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News

「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에디트 슈타인

뚜르(Tours) 2007. 10. 9. 00:28

        교회 안에서의 생활 개인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에 눈을 뜨면서부터 그의 책임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개인의 책임과 다른 공동체의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책임이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또 사실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지게 되어 있습니다. 책임은, 책임을 질만한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이 집니다. 다시 말해서 고유한 삶에 눈을 뜬 사람들, 그리고 첫 번째로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지게 됩니다. 우리는 인류 전체를 얻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습니다. 어떤 한 개인에 대한 견해와 판단은 대략 사람들이 생각하고 얘기하는 바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이런 견해와 판단은 가장 강력한 영향력 중의 하나를 발휘합니다 ….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기란 매우 힘듭니다. 견해와 판단은 틀림없이 개인들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 이것들은 바로 각 개인의 정신 속에서 주위의 영향 아래 다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을 인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합니다. 자유로운 행위들이란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 완수해야 하는 그 무엇이며,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방식으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어떤 태도들을 취할 때도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는 자기 자신과 모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혼자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호적인 책임은, 정말로 공동체적이 될 수 있는 모든 인생 경험보다도 더욱, 가장 높은 수준으로 공동체를 이룩하는 책임입니다. 이 책임위에 교회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공동체적 경험이 있습니다 …. 그러나 교회는 그 존재에 있어서 어떤 경험에 의해서도 특별히 은혜를 입고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단 한 분만이 하느님 앞에 있어야 하며, 하느님은 그분께 모든 사람을 위한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위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모든 사람"이란 말은 교회에 적합합니다. 하느님의 천상적 차원은 틀림없이 인류 모두에게 오는 것이며, 특히 그중에서도 선택된 민족에게로 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각 인간 영혼의 몫입니다. 각 영혼은, 임에게 충실하려고 애쓰는 약혼녀처럼 사랑으로 하느님의 주위에 모여들어야 합니다. 이 사랑의 추구는 영혼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벌침이 됩니다. 말 없는 전례典禮로 돌아오는 것, 이것이 나의 몫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필요한 만큼 받을 수가 있으며, 나는 그것을 매일같이 체험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이며, 그래서 우리 세상의 변화를 고려해야 합니다. 교회의 의무는 시대 속에 영원한 삶을 도입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교회는 각각의 시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시대를 그 특수성에 맞게 다루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교회에서는 모든 것이 환원할 수 없도록 영원하게 결정되어 있다'고 인정하는 원칙은 사물을 잘못 보는 방식입니다. 그런 방식은, 교회에는 역사가 있고, 그 역사는 인간적인 모든 것이 그렇듯이 점진적인 발전에 따라 인간적 성향으로 정착되어 왔다는 점을 순진하게도 소홀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발전 또한 투쟁의 형태를 자주 취해 왔다는 사실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눈에 보이는 교회의 경계境界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교회의 흔들리지 않는 성격은, 교회가 상황과 각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면서 유래없는 융통성을 영원함의 무조건적인 옹호와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직접적으로 옵니다. 어떤 사람은 신자가 아니면서도, 다시 말해서, 신앙의 기본적인 행위 중의 하나도 완수한 적이 없고, 더구나 그런 행동 중의 하나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면서도, 교리에는 매달릴 수가 있습니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 살지 않고, 교리와 일치하는 삶을 영위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 밖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은총을 내려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 이러한 가능성을 환기시키면서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갈 권리는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인간 공동체란 이미 특수한 개인들의 자유로운 집합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체질적인 동일성에 의해서 벌써 공동체에 가입할 수 있기 때문에, 훌륭한 의미에서, 이것이 교회의 초자연적 공동체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의 공동체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 결합이 우리의 내부에서 성장과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 . 이렇게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로 확장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단일성 안에서는 어떤 한 개인이, 현세의 삶의 공동체 안에서 이웃이 되는 사람들, 혹은 특히 교회의 기도에 그들 자신을 맡기는 사람들, 또는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 생활에 실제로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질 수가 있습니다. 특히 이상한 일은, 모든 인간을 고립시키고, 그를 자기 자신과 혼자서 대면하게 하는 것이 - 바로 이것이 자유가 되지만- 동시에 직접적으로 그를 다른 사람들과 떨어질 수 없게 연결지어주고, 또 그렇게 해서 진정한 공동의 운명을 구축한다는 점입니다. 각자는 자신의 구원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책임이 있고, 또 다른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구원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사랑의 자유로운 헌신으로 하느님께 속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 그것은 다만 몇몇 선택된 자들의 일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인의 과업입니다. 결혼을 했거나 안했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각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이 단 한 번이라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이를 두신 적이 있습니까…? 지상에서 보내신 생애 동안에 주님은 어떤 차이도 두지 않으셨고, (지금도) 정말 어떤 차이도 두고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총의 업적은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특정한 임무들을 위해서 특히 아주 많은 여성들을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기도는 영원히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 하신 기도를 원형原型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진정한 기도는 교회의 기도입니다. 다시말해서, 모든 진정한 기도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며, 그래서 기도를 하는 주체는 교회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정신은 문화를 창조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또 즐기기에 적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이 다양한 문화적 영역과 접촉하지 못하면 완전히 꽃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사람이 자신의 타고난 자질이 발휘되는 분야를 잘 아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그는 그가 무엇으로 부르심 받았는지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알아 볼 수 있는 작은 부분의 삶에만 국한되고, 실질적으로 표면에서 만져지는 채로있는 모든 것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그것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수록 자신에게 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들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아마 조금 더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존재를 특유하게 완성시키는 것,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 하느님과 함께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기 위한 행위, 그들의 존재를 완성시키기 위한 행위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이 모든 것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 에서 에디트 슈타인 著 / 이연행 譯 / 가톨릭출판사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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