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그 뒤안길

정조대왕의 후계

뚜르(Tours) 2008. 3. 24. 10:59

정조의 아들인 순조 입니다.

 

즉위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정조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비(妃)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이다. 1800년(정조 24)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804년까지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繼妃)인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폐위를 주장했던 동생 김귀주(金龜柱)를 비롯한 벽파(僻派)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時派)의 숙청에 주력했다. 또한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1801년 1월 오가작통법을 시행했으며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천주교 탄압은 그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을해박해)과 1827년에도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세도정치와 봉건왕조의 모순 심화
 
순조는 1804년 12월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일문이 장악했다. 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김이교(金履喬)·김조순·김문순(金文淳)·김희순(金羲淳)·김명순(金明淳)·김달순(金達淳) 등이 주요인물로, 이들은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세도정치로 뇌물수수 등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동김씨 일족에 줄을 대는 것이 지름길이 되었다. 이에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양반관료체제가 안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중간수탈의 가중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조세체계도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의 중간수탈이나 토호(土豪)의 세금 전가는 주로 일반 농민층에 집중되어 그렇지 않아도 지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경래(洪景來) 등이 부농(富農)·사상(私商)을 규합하여 봉건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더불어 1811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 항쟁은 무력에 의해 이듬해 진압되었으나, 정부는 사회경제적인 근본 수습책을 마련하지 않았으므로 이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세도정치 견제 시도
 
안동김씨 세도정권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순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했다. 1819년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을 삼은 것을 계기로 풍양조씨(豊壤趙氏) 일문을 중용했으며, 1827년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翼宗)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세자는 조만영을 비롯한 풍양조씨의 세력을 끌어들여 김노(金潞)·홍기섭(洪起燮) 등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하고, 김조순을 평안도관찰사로 내보내는 등 안동김씨를 멀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1830년 세자가 젊은 나이로 죽으면서 안동김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대리청정기에 정국을 장악했던 인물들은 유배되었으며, 순조의 안동김씨 견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뒤 안동김씨 일문은 풍양조씨의 협력을 얻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갔다. 순조는 재위 34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능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인릉(仁陵)이다.

 

순조(純祖, 1790년 ~ 1834년)는 조선의 제23대 임금(재위 1800년-1834년)이다. 는 공(蚣), 는 공보(公寶), 는 순재(純齋), 정식 칭호는 순조선각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윤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대왕(純祖宣恪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浚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大王).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과 함께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로 추대되었다. 정조(正祖)와 수빈(綏嬪) 박씨(朴氏)의 아들이다.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가 일찍 죽자 1800년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해에 정조가 승하함으로써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순조는 즉위 후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벽파의 핵심 권력자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정순왕후는 순조의 즉위 소식을 알리는 교지에서 척사를 내세웠다. 척사란 로마 가톨릭을 사학(요사스러운 학문)으로 단정하고 금지할 뿐만 아니라 탄압하겠다는 뜻이었다. 정순왕후의 로마 가톨릭 금지령으로 인해 200명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후에도 로마 가톨릭 박해는 한동안 계속되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804년 순조가 15살이 되던 해,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였다. 1805년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의 집안인 시파 안동 김씨가 집권하여 로마 가톨릭 박해는 다소 완화되었다.

안동 김씨 일가가 세도 정치를 시작하고 조정의 중요한 요직을 모두 차지하다 보니 정권이 부패하여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고 관리들의 타락이 심해져 갔다. 탐관오리가 백성을 수탈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민심이 흉흉해져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811년에는 홍경래가 난을 일으켜 평안도 일대를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무려 4개월 동안이나 관군과 싸웠던 민란군은 결국 1812년 4월에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후 조선 사회의 붕괴를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반란과 역모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천재지변과 전염병이 늘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물론, 이로 인한 농작물의 피해가 커서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1832년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 호가 충청도 해안에 표착하여 조정과 교섭하였다.

학문을 좋아했던 순조는 20권에 달하는 개인 문집 《순재고》를 집필하였으며 학문에 발전에도 힘을 기울이다가 1834년 11월에 45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인릉이다.

1827년 효명세자(익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대리청정 4년 만인 1830년에 22살의 나이로 죽자 왕세손(헌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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