듯이 이론과 실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필요한 것이다. 즉 십자가의 신학이 문제해결의 열쇠이다.
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는 그 근원의 존재의미를 찾아야 한다. 교회 그 근거와 의미는 관념일 수 없고 신학의 나열도, 신앙의 고백도 교의의 결집도 아니다. 그 핵심은 예수의 인격(person)과 행적(opera)이다.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체험된 예수가 타인에게 공감될 수 있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따라서 각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신앙고백으로써 전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함축하고 있는 약식 신앙 고백문이다. 그리스도론이라는 것은 이 함축적인 약식 고백문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리스도교회의 존폐가 달려 있는 분, 즉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로 인정되고 고백되는 예수께 대한 연구이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의미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특정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그리스도교적임이 무엇인지 교정해나가는 것이며, 나아가 비그리스도교는 무엇인지 구별하는 것이다. 즉 범 우주론적 그리스도론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현대의 믿음과 삶의 이분화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 둘 사이에 균열이 있다면 거기에는 소외가 생기며 따라서 종합을 꾀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날의 허무주의가 대두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의 극복을 위하여 그리스도론의 재정립이 필요한 것이다.
특별히 라틴 아메리카와 같은 억압의 상황에서 예수는 과연 구원자일 수 있는가? 나아가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의 합일에 이를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강생의 현실적 의미를 깨달아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강생의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되물어야 한다. 또한 인간적 차원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의 화해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강생은 억압에서의 해방과 동시에 하느님과 인간과의 화해를 의미한다. 그런데 전통적으로는 화해라는 측면만 지나치게 부각하여 왔다. 우리는 해방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해방의 주체가 하느님임을 고백하며 인간은 2차적이라고 하는데 이는 지나친 분석화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神人(Deus Homo)으로서 그 사이의 구별은 무의미한 것이다. 교회의 정체성도 중요하고 교회의 사명도 중요하며 또 존재와 그 의미가 완전히 일치되는 근거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끊임없는 숙고와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론은 사회와 교회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데 그 핵심이 될 것이다.
2.현대 그리스도론의 동향 (그리스도와 구원 131-41참조)
전통적 그리스도론 : 존재론적 본질 규정이 그 목표. 영원으로부터 선재하셨던 성삼위의 제2위격이신 성자께서 사람이 되신 육화, 인간화의 신비에 주로 역점을 두는 사변신학이었다. = 하강식 그리스도론
현대적 그리스도론 : 이는 역사의 예수에서부터 신앙의 그리스도를 찾아나서는 상승도식 즉 아래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다. 예수의 역사적 생애에서 출발해서 부활 사건까지 전개한다. 예수라는 인물을 통한 하느님의 계시와 바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서 드러남을 밝히려는 것이다.
가톨릭에서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새로운 동향은 라너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책 17면 이하 참조)
교의 정식은 다음 시대를 위한 새로운 문제제기 : 현대의 그리스도론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 현대 그리스도론의 세가지 측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보편적 실재의 모델 속에서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
1) 우 주 론 적 그 리 스 도 론 (Logos-Christus;이레네오,유스티누스 등)
발설된 말씀, 말씀의 싹이 모두에게 내재하여 있다. 따라서 이교도의 종교나 철학에도 구원의 요소가 내재하여 있는 것이다.
샤르댕 : 우주적 지평 안에서 그리스도론을 전개. 우주는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운동을 통해서 계속 변화하는 약동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진화과정 속에서 인간은 여타의 모든 존재의 정상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자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출현과 함께 진화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진화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육화로 말미암아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화사건은 유일회적인 진화의 정점으로 이 우주 안에 발생한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육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초인류, 초그리스도, 초사랑으로 육박하는 운동을 촉진시킨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진화적 우주의 알파요 오메가로서 이해된다. 즉 우주 진화의 종착점이다.
2) 인 간 학 적 그 리 스 도 론
라너 : 인간을 하느님 지향의 절대 초월자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정신적 구조를 근거로 해서 다른 여타의 피조물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존재이다. 우주의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자신의 유래와 종말을 묻는 존재요, 현재로써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 그리고 만족과 충만을 찾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신 안에서는 자신의 최종적인 대답을 얻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자신의 완전한 행복, 완전한 충족을 그 자체 안에서는 얻을 수도 이룰 수도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리적으로 자신의 실존 전체와 함께 언제나 더 위대한 하느님의 신비를 지향하도록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고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갈 때만 인간은 자신을 능가할 수 있다. 즉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 자아 충족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인간학이고 인간학은 미완성 그리스도론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지향의 절대초월듸 도가 극에 달한 유일한 정점이다.
라너는 이 정식에 기초하여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론을 전개한다. 즉 만일 그리스도론이 인간학의 전무후무한 완성이라면 인간으로서 자기의 삶을 전폭적으로 수락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이미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자렛의 예수를 수락하고 만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론은 인간학의 하나로 타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몰트만은 “진실된 인간에 대한 언어는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아닌가?”라?? 질문하고 있다. 라너는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을 견지하고 있지만 그 외의 신학자들은 그렇지 못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인간 모델의 하나로 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3) 보 편 사 적 인 그 리 스 도 론
판넨베르그 : 예수 부활의 그리스도론. 부활은 그리스도의역사적 유일회성과 모든 시대 모든 이를 위한 보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예수 역시 인간인데, 인간은 누구나 개체로서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존재요 인류라는 하나의 역사적 전체에 편입되어서 연대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전 역사의 집약이며 역사의 종말을 성취한 인물이다.
이상의 유형들의 공통점 : 예수를 보편적 지평선상에서 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육화가 역사 안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단점 : 그리스도론을 하나의 철학이나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리스도 사건의 참신성(novum)을 강조하는 그리스도론 등장. 이는 그리스도를 통한 실재의 변혁이 목표이다.
① 발타사르 : ‘사랑’의 현상을 전개하면서 그리스도 사건의 보편성에이르는 통로를 추구하려고 시도.
② 메츠 : 설화적 그리스도론. 그리스도론을 예수 생애에 대한 신학으로 이해. 그리스도론이란 지상의 예수에 의해 현시된 바를 설화적으로 현대화하는 것으로 이해.
③ 큉 : 예수는 하느님의 위임자, 전권자, 대사, 대리인 등이다. 인간 예수는 우리에게 보여준 진정한 하느님의 계시이다.
그런데 전통적 교리에 대한 재해석은 전통스콜라의 반복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론적인 참된 신앙고백은 역사의 예수에 근거를 둘 때만 참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메츠는 “역사의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의 지상적인 것만을 추구하게됨으로 해서 그 초월적 의미, 부활의 예수 등에 대해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역사적 자료 미약). 따라서 예수와 케리그마, 예수와 역사에 대한 조화있는 연결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역사에 기초한 가운데 케리그마의 예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3. 현대 그리스도론의 과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신앙고백의 형태를 띤 이름이다. 항상은 아니나 원래적으로 볼때 “예수”라고 할때는 언제나 역사의 예수,인간 예수, 지상의 예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등 대체로 이런 측면의 예수성이 강조되고, “ 그리스도”는 신앙의 예수,초월의 예수, 하느님의 아들 예수, 부활의 예수 등을 나타내는데, 이 둘이 어떠한 관련성을 맺는가?
역사적 예수, 그는 실제로 어떻게 살았고,무엇을 이야기 했고,무엇을 가르쳤고,어떻게 실천했었는가 하는 그 예수가 규명되지 않는한 오늘과 같은 거대한 교회조직에서 논의되고 있는 그리스도는 ( 교회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리스도) 어떤 의미에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여야한다. 이런 고민이 우리들 안에 없다면 참된 예수에 대한 체험과, 또 그와의 만남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강의실에서 접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또 성당 전례를 통해 기억된 예수가 같아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실천적 의미로서 성숙한 신앙인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 현대 그리스도론의 과제 3가지 **
(1) 역사적으로 정향된 그리스도론
즉, 역사의 예수를 찾아가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 History 와 Geschichte= kerigma
꠆ꠏ History : 사건, 실재를 중심으로 한 기술의 역사
ꠐ 이 역사가 우리들에게 망각되고 있었기에 이 역사의 예수를 찾아가는
ꠐ 것이 신학계의 새로운 문제제기이다.
ꠌꠏ Geschichte : 설화적 사건 그런데 성서는 그런 사건 기술이 아니다. 이미 그리 스도를 받아들인 신앙고백의 형태를 띠고 있기에 설화적, 이야기적인 것이다. 즉 성서는 Geschichte 이며 History가 아니다.
불트만-- 케리그마의 예수만을 추구하고 나선다.
그러나 결국 케리마의 예수는 신화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신화
적인 요소가 덧붙여 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Geschichte 와 History가
진전되면서 대립 관계에 있다.
신화 일변도일 때는 역사가 배격되고; 역사 현실, 지상의 예수만
을 강조할 때는 부활과 신앙의 측면의 예수가 설자리를 잃게 된다.
예수의 특수한 생애, 즉 이 세상에 살다가 간 예수,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메세지와 모범을 남겨주신 예수가 있다. 그분의 삶은 하나의 유일회적인 사건이다. 나자렛의 예수는 누구였는가,그는 무엇을 원하였는가, 그의 메세지, 그의 행동, 그의 행위 자체는 무엇이었나. 그는 또한 하느님 나라의 임박을 선포했는데 어떻게 그 자신이 그리스도로 선포되고 믿음의 예수로 ( 즉 신앙의 대상으로 ) 다시 승화될 수 있었는가 ?
여기서 우리는 이 그리스도론 뒤에는 전승 (Traditio) 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그리스도론은 원시 그리스도론적 신앙 고백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다루어야 헐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물음들은 역사적인 것에 신학적인 중요성을 함께 연구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역사가 단순한 역사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역사성이 전제가 될때 예수 역사성에 근거해서 예수의 신학적인 의미가 확인된다. 예수의 역사의 역사성에 근거하지 않은 신앙의 예수에 대한 설명은 때때로 관념에 불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선 역사의 예수를 찾아가자는 그리스도론이 촛점이 되고 있다.
(2) 보편적으로 책임있게 답변할 수 있는 그리스도론
현실적인 문제와 그 요청에 응답을 주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즉, 관념론적 그리스도론은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구체적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그리스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기 희망에 대해서 어떤 해명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친구들에게 설득력있게 설명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 주변에 그리스도를 모르는 다른 이들에게 정말 내가 그리스도로 접한 그 예수를 이야기함으로써 나의 말을 들은 친구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을 지녀야 한다. 우리 현실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해 주는 그리스도론을 형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
“ 그리스도론은 설화적이어야 함과 동시에 논증적이어야 한다. 이 둘이 모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예수, 설화의 예수는 논증적인 예수, 역사의 예수가 되어야 한다.”
== 철학과 그리스도론과의 관계 ==철학에서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해 주어야할 그리스도론
우리에게 주어지는 형이상적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된다. 예) 사회학적인 인간 과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데 이런 고민도 함께 해결해야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의 형이상학은 주로 스콜라 철학을 중심으로 해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토마스 계통의 중심으로 형이상학을 대표로 했는데 그 스콜라 철학이 철학의 모두가 아니다. 이 우주 만물과 세례와 인간 본질에 관해서 논했던 다른 철학사조의 그 고민도 함께 생각하면서 그 문제와 대입시키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론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도식적 관점에서만 그리스도를 논했는데 그럴때는 지났다는 것이다. 즉 현대 철학과의 대화를 위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는가. - 이런 문제들이 될 수 있다.
신학의 다양성 이전에 이미 사상의 다양성이 있었다. 그것을 전제로 해야 된다. 즉, 특에 맞춘 교조적 , 교의적 예수를 선포하기 이전에 다양하게 체험된 예수를 이야기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모든 것을 문제 삼는다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와 그리스도에 관한 문제는 모든 것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현실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의 근본적인 것을 가르쳐 준다. 정치, 경제 , 사회 모든 것에 문제삼고 모든 것 안에서 해결을 찾으려는 고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 뿐만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이 종교든 사회든 정치든 그리스도론에서 모든 것을 비판한다. 즉, 신학의 비판적 기능의 원형은 바로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역사에서 최종적인 하나의 해결답으로서 주어진 존재이다. 따라서 예수에 대한 어떤 본질 이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역사적 , 인격적으로 정향된 존재론이 항상 우선하고 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론은 어떤 의미로서는 교회 자체가 준 전승과도 대결해야 한다. 전통적인 존재론적 그리스도론과 기능적인 비존재론적 그리스도론을 대립시키지 말고 조화시키자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그리스도론적으로 규정된 역사적 인격적 존재를 단순히 형성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론과 철학과의 관계 즉, 자연 이성과 은총을 조화시켜 보자는 것이다.
K. Rahner의 그리스도론은 하느님과 세계사이의 문제를 넓게 연관시켜서 고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비판은 신학이 철학으로 축소 지향될 위험이 있다.
바르트 : 하느님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그리스도론 자체 안에서 규명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될 때 신학 전체가 그리스도론으로 협소화 될 수 있다.
비이더 케어 : 그리스도론이라는 것을 단면적 이해보다는 두 개의 중심을 둔 타원형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과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해 만난다는 의미에서의 그리스도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가톨릭 신학의 고전적 유비론에 가장 잘 호응
예) 유비론 - 하느님께는 최상의 표현으로 즉, 인간의 긍정적인 것의 최상으로 하느
님을 표상한다. 또 인간의 부전적 측면의 다시 부정으로써 하느님 이해
에서 하느님 인식을 말한다.
꠆ꠏ 즉, 인간은 선하다.하느님은 최선이시다. - 적극적 방법으로 하느님
ꠐ 인식
ꠐ 인간은 죽는다. 하느님은 영원하다. - 부정적 방식으로 하느님
ꠌꠏ 인간은 악하다. 하느님은 악하지 않다. 인식
결국 그리스도론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실재 이해를 다루어야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교와 문화, 그리스도교와 정치, 그 밖의 모든 것을 함께 논해야 한다. 즉, 세상의 문제를 포용하는 그리스도론이어야 한다.
(3) 구원론적으로 정향된 그리스도론
그리스도론은 구원론이다. 역사적으로 정향된 그리스도론과 보편적으로 책임있게 답변할 수 있는 그리스도론은 다시 한번 예수의 인격과 역사를 보다 승화된 차원에서 종합,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1,2를 분리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예수의 의의는 그분의 인격과 역사에서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고 그것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은 바로 통합을 이룬다.
** 이 통일 내지 일치는 두가지 측면에서 깨질 수 있다.
첫째, 중세의 스콜라 신학 - “하느님의 신성과 인성 =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가르침
이 일치를 예수의 업적.직능들과 분리켜서 설명했다. 따라서 관념적, 추상적, 고립된 신학의 입장을 취했다. 즉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를 주는지 중세신학은 망각하고 소홀했다. 이때문에 현대인들이 그리스도론에 무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 전통 : 삶안에서 체험된 예수 ! 즉 예수의 참된 신성과 마찬가지로 참된 인성을 고백하고 변화한 것은 구속의 현실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현상을 통한 실재 인식하는 철학의 원리와 같이 예수가 행한 업적을 통해서 역사의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론은 구원론이며 해방론이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과거 스콜라 신학에서 설명했던 분리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을 극복할 수 있었고 현대인에게 기쁨을 주는 그리스도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해방과 구속의 의미 추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및 그리스도론적 교의의 구체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론을 구원론으로 축소시키는 위험이 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의 근거는 그리스도를 올바로 이해하자에 있다. 그는 예수의 ‘나를 위하심(Pro me)’을 역설한다. 그리스도론적 고백의 객관적 의미는 역사적 예수를 끝까지 고수하나 멜랑호톤에 와서는 ‘나를 위하심’이라는 원리가 확대해석되면서 ‘그리스도를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그분의 은혜를 인식하는 것이다.’즉 역사에 대한 예수의 인식보다는 그 분이 이룩하신 은혜를 감지하는 것이다라고 이해하고 설명한다. 이러한 가르침을 이어받은 사람이 ‘슬라이어마허 (Schleiermacher)’와 네오프로테스탄티즘. 구원에 대한 현실적 체험이 바로 예수를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게 하는 결론을 이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론적 명제들은 그리스도교적 자의식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적 인간의 원형에 지나지 않는다.
** 존재와 의미 문제**
불트만 : ‘존재와 의미 문제’를 대두시킴. 신앙의 설명은 하느님 Natura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삶의 의미에 관한 언급이다.
kasper의 염려 : 그리스도론이 예수의 삶이 준 의미만으로 축소된다면 인간학의 한 변조에 불과하지 않을까 ? 루터의 ‘Pro me' 나를 위한 예수의 삶과 죽음의 주관적 의미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의를 제기하고 있다.
예수가 우리에게 제시해준 의미는 바로 예수의 역사적 존재에 근거하고 있다. 의미가 존재에 근거하고 있다는 이 사실은 견지하지 않을 때, 포이에르바흐와 같이 “모든 종교적 표상들은 구원과 신화를 바라는 인간의 염원과 아쉬움을 반영한 것이다.” 라고 결론짓게 된다. 따라서 육화 강생도 신이 된 인간의 출현에 지나지 않는다.즉, 신이 된 예수에 대한 고백의 역논증인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인간으로 낮추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으로 높여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 그리스도론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존재와 의미의 균열이라는 근대 특유의 정신사적 운명에 나름대로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 믿음과 내용,믿음과 행위를 대립으로 이해할 때 문제가 발생하기에 상호 통합의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앙 고백이 사물화 된다면 죽은 믿음에 불과하다. 또 그리스도 신앙 고백이 주관적으로만 이해된다면 도피적이며 신앙의 공백화 현상을 가져온다. 따라서 전통적 초자연주의와 근대주의적 내재주의는 서로 보완되어야 한다.
예)
b.c 3000 년 - 중세 15 c. 신관
계몽주의 이 후 신관 갈라진다.
하느님의 신관 내재성
내재된 신관 내재성
내재된 하느님이 초월된 하느님이 강조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내면적으로 들어가게
된다.
↓
이 다음 단계에서 통합
평신도, 여성 중심, 제 3세계가 중심이
되는 세계가 도출되어야 한다.
* 그리스도론이 교회 지배논리의 정당성을 찾는 방법이 되어서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함.
신앙의 내용은 신앙행위로 통해 깨닫게 되고, 즉 믿음은 실천을 통해 확인되고 실천은 신앙에 근거할 때 확인될 수 있다. “ 신앙 내용 = 신앙 행위” 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그리스도론과 기능론적 그리스도론은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상호 수렴적인 그리스도론을 펼쳐야 한다.
제 2 장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질문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늘의 신앙의 출발점: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현상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서구 문명 전체를 지배하고 이념의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교회가 위대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것의 기준은 나자렛의 예수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교회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나자렛의 예수에 관한 연구를 해야 할 필연성을 만난다. 이제까지 교회가 걸어온 길을 역으로 되올라가면서 교회의 원천인 나자렛의 예수를 만난는 것이 역사적 측면에서의 연구이다.
그런데 예수에 관해서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권위있는 교재는 역시 신약성서이다. 신약성서라는 것은 예수의 죽음 이후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사도들과 그리스찬들이 그 죽음을 넘어서서 공동체를 형성했고 예수의 죽음을 재형성하면서 남겨준 메시지이다. 그런데 그 성서를 잉태한 삶의 자리는 바로 교회이다. 제도적이긴 하지만 그 교회에서 성서가 태어났고 성서가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성서가 예수를 인식할 수 있는 기술적인 역사적인 자료이다. 물론 현대적 의미의 역사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성서는 예수의 어떤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성서는 바로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고백이요, 따라서 교회의 성교리를 전해주는 것이다. 즉 성서는 신앙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카스퍼 : 성서연구는 신앙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일부학자들 : 하나의 학문으로서 비신자들도 성서 연구가 가능하다.
진취적인 학자들의 이의를 제기 : 성서에 그리스도의 종말의 핵은 분명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시작된 것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분명 문제가 있다. 따라서 예수가 어떤 소신을 가지고 있는지, 예수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지 예수에 의해서 결과로 나타난 교회의 믿음을 우리가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즉 예수가 가졌던 그 신앙에 대해서, 인간들에 대한 예수의 헌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교회 신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 이런바 제도 교회에 대한 이의를 제기
카스퍼의 설명 ; 개개인의 주체성과 개개인의 삶에 한계가 있는 것과 같이 개개인의 집합인 공동체 역시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이 체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라는 것은 나름대로 어떤 장점도 지니고 있다. 즉 체제는 진실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 진실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꼭 필요 불가결한 진리를 담는 그릇이다. 즉 체제 안에서만 체제를 통해서만 비로서 어떤 메세지나 관습이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교계제도 자체도 체제적인 요소, 가시적인 요소를 지니고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상대적인 안정성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공동체의 가치는 주관적인 자의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체제, 제도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실을 보호해주는 보호막 역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 그리스도인의 종교가 조금 제도성이 약화되면서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교라 부른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회안에 형식을 갖고 구체화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역사적 예수 강생의 재현이다. 한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성 안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제도의 장점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자기 반성과 자기 쇄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멜러의 입장 (Mohler)
첫째는 진리가 좀 상대화 될 수 있다. 한 개인의 존속과 사회적 체제의 존속을 위해 이해관계에 매여 있는 가운데 진리가 그 제도를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한다면 그 제도에 너무 종속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 자체가 결국 상대화될 위험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가 교회에 의해서 전매되었다. 교회만이 그리스도를 독점했기 때문에 예수 대신 교회?? 권위를 행사해 왔다. 따라서 예수보다 교회가 더욱 우세하게 되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 그래서 교회는 스스로 자기 체제옹호, 자기 제도 옹호, 자기 방어적인 자세를 따르기 쉽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은 교회자체의 방어를 위한 어떤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될 수 있다. 이렇게 논의된 그리스도론은 둘다 참된 의미를 상실한다.
신앙 공동체는 독립적인 존재나 자존적인 단위가 결코 아니다. 교회는 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교회 스스로를 넘어서야 된다. 그리고 늘 원천에 비추어서 자기의 모습을 새롭게 여미어야 한다. 따라서 쇄신운동의 핵심은 예수에 대한 철저한 기억에서 시작되어야 된다. 이러한 분명한 기억 속에서 원천에 도달는 것, 이것이 바로 쇄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활력의 힘을 주고 있고 바로 이런 예수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따른 모범적 인물들이 모든 수도자들의 창시자들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결론 :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은 그리스도 신앙이다. 이 그리스도 신앙은 그리스도 신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최종적인 기준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러나 이 둘이 결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즉그리스도와 교회를 함께 다루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교회에 대한 쇄신을 가져오는 것이고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원천적인 기억으로서 돌아가게 한다.
2. 근대적 “예수의 생애 연구”의 정당성과 한계
앞에서 이야기 되었듯이 현대 그리스론에 있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
(1) 루터의 종교 개혁
원천에 대한 기억과 반성의 극치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즉 Fider quit Cristus fecit 그리스도가 행한 바를 우리가 파악해야 된다. 그런데 루터는 “오직 성서”를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 라는 원리로 귀결시킨다.
⇒ 비판적 의미
복음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염원, 성자의 말씀, 하느님의 말씀 자체에 관심을 가졌던 여기에는 아주 큰 변형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루터의 이런 운동과 함께 중세 때 이른바 성서신학이 출현되었다. 성서신학이란 성서를 통해서 예수를 만나는 작업이다. 이 때의 성서신학은 기존 교의 신학에 대한 어떤 비판기능을 지니고 있다. 성서 연구라는 것은 예수를 이해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제까지 모든 신학에 대한 비판적인 기능을 확인하는 것이 성서신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비판의식이 결여된 성서 신학은 존재 가치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를 넘어서는 성서신학의 비판적 기능을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이 때 참된 쇄신이 가능할 것이다.
(2) 역사비판적 사고
성서가 기존 교조신학을 넘어서는 것과 같이 그런 기존 전통을 넘어서자는 욕구가 우리에게 분출된다. 그런데 역사비판적 사고는 우리에게 어떤 경건주의를 가져왔다. 이는 교회생활과 표본적 ,외적 생활형태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성서신학을 기준으로 하여 어떤 실천적인 삶, 개인적인 삶, 인격적인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 경건주의적인 삶의 양식은 계몽주의 사상과 접합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사상으로 형성된다.
결국 예수의 생애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서이다. 하지만 성서 이전에 그 성서를 탄생케한 원천적인 체험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문헌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 슈바이쩌 : “예수 생애 연구” -- 도그마 (교조주의)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역사의 예수를 연구. 역사의 예수가 교회의 신앙이 믿고 가르치는 그리스도와는 다른 분임을 주장 !
* 라이마루스 : 성서의 Prima 즉 첫번째 체제와 두번째 체제를 구별. 즉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이것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메시아 왕국은 현실적이며 정치적인 관점에서 알아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이 라이마르스의 것을 연구하면서 참으로 2-3세기전에 예수의 생애를 보면서 엄청난 변혁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었다. 즉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소재들의 집약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즉 역사의 예수,신앙의 예수, 다음에 미시오(Missio)의 예수와 종말론적인 성격, 또 대림이 늦추어진 그러한 문제라든지 또 정치적 예수의 소재라든지 또 그리스도 이후의 펼쳐진 영성이라든지 이런 모든 전반적인 것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포괄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 렛싱 : 그리스도 자신의 종교와 그리스도교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라이마르스의 이런 주장과 함께 자기 시대의 나름대로의 진보적인 신학들도 불신한 것이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세울러 : 원천적으로 너무 근원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예수에 대해서 어떤 현세적인 이해, 정신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 빠울루스 : 합리적으로,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공통된 의견 = 예수의 본 삶과 그리스도교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 쉬트라우스 : ① 예수에 대해서 초자연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② 둘째는 합리적인 접근 방법도 피상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제 3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신화적인 방법이다. 여기서 역사적인 핵심을 분리하지는 않는다. 신화적이 해석이라고 할지라도 즉 예수의 메시아성, 자기가 메시아라는 어떤 확실성을 지녔다. 이런 것에 의해서 예수의 생애가 그려져야 한다.
⇒ 역사적인 핵심과 그 해석을 구멸하고 있고,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도 구별하고 있고 또 이제 역사적인 그리스도와 이상적인 그리스도를 구별하고 있다.
쉬트라우스의 경고 : 역사적인 그리스도와 이상적인 그리스도가 구명된다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인가? 솔직히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 않느냐?
이것이 새로운 위기,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인 예수와 이상적인 해석 사이에 어떤 신학적인 부담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신학적인 부담은 곧 철학적인 부담인데, 이는 역사적 실재에 관한 것과 현상이란 말로 이야기될 수 있다. 현상이란 것이 이젠 해석이란 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재와 해석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어떤 상태에 대해서 주체, 실제로 인식하는 주체로 동일시한다는 것은 오히려 실재( realitas, factum)로 격하시킨 결과를 가져온 것 밖에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이 실재는 단순히 대상일뿐이고, 또 기술적인 지배적인 것의 대상이될 뿐이고, 학문적으로는 사물세계나 작업세계로 격하될 뿐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 계속해서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이원성, 사고주체와 외연적 객체와의 이원성이라는 논리이다. 이런 이원적인 해석 역시 신학에 부담을 주게 된다. 그래서 신학에서도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구별하고 있다.
예수께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역사비판적인 합리적 방법도 있고, 내면적, 정신적, 영적, 실존적, 인격적 방법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을 함께 포괄하는 통합하는 신앙을 통한 이해를 할 때 예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시대에 쉬트라우스가 제시한 이런 물음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정말 역사의 예수와 해석의 예수, 이상의 예수에 어떤 동일성과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고민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균열이 있다면 그것은 문제이다. 따라서 이것의 어떤 일치, 바로 “역사의 예수가 신앙의 그리스도이다”라는 일치가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론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된다.
위의 문제를 회복시키는 것이 19세기의 그리스도론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것이 다분히 호교론적인 시도라고 말하면서 비판하고 등장한다. 카스퍼는 여기서 傳記 즉 vita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사상이나 신원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도그마의 거부가 아닌 새로운 해석이 펼쳐지게 된다. 역사에 대한 연구는 어떤 의미에서 성인들의 방법이 아닌가? 또 역사 연구를 하는 주체에 대한 전향이 아닌가? 또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 심리학으로 전환하지 않을까하는 염려를 하게된다. 예수의 생활에는 신성이 반영된 것이다. 예수의 인간성은 신적인 것을 표출하는 장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생할에 대한 인식은 예수의 내면성에 관한 질문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기현시에 관한 문제가 끝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특징은 이제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 지속적으로 설명될 때 우리가 이해했던 예수에 대한 내면적인, 영적인, 도덕적인 그리스도론과 함께 예수의 업적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 정치적인 예수, 현상에 영향을 준 예수와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르낙 : 우리 인간 영혼, 내면성을 강조할 때에는 하느님과 영혼에만 너무 국한될 수 있지 않을까 ?
==카스퍼의 평가 : 자유주의파 신학의 시도는 예수의 생애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귀결점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내면성, 또는 우리 내면의 영혼문제로 국한시켰기 때문에 결국 자유주의의 신학이 크게 시작되었지만 결국 실패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 실패에 대한 원인 - 직관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 잘못된 직관 셋
1) 슈바이쩌; 역사의 예수는 신학자들 각 개인의 사상과 관념들의 반영
어쩔수 없이 내가 예수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자기 생각의 반영이 아닐까? 또 자기 체험의 외연적인 표현이 아닐까? 따라서 합리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를 도덕가로보고 이상주의자들은 인도주의의 화신으로 보고, 또 심리주의자들은 화술의 천사로 보고, 또 여러가지 사회주의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개혁가로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슈바이쩌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 즉 예수를 찾다가 우리 손에 잡힌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합리주의자가 그려낸 초벌에다가 자유주의자가 다시 이를 되살려내고 또 근대 사학이 역사에 옷을 입혀서 엉뚱한 예수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그러면 결국 예수는 누구인가? 모른다. 수수께끼다. 다만 그분은 하느님 나라, 새 세상도래를 선포했을 뿐이다. 즉 영영 붙잡히지 않는 예수, 어떤 신비한 예에수로 이해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어떤 자기 주관주의의 객관적인 표상, 잘못된 직관에 근거했기 때문이 아닐까? ==46면
2) 양식사 학파 : 복음서는 역사가 아니고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복음의 예수는 역사의 예수가 아니다.
여기서도 실패의 요인은 직관이다. 그런데 복음의 가치는 초기 공동체의 복음선포라든지 전례, 실천적인 삶, 현존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은 것은 사도들의 신앙일 뿐이다.
“참된 예수는 선포된 그리스도이다. 복음의 예수만이 진실된 예수이다. 따라서 원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자신의 그리스도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켈러.
결국 선포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면 그리스도의 종교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척도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교를 떠나는 것이다. 원천, 역사의 예수를 찾아간다는 것은 그 찾아간다는 미명하에 그리스도를 떠나는 결과가 된다.
3. 해석학적인 관점 ; 역사학적 비판은 원형에 불과하다!
결국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라는 것은 계란과 닭의 관계와 같이 끊임없는 반복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신앙은 무방비의 군대와 같이 누가 공격하면 그냥 무너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거기에 신앙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칼 아담: 과학문명의 발달과 그리스도교는 어떤 불안한 그리스도교, 초라한 그리스도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희망이 있다. 여기에서 간과되고 있는 것은 19세기 말엽의 교회라는 제도적 교회의 위력과 문제점, 야합하는 교회를 빼놓은 것이다. 19세기 말 현대사상이 크게 대두되면서 신앙에 위기가 오게 되고 이에 자기 항변으로서 “교회는 초라하다, 그러나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신앙을 지키는 현주소는 일반 신자들이다. 신학자들이 아닌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1차대전 이후 불트만은 교의적인 그리스도론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게리그마의 그리스도, 복음선포의 그리스도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여기서 가톨릭계 교회론은 자극을 받아 교회쇄신을 모색하게 된다. 그래서 19세기 튀빙겐 학파 등이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이라는 사상 속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밀접한 관계 아래 그리스도론을 재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론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또 후에 본 회퍼는 공동체 안에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했다. 이후 우리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 쇄신 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
신앙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은 불트만이 제기한 그러한 문제를 다시 갖게한다. 즉 역사적인 것에 신학적인 중요성이 접목될 수 있겠는가? 불트만은 신학적인 예수와 게리그마의 예수를 강조했고, 역사의 예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와의 관계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3. 역사적인 것에 대한 신학적인 중요성
역사적인 것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인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케제만: 바로 복음 안에 역사적인 것이 있다. 거기에 바로 예수의 파견소명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단순히 역사적인 것의 신화화가 아니라 신화의 역사화가 요청되는 것이다.
복음의 역사적인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 과제이다. 우리가 이미 보는 복음은 신앙으로 씌여진 것이다. 따라서 이 신앙을 통해서 다시 역사적인 실재를 찾아가야 된다. 따라서 첫째, 모든 신화는 일단 신화라는 것을 배격할 필요가 있다. 즉 엄연히 외적인 사건이고, 또 예수의 생애는 나름대로 어떤 종말론적인 사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순간 순간의 삶이 또 어떤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를 넘어서서 역사적인 실재를 향해서 다가가야 한다. 우리에게서 역사적 우연성이란 것이 하느님의 섭리에서 볼때는 , 그 우연들이 바로 하느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화화에서 어떤 kairos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moment 결단의 시간인 것이다. 선택의 시간, 역사적인 우연이 선택의 시간이란 것이다.
두번째 중요한 점은 그 가현성도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시란 것은 바로 구체적인 삶 안의 인간 예수의 육체 안에, 현실 안에 실현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예수와 현양된 그리스도의 동일성을 강조하고 이해해야 된다.
세번째는 어떤 열광주의와 현세주의적 구원의 이해, 현실론적인 것도 함께 배격해야 한다. 즉 구원은 하느님이 주체이다.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예수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현양된 그리스도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새로운 질문은 다만 그리스도교의 소명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적인 예수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즉 교회가 걸어온 길을 역으로 되돌아가면서 그 역사적인 지상의 예수를 만나자는 것이다.
<케제만>; 해석학과 전통 해석은 원칙적으로 분석해서는 안된다. 전통은 이미 그 시
대의 해석이다. 따라서 이 전통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우리 시대의 해석이다.
따라서 실제와 전통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지 말고 좀 포괄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게시스테(geschichte)와 히스토리(history)를 종합해야 하는 것이다. 게리그마와 역사적 예수의 삶 안의 어떤 불가분의 관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서 부단히 앞으로 진전되는 삶의 양식을 이끌어야 된다.
결국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함께 이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 그 방 법 **
먼저 철학적인 성격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우선 역사의 의미가 분명히 밝혀져야 된다. 예수의 종말론적인 성격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이해,설명될 수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먼저 풀어져야 한다.
두번째는 신학적인 성격이 전제되어야 되겠는데, 즉 예수의 실재가 즉 지상의 예수 즉 역사의 예수가 모두라면 현양된 예수, 부활의 예수, 신앙의 예수는 도대체 역사의 예수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인가? 신앙을 통한 예수의 영역은 그럼 배제되어야 되는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부활의 예수, 초월의 예수를 역사의 예수로 이해하면서 함께 수렴할 수 있겠는가 ?
인간적으로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고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神人 양성을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적인 신앙고백으로서가 아니라 삶 안에서 고백하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가 결합되는 실존적인 고백으로 연결되어야 된다. 그럴 때 Deus Homo , Homana persona과 Divinitas, 즉 Divinitas와 Humanitas 가 함께 종합될 수 있는 예수를 이룩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개신교 : 영육의 설명에 대한 근거를 필립비서 2장에 두면서 이제 Chritologia, Elevatus , katabaticus, 즉 현양된 예수, 비하된 예수, 겸허한 예수로 설명하면서 이 두가지 관점이 종합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가톨릭 : 대체로 영육의 관점에서 설명. 현양된 그리스도, 낮추신 그리스도, 이 둘의 관계를 또 어떻게 종합해야 하는지 문제로 남게 된다.
바르트 : 이 두가지를 종합하는데 나름대로 크게 성공했다. 즉 현실 안에서의 그리스도와 초월적인 삶에로 이행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향성, 그래서 이 둘의 일치를 함께 추구할 때 참된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조화를 꾀하기 위한, Deus-Homo를 이해하기 위한, 어떤 중간의 마지막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요약 **
1.결국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신앙고백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 안에서 늘 예수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만나도록 해야 되겠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성과의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2. 그런데 예수에 있어 그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즉 십자가의 구체적인 죽음, 그분의 vita practica, 현재적인 삶이 또 이야기 되어야 한다.
3. 십자가의 부활은 결국 상승과 하강의 원리로서 이야기되었듯이 가정이 아닌 정말로 예수가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을 그 예수를 근거로 해서 다시 높이는 상승의 길이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이다. 즉 보존적인 의미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출발신학과 귀환신학을 하강신학과 상승신학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은 구원신학이다. 그리스도의 하강의 삶에서 그가 부활했다는 것은 그와 함께 우리가 상승할 수 있는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믿음, 또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죽음과 부활, 다시 그 부활의 결실로 나타나고 있는 강생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하강과 상승, 이렇게 종합적인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 포괄적이면서 또 수렴적이면서 종합적인 역사의 예수와 그리스도를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제 3장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적 질문
1.세속화한 세계의 도전
세속화한 세계의 도전-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 세상이 어떤 질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가를 다룬다. 즉 일체의 신화를 배척하는 세속화된 세상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 베르질리우스의 희망의 시
식민지 치하 억압의 상황에서 아픔을 이야기 하면서 그 당시의 유다인들은 묵시문학적 사상을 통하여 아픔을 극복하려 하였다. 그래서 어떤 미래에 대한 희망과 동시에 하느님나라의 임박과 도래에 대한 진한 염원을 나타내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예수께 제자들을 보내 질문을 던졌다.“당신이 오셔야 할 바로 그 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어떤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이 질문은 유대교의 범위 안에서 어디서나 절실한 질문이었다. 이 말씀은 고통과 불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인가를 묻는 절박한 목소리였다.
우리는 지금 세속화, 탈신성화, 비신화화,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최선의 것은 합리성에 바탕을 둔 접근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합리적인 것이 제시되는 곳에서는 기존의 권위, 신성성, 신화적인 설명이 설득력이 없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세속화는 언제든지 인간이 자진들이 역사의 주인이어야 하며 인간의 주체성이 모든 실체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근세에 있어서 Cogito ergo sum 이라는 대명제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인간의 인식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이 실재를 지배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는 인식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신성의 영역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인식으로 포착되기 때문에 신비가 깨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불필요하다.여기서 탈신화화의 정당성이 부여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느님으로 부터 탈피하는 것을 Emanzipatio(해방)로 설명하고 있다. 원래 해방의 의미는 법률적인 의미였는데 이것이 정치적인 개념과 연결되면서 그리고 종교적 개념의 변질로서 하느님을 떠나는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애초에 해방은 로마시대로 부터 자비, 은사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이제는 자율적인 해방의 개념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자율적인 해방이 인간의 모든 것에 앞서게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결국 이것은 법률, 정치, 이념적 또는 모든 포괄적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20세게에 K.Marx가 종교로 부터 해당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Emanizipatio가 우리 시대에 모든 것을 이해시키는 가장 중요한 용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줄것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불트만 : 복음을 모두 비신화화해서 설명하고 대화해야 한다.
라너 : 인간학적으로 전환된 그리스도론을 갖고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한다.
2.그리스도 신앙을 비신화화 하려는 시도 : 세속화된 세계의 도전에 대한 첫번째 대응 방안
인간의 자유와 성숙이 강조될 때 이것은 인간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중심이며 사색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이미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데 이런식의 신앙고백이 이미 신화화 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신학자의 고민은 정직한, 솔직한 언어를 쓰자는 것이다.
** 가 톨 릭 의 입 장 **
- 종교사학파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원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라면 비신화화는 수락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 그 자체까지도 거부하는 비신화화는 수락할 없다.
옛날에는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했던 모든 것을 신화로 해결하려 하였다. 이런 것은 미개한 신화적 단계를 걷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화적 믿음을 비신화화 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실행한 비신화 작업은 결코 제거한 것이 아닌 재해석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해석학이 그중요성을 획득하게 된다. 즉 해석이 문제이지 실재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슈트라우스 :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창작된 어떤 전설의 소산이다. 그리스도는 박애주의적인 개념으로 인간이 창출해 낸 소산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전면 부인하는 발언이다. 예수의 역사는 실재가 아니고 이미 신앙으로 창작된 내용이 우리에게 전달되었으며 신앙으로 만난 예수와 역사의 예수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많이 나왔다.불트만이 이러한 영향을 많이 받아 비신화화 작업을 해나갔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실존이해에 대한 적극적 개념을 소극적으로 표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집약시키기 때문에 개방적인 것을 소극적으로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필요성을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 될 때 비신화화의 문제점은 없다.
그런데 불트만의 한계는 중도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신앙이라는 것이 예수안에서 하느님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에 불트만은 곤경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여기서 비신화화의 방법에도 한계가 있다. 문제는 절대자 하느님은 신화적이든지 비신화적이든지 시간적 공간적 절대자인 하느님을 역사라는 이름 속에, 장소안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부리박사 : 결국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인간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일무이한 구원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를 그리스도 신화에 표현되어 나오는 대로의 자기 본연성에 입각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하나의 사건으로 현실화 할 수 있다는 데 있음을 주장한다. 그 분을 기점으로 나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나타내는 것이라 설명하는 것이다.
-- 카스퍼는 이것을 이상적인 인간의 실현, 박애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가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관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상대화 될 때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 깨지기 때문에 이 경우에 이것이 보존될 수 있겠는가가 신학자들의 끊임없는 물음이 되고 있다.
스힐러베엑크스 : 예수 이야기에서 “하느님 자신에 관한 하나의 위대한 비유와 동시에 우리 ‘인간존재’의 인간성의 모형”을 본다. 그러기에 예수 이야기는 “인간성을 아끼시는 하느님께서 제공하신 하나의 새롭고도 전무후무한 현존재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는 하나의 길잡이고 하느님은 그것을 능가하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비신화화의 노력은 결국 비판적이며 적극적인 의미는 남아있고 또 비신화화의 노력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의 언어이다. 언어를 통하여 핵심을 찾고 비신화화의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불트만의 비신화화의 한계점-- 비신화화라는 목적 자체는 좋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메시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신화가 아닌가? 여기에 비신화화의 한계점이 있다고 본다.
K. Jaspers : 비신화와 역시 무한한 하느님을 결국 공간화시키고 시간화시키는 하나의 신화라고 생각하여 이의를 제기.
F.Buri : 절대적 하느님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하느님, 또 그리스도교와도 다른 그런 하느님이 아니겠는가? ‘Deus Christi보다 훨씬 더 큰 분이다’라고 가정.결국 그리스도론은 이상적인 인간의 실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또한 박애주의자 이외에 그분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는가.
⇒ 따라서 이러한 개신교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견해에 가톨릭 학자들이 하나의 해답을 추구하게 된다.
H.Halbfas : 인간이 자기를 발견함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안에서 가장 고도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 중심으로 설명. 그러나 그의 유일회성이 보존될 수 있는가?
J.Nolte : 예수의 구원적인 의미가 이른바 ‘유일회성’이 아니라 상대화될 염려가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제 3자도 그럴 가능성을 이룰 수 있다고 하면서 상대화의 위험을 염려.
또한 스킬라벡같은 학자들은 그런 주장에 동감하면서도 그러나 이 유일회성만큼은 늘 보존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 Salve Unicitas → 크리스챤의 고민이면서 타종교와의 대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비신화화 작업은 인정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대중신심에서 전달된 신화적인 의미를 지닌 분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이런 의미에서 비신화화 작업은 의미가 있으며 우리의 의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비신화화의 실존적 인간학적 해석은 참으로 중요하며, 정당하다. 그런데 계시는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언어, 언표는 다시 인간학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건은 인간학을 출발점으로 한 전이해가 있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깊은 자기고찰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찰이 되며 곧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고찰이 된다. 비신화화 문제는 합리성과 자유의 문제를 큰 축으로 다루게 된다. 이런 합리성과 자유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만이 인간 자신을 이해하게 되고,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1) 합리성에 관한 문제: 계몽주의의 근대적 특징에 따른, ‘합리적인 것만이 진리이고 합리성이 모든 것의 척도’라는 주장.
합리성만을 강조할 때 개인이 전체성에 빠질 염려가 있다. 계몽주의적인 변증법을 통하여 합리성 자체가 비합리적인 것에 처할 위험이 있으며 합리라는 미명 아래 이데올로기화할 수 있다. 계몽주의의 기본전제는 이성 중심으로서, 이성원리로서 모든 것을 파악하게 되며 모든 것이 같다는 것과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주체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특수성이 늘 배제되기 마련이므로 인간의 개인적인 자유가 희생될 수 있게 된다. 유일회성과 특수성이라는 것은 일반을 위한 기계적인 부속품에 불과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자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합리성을 넘어설 수 있다.
2) 자유: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되려면, 실재 전체가 자유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한다. 즉 합리성을 넘어서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유일회적, 새로운 것, 연역불가능한 것은 인간의 자유때문에 실재를 넘어설 수 있는 여백이 있는 것이며 이런 이유로 유일회성이 보존된다. 따라서 그리서도교적 입장은 비신화화작업이 정당한 것인지, 부당한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비신화화 작업이 정당한 것이 되려면, 그것이 예수 그리슫를 하느님 및 인간의 자유를 위한 거점으로 제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3. 인간학적으로 정향된 그리스도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
키에르케고르나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적 입장 = 하느님과 인간의 공백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심연으로서, 결국은 죄인인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없다. 오직 하느님의 Gratia로써 가능하며 거기에 인간의 Fides만으로 주어진다. 즉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가능하다.
가톨릭 입장 = 라너; “인간 안에 무한을 향한 염원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인간을 하느님에게로 elevatio시킬 수 있다.” 무한을 지향한 하나의 염원이라는 것은 인간이 초월을 향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 안에 초월 가능성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것을 가시적으로 실현시켜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ꡔ초월적인 그리스도론, 아래로터의 그리스도론ꡕ
⇒ 카스퍼 ; 무한을 향한다는 염원이 무한자체의 실재를 입증한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이의를 제기.
라너의 비신화화에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실제적인 상징이라고 하며, 이를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라너는 강생이란 인간을 보존하고 하느님을 스스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이며,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론이며 이는 또한 초월적인 그리스도론의 연장일 수 있다.
*비판 = 라너의 그리스도론의 내용은 인간의 사고, 혹은 실존으로부터 선험적으로(a priori) 그리스도론의 내용이 이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은 무엇인가라는 이의가 제기된다.
따라서 카스퍼는 라너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종합하는데
1) 라너는 그리스도교의 여러가지 상태(현상)에서부터 출발하고 았다.
2) 초월적 조건에 대한 반성(Reflexio)에 이르게 된다.
3) 그리스도 관념의 인간과 초월적 구조에 대한 상관관념임을 입증하게 된다. 이는 곧 그리스도 관념이 유일회적이지만 이웃과 상관관념 속에서만 이해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정리하면 다음 세 단계로 전개될 수 있다.
① 인간의 인식은 자신과 범주적 대상을 초월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곧 유한한 것을 유한한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벌써 무한한 것에 대한 어떤 선파악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이 실현될 때만 자유라는 것도 가능하다. 결국은 인간은 무한을 추구하면서도 인간이 선 자리는 가련한 자리이며 여기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자리이다.
② 인간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즉 무한을 지향하며, 유한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도 힘을 지니고 있는 ‘희망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역사를 통해 만난 하느님을 우리는 그리스도라 부른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으로서 구세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③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강생에 대한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결국 육화는 전무후무한 유일회적인 의미로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기 위한 구체적인 하나의 사건이요 장소이다.
인간학적으로 정향된 라너의 그리스도론은 역사적 그리스도교를 일방적 형이상학화하였고, 그 특수성이라는 걸림돌은 철학적 사변으로 제거한 것이 아니냐 하는 물음제기가 되며 따라서 라너에 대한 비판은, 인간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므로 상호주체성이라는 현상을 경시했다고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즉 라너는 보편적인 인간만을 이야기했을 뿐 구체적인 상황은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호주체성의 특징은 언어의 상통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나중에 라너는 초월성과 인간의 연관성을 융합하려고 시도한다. 역사적인 실재와 초월적인 가능성 안에는 항상 긴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으면서도 항상 긴장이 존재하는 구조적 긴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결국 라너의 약점은 무한한 염원에서 곧 무한실재가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한을 염원해도 결국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다. 초월의 가능성이 초월의 실현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J.E.Kuhn : 그리스도론은 초월적인 인간학만은 아니며 미결에 남아있다. 이 둘의 관계는 유비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유일회성이라는 것은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만 이런 역사성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이런 유비적이라는 설명 때문에 예수의 유일회성이 상대화될 염려를 배제할 수 있다.
발타사르 : 그리스도와 마리아와의 차이에 대해 반문. 마리아 역시 철저한 개방성, 헌신의 인물이므로 라너의 설명에 한계가 있다고 함으로써, 유비적 설명을 통해 같은 점이 있지만 또한 다른 점이 있음을 전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이 살아남을 수 있다.
슈트라우스 : 하나의 관념이 일정한 모양이 아닌 상대방을 보완해 주는 다양한 모형을 만들어내야 한다. 따라서 다시 신앙으로 되돌아가서 예수 안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겸허한 고백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다시 예수의 역사 속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4.역사화한 세계에 있어서 구원에 대한 질문
역사는 인간의 삶의 연장이며, 내적 역사성은 외적 역사성에 우선하며 역사는 시간 이전에 이루어지고 있는 통합이다.
역사는 인간과 세계 사이에 주고 받는 변화의 교호관계로서 그것은 위력과 무력의 변증법이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또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현장이다. 단순히 시간과 횟수의 연속도 아니다. 또 발전과 진화와의 동의어도 아니다. 또 어떤 선후계기도 아니다. 역사는 인간이 지니고 있던 자유, 기억 능력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시키는 가치와 연결된다. 아우구스띠노의 시간에 대한 설명도 이렇게 역사를 이해하고 있다.
* 카스퍼의 역사 이해 : 외적 시간과 즉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시간과 역사를 내적 역사성에 의한 종합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내적 역사성이라는 것은 외적 역사성에 우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라는 것은 구체적인 종합이다. 어떤 시간의 단순한 이전에 현재 미래의 통합을 생각해야 한다.
이때 역사는 결국 인식하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변화(mutatio)가 이루는 개념이 아닐까? 상호매개사건 또 세계는 인간을, 인간은 세계를 서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 비판 ;그런데 이런 역사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과연 언급할 수 있는가. 또 그리스도교적 희망이 이런 역사 안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서 우리의 시도는 첫번째 우리 삶에 대한 진단이다. 역사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교호 (communicatio) 상호관계이다. 그런데 인간이 실제는 이런 역사 realitas historia, factum historia 역사적 실재 사건보다 더욱 더 위대하고 동시에 그것을 비약할 수 있는 초월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한편 역사 앞에서 인간은 이렇게 위대하지만 또한 무력할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구조를 생각해 보자. 인간의 위대함. 동시에 무기력-역사 앞에서, 구조 앞에서, 제도 앞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읽어볼 수 있다. 역사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제한받고 있는 인간의 한계성, 무능성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자유가 문제를 푸는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칸트는 자유를 위한 여백, 자유를 위한 세계를 이야기하면서 바로 이 자유때문에 그 자유의 확산으로서 하느님이 인간 자유의 근거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하나의 관건을 제공한다.
두번째, 역사의 위력 또한 무력의 변증법이다. 역사 안에 내재된 악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 철학에서 악은 단지 존재의 결핍 선의 결핍이라고 보는데 이는 정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은 존재의 전도된 의미라는 것이다. 악의 문제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역사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인간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 바로 악으로 만연된 현실이기 때문에 그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여기서 구원의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세번째, 역사는 자기 힘으로 완성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악은 인간에 대한 자기 모순이고 자기모욕이란 것이다. 폭력의 악순환때문에 역사는 쳇바퀴돌 듯 계속되는 것이다. 역사는 결국 자기 힘으로 완성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구원에 대한 힘이 요청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유한성, 역사현장에 제기되어 있는 악성,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여전히 이는 미해결의 숙제로 우리 안에 남아있다. 그래서 여기에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종말론적 희망을 제기하게 된다. 여기서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인간을 이야기하고 악을 이야기하고 또 구원을 실현시킨 예수의 위치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샤르댕과 같은 사람들은 여기에 그리스도 안의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라너는 나름대로 미래에서부터 위로 상승된다는 진화법칙으로 설명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가능성이 있다. 이런 자기초월을 ‘창조적’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 속에는 존재에 대한 징표와 암시가 있을 수 있는가. 필연인가 우연인가. 이런 문제와 함께 항상 희망 쪽으로 다가와야 할 우리들의 소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헛수고도 있다. 실망과 좌절 등.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인간의 한계성, 역사의 악성, 그러한 모순과 좌절과 실망 또 초월성을 모두 cover하는 존재이다.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성,위대성, 역사의 장단점, 희망, 실망,좌절, 또는 초월성이 이 모두를 자기 안에 실현하는 존재, 그럼으로써 총체적인 존재 역사의 집약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때문에 예수가 우리에게 있어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 대체로 인간의 문제, 역사의 문제로 총체적으로 접근을 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을 샤르댕은 이른바 오메가 포인트로 이해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말했듯이 영성의 마지막 단계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된 우리’라는 관점에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문제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의 위대함과 존재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예수를 역사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에서와 같이 세자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을 계속 예수 앞에 제시하면서 예수를 수락하도록 노력해야 한다.--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당신입니까?
구체적으로 우리 현실에 예수가 답이 될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것인가. 이것이 우리 시대에 찾아가야 할 그리스도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종합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집단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개별적 자유를 확인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택일의 근대적 사고방식에 내재하는 변증법 원칙에 의해 자유로 얻어진 결론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 안에서 자신을 능가할 수 있는 반면 또 자유가 인간을 특징지우는 연대적 요소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역사 안에서 유한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적 유한성에 대한 체험도 좀더 주체성 내지 보편적인 전체성을 극복하고 있는 독특성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자유와 한계라는 개념은 연결되면서 새로운 초월체험을 우리에게 가능케 해 준다. 거기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상승과 진전이라는, 도피로서가 아니라 유한이라는 한계와 악의 결실 혹은 그 악과 싸워 이기고자 하는 의지의 선택으로서 우리의 희망이 있다. 바로 이것이 결국 초월의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하나의 상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싹인 것이다. 즉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을 넘어설 수 있는 희망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향하게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론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지녀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기 존재를 자인하면서 의지의 선택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결단, 그것은 희망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과 연결이 가능하다. 이제 위와 같은 상황에서 역사적 예수를 찾아 가는 것이다.
2) 인 간 학 적 그 리 스 도 론
라너 : 인간을 하느님 지향의 절대 초월자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정신적 구조를 근거로 해서 다른 여타의 피조물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존재이다. 우주의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자신의 유래와 종말을 묻는 존재요, 현재로써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 그리고 만족과 충만을 찾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신 안에서는 자신의 최종적인 대답을 얻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자신의 완전한 행복, 완전한 충족을 그 자체 안에서는 얻을 수도 이룰 수도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리적으로 자신의 실존 전체와 함께 언제나 더 위대한 하느님의 신비를 지향하도록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고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갈 때만 인간은 자신을 능가할 수 있다. 즉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 자아 충족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인간학이고 인간학은 미완성 그리스도론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지향의 절대초월듸 도가 극에 달한 유일한 정점이다.
라너는 이 정식에 기초하여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론을 전개한다. 즉 만일 그리스도론이 인간학의 전무후무한 완성이라면 인간으로서 자기의 삶을 전폭적으로 수락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이미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자렛의 예수를 수락하고 만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론은 인간학의 하나로 타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몰트만은 “진실된 인간에 대한 언어는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라너는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을 견지하고 있지만 그 외의 신학자들은 그렇지 못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인간 모델의 하나로 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3. 인간학적으로 정향된 그리스도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
키에르케고르나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적 입장 = 하느님과 인간의 공백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심연으로서, 결국은 죄인인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없다. 오직 하느님의 Gratia로써 가능하며 거기에 인간의 Fides만으로 주어진다. 즉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가능하다.
가톨릭 입장 = 라너; “인간 안에 무한을 향한 염원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인간을 하느님에게로 elevatio시킬 수 있다.” 무한을 지향한 하나의 염원이라는 것은 인간이 초월을 향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 안에 초월 가능성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것을 가시적으로 실현시켜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ꡔ초월적인 그리스도론, 아래로터의 그리스도론ꡕ
⇒ 카스퍼 ; 무한을 향한다는 염원이 무한자체의 실재를 입증한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이의를 제기.
라너의 비신화화에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실제적인 상징이라고 하며, 이를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라너는 강생이란 인간을 보존하고 하느님을 스스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이며,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론이며 이는 또한 초월적인 그리스도론의 연장일 수 있다.
*비판 = 라너의 그리스도론의 내용은 인간의 사고, 혹은 실존으로부터 선험적으로(a priori) 그리스도론의 내용이 이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은 무엇인가라는 이의가 제기된다.
따라서 카스퍼는 라너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종합하는데
1) 라너는 그리스도교의 여러가지 상태(현상)에서부터 출발하고 았다.
2) 초월적 조건에 대한 반성(Reflexio)에 이르게 된다.
3) 그리스도 관념의 인간과 초월적 구조에 대한 상관관념임을 입증하게 된다. 이는 곧 그리스도 관념이 유일회적이지만 이웃과 상관관념 속에서만 이해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정리하면 다음 세 단계로 전개될 수 있다.
① 인간의 인식은 자신과 범주적 대상을 초월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곧 유한한 것을 유한한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벌써 무한한 것에 대한 어떤 선파악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이 실현될 때만 자유라는 것도 가능하다. 결국은 인간은 무한을 추구하면서도 인간이 선 자리는 가련한 자리이며 여기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자리이다.
② 인간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즉 무한을 지향하며, 유한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도 힘을 지니고 있는 ‘희망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역사를 통해 만난 하느님을 우리는 그리스도라 부른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으로서 구세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③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강생에 대한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결국 육화는 전무후무한 유일회적인 의미로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기 위한 구체적인 하나의 사건이요 장소이다.
인간학적으로 정향된 라너의 그리스도론은 역사적 그리스도교를 일방적 형이상학화하였고, 그 특수성이라는 걸림돌은 철학적 사변으로 제거한 것이 아니냐 하는 물음제기가 되며 따라서 라너에 대한 비판은, 인간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므로 상호주체성이라는 현상을 경시했다고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즉 라너는 보편적인 인간만을 이야기했을 뿐 구체적인 상황은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호주체성의 특징은 언어의 상통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나중에 라너는 초월성과 인간의 연관성을 융합하려고 시도한다. 역사적인 실재와 초월적인 가능성 안에는 항상 긴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으면서도 항상 긴장이 존재하는 구조적 긴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결국 라너의 약점은 무한한 염원에서 곧 무한실재가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한을 염원해도 결국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다. 초월의 가능성이 초월의 실현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J.E.Kuhn : 그리스도론은 초월적인 인간학만은 아니며 미결에 남아있다. 이 둘의 관계는 유비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유일회성이라는 것은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만 이런 역사성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이런 유비적이라는 설명 때문에 예수의 유일회성이 상대화될 염려를 배제할 수 있다.
발타사르 : 그리스도와 마리아와의 차이에 대해 반문. 마리아 역시 철저한 개방성, 헌신의 인물이므로 라너의 설명에 한계가 있다고 함으로써, 유비적 설명을 통해 같은 점이 있지만 또한 다른 점이 있음을 전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이 살아남을 수 있다.
슈트라우스 : 하나의 관념이 일정한 모양이 아닌 상대방을 보완해 주는 다양한 모형을 만들어내야 한다. 따라서 다시 신앙으로 되돌아가서 예수 안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겸허한 고백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다시 예수의 역사 속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제 2 장 예수의 선포와 그 메시지
1.기본 소재:하느님 나라의 오심
마르꼬는 예수자신의 메시지의 핵심을 전해주며 ( 마르 1,15- “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읍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마태오는 유대교의 표현으로서 하느님 나라 βσθλεθα 대신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 Rerum Dei ( 하느님 나라,통치,다스림 )
1) 무엇을 행할수 있는 자유와 권리
2) potestas ( 능력,권한,권세 ) - 원리(정통성의 의미)로서의 권한
3) auctoritas ( 권위 )
그런데, 예수는 하느님 나라 내지 다스림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해주지 않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만 하신다. 당시의 사람들도 - 바리사이,열성 당원,묵시문학계의 사상을 따르던 사람들 등 -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각기 달랐다.
자유주의 신학 : 하느님 나라를 일종의 최고선, 정신 및 자유의 왕국 정도로 이해 하였고, 슈바이쩌,바이스의 ‘일관적 종말론’에 의한 종말론적이며 묵시문학적 하느님 나라는 윤리적으로 이해되었고, 이는 정치 신학에로 형태가 바뀌며 하느님 나라를 정치적, 사회적 유토피아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 역시 하느님 나라 사상의 본래의 의미를 박탈한다.
그런데, 당시의 감수성으로 볼때 하느님 나라, 다스림의 개념은 지상에서는 일찌기 실현되어 본 적이 없는 어떤 의로운 지배자를 그리워하면서, 이 이상이 언젠가는 실현되리라고 기대했던 당대 유대인들의 희망을 총괄한 개념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임하면 부당하고 불의한 지배자로부터 해방되어 이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가 관철될 것으로 기대했다. (옛 근동의 여러 민족들에게 정의란 편파성 없는 공정한 재판과 판결이라기보다는 의지할 데 없고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보호하는 데 있었다.)
결국,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는 평화와 자유, 정의와 생명에 대한 인류의 갈망과 추구라는 지평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서 : 인간이 어떤 결정, 선택을 하기 전에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즉 인간의 어떤 원초적 체험을 표현하는데, 이러한 성서의 관점으로서 인간의 근원적 의망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약속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은 하느님만이 주시는 지금까지 있어 본적이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 즉 하느님 자신이며, 하느님의 다스림이란 하느님의 하느님이심, 그분의 주님이심을 뜻하며, 동시에 인간의 인간임과 세상의 구원, 악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설파하신 메시지의 기본 소재이며 그분의 인격의 비밀이다. 따라서 장차 임하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메시지는 그리스도론의 기본적 사변 내용이다.
2.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지리라는 성서의 희망은 유토피아나 역사적 법칙에 대한 직관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이 역사에서 겪은 구체적 체험이 유일한 근거가 된다. 즉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 나라는 이스라엘의 오랜 신앙 고백 ( “하느님은 왕이시로다”)을 추상명사로 바꾼 후기 유대교의 개념으로서 다스림 자체가 역사안에서 인정 받고, 관철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역사의 쓰라린 체험은 예언자 출현 이래 이스라엘의 신앙 의식을 종말론화하여 확대 하였고 어떤 새로운 계약을 희망하게 되었다. (묵시문학에서는 이 종말론적 희망을 초월화 시켰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성서적 이해를 결론하면,
1)종말론적 희망이 표현되어있는 성서의 기사는 장차 일어날 사건들의 사전 보도가 아니다. - 오히려 괴로운 상황에 처했을때의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다.
2)종말론적, 묵시문학적 언명들은 현재 및 과거에 겪었던 구원체험과 구원 희망을 완성이라는 양식을 빌어 다시 옮겨놓은 것이다.(선취적 표현) - 이것은 하느님께서 결국 세상의 절대적 지배자로 당신을 실증하시리라는 신앙의 확신을 표출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의 신뢰)
예수는 이 종말론적 희망이 지금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선포한다. 그는 하느님을 하나의 감춰진 현실로 이해했기에 비유 화법으로서 적절히 표현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다스림이 하늘 저 너머에 감춰져 있지 않은, 일상적인 현재안에 바로 지금 이자리에 (Hic et Nunc) 감춰진 것이다. ( P 125-126 인용문 참고 )
① 하느님의 미래는 현재를 향한 하느님의 외침이요, 현재는 하느님의 미래에 비추어 내리는 결단의 시간이다. 그것은 시간과 영원의 철학적 변증법이 아니라 성서 특유의 시간관으로 부터 출발해야 할것이다 (성서적 시간관 및 역사관의 첫 특징은 시간을 양적인, 계속적이며 규칙적인 선후계기가 아닌 질적 단위이다.). 즉 현재라는 시간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하고 있으며, 따라서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이 무르익었다는 사실로 해서, 그 질이 규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② 그런데, 예수는 혹시 하느님 나라의 임박을 기대함으로써 스스로 착각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
성서적 시간관 및 역사관의 둘째 특징은 임박 기대와 재림천연(再臨遷延) 사이의 긴장 관계를 말한다. 이는 M.Buber의 ‘사건화하고 있는 역사 ’라고 한 사실과 관련한다. 그에 의하면 역사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주고 받는 대화중에 일어난다. 하느님의 언약은 인간에게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 언약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방식은 인간의 결단,신앙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와 있다는 예수의 선포(사신)는 결단을 촉구하는 하느님의 제안이요 새로운 가능성이며 인간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 제안은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 신앙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제안은 현재의 상황을 종말론적인 결단의 상황으로 재규정한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한 거부에도, 이스라엘에 대해 하느님이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셨듯, 당신의 다스림을 확립하기 위해 다른길을 택하신다.
정리하면,
장차 임하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예수의 선포(사신)에는 어떤 의미의 잉여언약이라는 여백이 있었다. 그의 선포는 어떤 희망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 희망은 예나 지금이나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 희망은 하느님께서 정말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일 그때 가서야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 1고린 15, 28 ). 어떠한 그리스도론이라도 이 종말론적 긴장을 계속 팽팽하게 유지해야 한다. 이 긴장은 인간의 희망에 호응하여 전개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3. 하느님 나라의 신론적 성격
구약성서 및 유대교의 전통에서 하느님의 다스리심의 도래는 하느님 자신의 오심을 뜻한다. 그날은 바로 종말론적 희망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선포한 복음은 하느님의 다스리심으로써의 어떤 왕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종말론적 언명과 신론적 언명이 긴장 속에서(‘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병존하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다스리심과 주님이심을 재해석하였다.
이 새로운 해석은 먼저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아빠)라고 표현함으로써 드러난다. 아버지라는 개념은 권위와 지배자적 성격의 요소와 함께 하느님의 통치를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리심’으로 집약된다. 하느님을 이와 같이 아버지의 개념으로 과감하게 표상한 것은 하느님의 가까우심을 독특한 방식으로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라는 지위는 창조와 함께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구원혜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 즉 어린이다움은 하느님의 왕으로서의 통치를 보여주는 표지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예수의 신이해의 새로운 면모(신론적 언명)가 드러난다. 그것은 하느님은 사랑으로 인간과 가까이 계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표상을 신학적 의미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와 연관지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분의 지고함은 인간과의 거리를 둔채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사랑과 용서를 당신의 자유스러운 의향대로 베푸시며, 인간의 기대나 예상을 도외시한 채 선물로 전해주심으로써 역사하시는 주님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회개와 신앙이다. 즉 인간이 하느님에게 여백을 마련해 줌으로써 하느님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는 것, 하느님을 하느님이시게 하는 신앙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역사의 현실에서 구체화된다. 따라서 하느님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관념의 하느님이 아니라 역사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자유는 당신 자신을 남김 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확인되면서도 한편 당신 안에서 머물러 계신다. 이러한 은폐성이 하느님의 영광이 어떻게 세상에 나타나느가를 보여주는 특성이요 방식이다.
이와 같이 예수 당시대의 신관에 혁명적 수정이 가해진다. 즉 세상은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며, 자기 존재는 전폭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행동으로 옮겨져 하나의 현실이 되며 이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4. 하느님 나라의 구원론적 성격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이 세자 요한에게는 위협적 심판으로 나타나지만 예수에게는 구원의 제안이며 기쁜 소식이다. 이러한 조짐은 진복팔단에서 잘 나타나고, 이로써 현존하는 모든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다. 즉 예수의 진복팔단은 인간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의 소산이 아니며, 일체의 세속적 가치의 전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참여라는 행복은 가난과 겸손이 전재된다.
예수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편파성은 사회의 부정과 억압을 비판하던 아모스?? 호응한다. 그러나 에수는 가난을 그 자체로서 찬양하거나 부자들을 원천적으로 증오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이 세상으로부터 아무 것도 기대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나아가 당시 종교적으로도 소외(율법을 지킬 수 없었던) 되어 하느님께로부터도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 ‘복되다’라고 선포한 이 구원의 의미는 ‘하느님의 참여’라는 기대로 집약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참여가 저 세상을 미끼로 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달래려고 했다는 뜻이 아니며, 영적인 면만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예수의 치유 업적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의 현실로 이루어진 영육을 포괄하는 전인간의 구원사실이다. 즉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구원은 죄의 사면과 함께 현실적으로 잃은 것을 되찾는 기쁨이다. 이러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다.
이와 같이 구원은 일차적으로는 죄의 용서와 함께 자격과 공로 없이 무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기쁨에 있다. 그러나 자신이 무상으로 받음과 같이 무상으로 줄 것이 동시에 요청된다. 즉 상대방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사랑으로써 세상의 악을 정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은 생명이요, 자유이며, 평화이고, 화해이며 사랑이다. 따라서 인간은 개인에게서 벋어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질서와 구원을 회복한다.
이제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희망하는 우리들이 세상 안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명백해진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폭력이라는 길을 거쳐 세상을 개혁하고 인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정의의 요구를 포괄한다. 사랑은 누구나의 정의를 위하려는 정열적인 투신인 것이다.
출처 : 밀씨선교사 동문카페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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