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그 뒤안길

순조(純祖:조선 제23대 왕(1800~34 재위).)

뚜르(Tours) 2008. 6. 17. 09:20
 

 

개요

 

인릉 /인릉, 사적 제194호, 서울 ...
재위기간 동안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확립으로 국정을 주도하지 못했으며, 봉건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어 대규모의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름은 공(玜).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
즉위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정조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비(妃)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이다. 1800년(정조 24)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804년까지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繼妃)인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폐위를 주장했던 동생 김귀주(金龜柱)를 비롯한 벽파(僻派)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時派)의 숙청에 주력했다. 또한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1801년 1월 오가작통법을 시행했으며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천주교 탄압은 그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을해박해)과 1827년에도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세도정치와 봉건왕조의 모순 심화
 
순조는 1804년 12월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일문이 장악했다. 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김이교(金履喬)·김조순·김문순(金文淳)·김희순(金羲淳)·김명순(金明淳)·김달순(金達淳) 등이 주요인물로, 이들은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세도정치로 뇌물수수 등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동김씨 일족에 줄을 대는 것이 지름길이 되었다. 이에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양반관료체제가 안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중간수탈의 가중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조세체계도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의 중간수탈이나 토호(土豪)의 세금 전가는 주로 일반 농민층에 집중되어 그렇지 않아도 지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경래(洪景來) 등이 부농(富農)·사상(私商)을 규합하여 봉건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더불어 1811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 항쟁은 무력에 의해 이듬해 진압되었으나, 정부는 사회경제적인 근본 수습책을 마련하지 않았으므로 이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세도정치 견제 시도
 
안동김씨 세도정권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순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했다. 1819년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을 삼은 것을 계기로 풍양조씨(豊壤趙氏) 일문을 중용했으며, 1827년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翼宗)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세자는 조만영을 비롯한 풍양조씨의 세력을 끌어들여 김노(金潞)·홍기섭(洪起燮) 등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하고, 김조순을 평안도관찰사로 내보내는 등 안동김씨를 멀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1830년 세자가 젊은 나이로 죽으면서 안동김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대리청정기에 정국을 장악했던 인물들은 유배되었으며, 순조의 안동김씨 견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뒤 안동김씨 일문은 풍양조씨의 협력을 얻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갔다. 순조는 재위 34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능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인릉(仁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