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칼럼 <18> 지난 날의 5.16 군사쿠데타를 상기하며
지난 1961년 5월16일. 만 47년 후의 5.16을 맞게 된 이날 우연찮게 당시 자료들을 소개하는 기회를 갖게 돼 감회가 깊습니다.
당시 서울사대부중 2학년이었던 필자는 아침 등교했다 갑작스런 쿠데타 소식과 휴교조치를 접하고선 어리둥절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날 학교수업은 그대로 계속 됐지만, 어느 틈에 '재건'이란 구호가 유행처럼 사회에 회자돼 나갔지요. '재건'이란 담배도 나오고, 재건체조, '재건복(옷)'등이 등장했습니다. 또 학교 조회 때는 교사선창으로 전교생이 혁명공약을 외워, 복창해야했습니다.
이제 당시 자료들을 살피며 어쩜 그때의 한국사회상이 오늘의 북한현실과 그렇게 흡사한지요. 북한을 여러 차례 취재한 적이 있는 필자는 오늘의 북한 실상이 한국의 60년대 초반과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어 씁쓸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시 한국사회상을 나타낸 포스터, 플래카드 등 스타일도 비슷하고, 학생들을 곧잘 가도(街道)에 동원시키는 관습, 그리고 외국행은 왜 그렇게 까다로웠는지, 해외로 나갈 때엔 경찰서로부터 엄격히 신원조회를 거쳐야만 했지요. 가족안팎에 혹시 공산주의자가 연루 되었나를 확인하기에 바빴던 시기입니다. 오늘 북한이 못살면서도 배고픔을 해결키 위해 탈북 하는 주민들을 악착스레 잡아들이는 정치 환경과 마찬가지 맥락으로 생각됩니다.
5.16 군사쿠데타는 당시 2군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이 조카사위인 김종필 중령을 주축으로 하는 장교 250여명과 사병 3,500여명이 중심이 돼 이날 새벽 3시에 일으킨 군사정변입니다. 이들은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과 방송국 등을 점령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해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장악했지요. 5.16 혁명공약을 제시하면서 정권인수와 함께 의회해산, 항구와 공항폐쇄, 금융동결, 정치활동 금지 등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박 소장은 '민정이양을 한다'고 약속하곤 실제로는 3년간 군정(軍政)을 실시한 뒤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됩니다. 그런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관권(官權)선거'로 당선 됐지요. 이후 장기간 권력을 잡고 종신제 정권을 꾀하다가 결국 육사2기 동기인 부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손에 살해당하고 만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지난 62년부터 79년까지 제5대~9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장군의 장기집권동안 숱한 민주인사들이 투옥되고 간첩으로 몰려 살해당했습니다. 결국 종신집권을 위해 유신(維新)을 선포하고,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뽑던 유신시대는 한국정치와 언론의 암흑기였지요.
그러나 당시 박 대통령이 장기집권하는 동안 한국경제는 절대 빈곤에서 벗어났으며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했습니다. 그 이유로 오늘날 당시의 박정희 정권의 능력을 새삼 높이 평가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러나 5.16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한국경제는 계속 발전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는 80년대 말까지 세계경제가 호경기여서 대부분 국가들에선 경제 붐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당시 굴욕적인 한-일 협정체결로 제공 받은 일본의 자금을 경제개발의 밑거름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악명 높았던 전두환 정권 때도 세계경기가 좋았던 시절이라 경제치적 면에선 큰 덕을 보았지요. 이 때문에 오히려 전두환 정권시기 가장 잘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의 지구 온난화 현상 등이 세계 공통으로 해당되는 것과 같이, 세계경제도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5.16에 관한 분석이 상이하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견해가 언론인들 가운데 첨예하게 맞서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5,16 쿠데타로 인해, 반대로 본의 아니게 예편당한 많은 장교들의 억울한 사정(?)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한 예로 토론토에서 만난 육사 7기인 기운구 대령은 임의로 잘못 계산된 퇴직연수로 군인연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고 20년 이상 법정투쟁을 벌였으나 허사로 돌아 갔습니다. 61년부터 80년대 후반까지 20여 년간 군인이 정권을 휘두르던 세상이었으니 약자의 하소연이 파고들 틈이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5.16의 평가는 각자의 시각과 견해에 따라 긍정-부정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지만, 근 반세기의 세월이 지 난 오늘 새삼스럽게 박정희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일면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 5.16 당시 서울 시내 전경
* 남대문을 지나는 쿠데타 군 탱크부대
* 5.16 혁명 당시 거리에 주둔한 군인들
* 육사생도의 5.16 쿠데타지지 선서광경
* 육사생도의 거리행진. 곧 이어 공사생도, 해사생도들의 거리행진이 이어졌습니다.
참고 설명 - 편집자] 5.16 혁명이 성공하자 육군 사관학교 생도들은 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였습니다. 이 시가행진을 주도한 사람은 전두환이었습니다. 전두환은 5.16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전두환은 동료들을 소집, 우국충정의 정신으로 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장군에게 지지를 보내야 한다고 설득했고 이는 육사 생도들의 5.16 혁명 지지 시가행진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졌습니다.
박정희는 육사생도들을 이끌고 시가행진을 벌인 전두환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는 당시 대위이던 전두환에게 정치입문을 제의했지만 전두환은 군에 남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향후 전두환의 행보는 '정치'와 얽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 장면정권의 몰락. 5월 18일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면은 은신 중에 있다가 기자회견을 열어 정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 국가재건최고회의 청사
당시 이 건물은 초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 쿠데타 군인들로 이루어진 초대 각료선서
*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발표한 혁명공약(왼쪽)과 민정이양 선언(오른쪽)
* 김종필 기자회견(가운데)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하는 장면입니다.
* 박정희 장군 대장진급 기념 촬영
박정희는 1961년 11월 4일 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이를 기념해서 청와대에서 촬영을 했습니다.
* 맥아더 장군을 예방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회의 의장이던 박정희는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61년 11월 11일부터 25일까지 일본을 거쳐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박정희 의장은 11월 18일 맥아더 장군을 예방했습니다.
참고 설명 - 편집자] 미국은 박정희가 한국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데 대해 우려를 금치 못했습니다. 박정희는 1948년 여순 반란사건 당시 육군사관학교 내 공산주의 세포조직 지도자라는 혐의로 체포됐었습니다. 박정희는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동료장교들의 감형 운동과 박정희를 '매우 탁월한 군인'으로 생각하고 있던 美 군사 고문관인 제임스 하우스만의 적극적인 권유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감형을 받았습니다.
그 후 박정희는 우익으로 전향해 육군 내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넘기고 그들을 색출하는 육군본부의 정보국 장교로 활동했습니다. 이런 이력 탓에 미국은 박정희를 기회주의적인 인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박정희에게 퇴진압력을 가하는 대신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관철시킵니다. 미국은 우선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을 후원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민정(民政) 이양, 그리고 韓-日 국교정상화 압력을 넣었습니다.
* 25일 김포공항에서 행해진 박정희의 귀국인사
* 귀국 당시 박정희 의장 가도(街道)환영 장면
* 정치깡패들의 길거리 행진
5.16 직후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곽영주, 최인규, 신정식 등 이른바 '정치깡패'들은 혁명군에 의해 체포됐습니다. 이정재는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 법정에 선 정치깡패들의 공판 광경
* 범국민운동 시가행진
이 시가행진은 6월 12일 성북구청 주도로 이뤄진 주민들의 시가행진이었습니다.
* 5.16 이후 식생활 개선 구호를 담은 국민생활 포스터
* 5월 29일 덕수궁에서 쿠데타 군인들을 위해 열린 연예인 공연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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