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상식

동방교회의 역사

뚜르(Tours) 2008. 11. 13. 23:54

I. 동방교회의 역사

 


로마시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을 5개의 집정 관할구로 나누면서 예루살렘,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의 수좌 주교들은 다른 지역의 주교들보다 더 큰 권위의 위치를 공인 받았다. 이들 각각의 총 주교좌는 그 주변의 교회들을 지휘하며 거의 자립적인 블록을 형성하여 갔다. 또 각 지역의 민족의 풍습에 따라 나름대로의 전례와 규범들이 생겨나고 발전하여 나갔다. 이로 인해 점차 서로간에 알력이 생기고 분열의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863년 콘스탄티노플의 포시우스 총 대주교를 교황이 파문한 사건과 1054년 훔베르트 추기경이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대성당 제단에 던진 파문교서와, 이에 콘스탄티노플의 총 대주교 체룰라리우스가 선고한 로마 교황에 대한 파문사건은 교회의 돌이킬 수 없는 대 분열을 가져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갈라서게 되었다. 이후 양 교회는 몇 차례 일치를 이루고자 했으나 서로의 불신과 견해차로 천 여 년간을 서로 불목하며 지내왔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서로간에 대화와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다시금 일치로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교황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바오로 6세는 동방교회의 아테나고라스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와 만나 서로 간의 파문을 풀고, 공동 신학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일치에로의 장애물을 제거하고자 노력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동방 교회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의 명예상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든 단위 교회들인 <동방 정교회>이다. 둘째는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로서 주로 단성론자들과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인 <동방 독립교회>이다. 셋째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하에 돌아와 서방 교회와 연합해 있으며 자신들의 고유전례를 인정받고 있는 교회들인 <동방 가톨릭>이다.
 

II. 동서방 교회의 차이점

 


 1. 교리적인 면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동방과 서방 합동으로 합의하여 작성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중에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한다'라는 본래의 문구에 서방교회에서 '성자로부터(Filioque)'라는 말을 첨가하여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한다'라고 수정함으로써 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2. 행정적인 면

동방교회는 로마 교황의 명예상 우위권을 인정했지만 통치권적 수위권은 배척한다. 서방에서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 또는 교회의 머리로서 최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는 반면에, 동방교회에서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교회들이 모여 이루어지며 독립이 인준된 지역 교회들은 교회의 공동적인 업무들에 있어 독자적인 발언권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노플의 세계 총 대주교는 역사적 이유로 인해 다른 동료 총 대주교들 중에서 영예의 우위에 있지만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교회들에게 권한을 행사하지 못한다.

 

3. 전례적인 면

동방교회의 신앙에 있어서 성사는 절대적인 부분으로, 각 성사들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교회 생활과 전례에 있어서 예수의 부활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그들은 서방교회와 마찬가지로 7성사를 보존하고 있는데, 약간씩 차이점을 보인다.

a.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동방교회에서는 초대 교회의 관습대로 침례로 세례성사를 베푸는데, 세 번 물에 완전히 담근다. 이어 즉시 주교가 아닌 일반 사제에 의해 견진성사가 거행된다. 그리고 도유된 부분의 기름을 닦아 낸 후, 새 영세자의 머리를 십자방향으로 조금 잘라내는데, 이는 새로 영세 받은 사람이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함을 상징한다. 이어 새 영세자는 즉시 성체와 성혈을 함께 영한다.

b. 성체 성혈성사
동방교회는 성체성사라는 말보다 성체성혈성사라 한다. 즉 매 주일마다 거행되는 성찬예배 때 양형으로 영하는데 어린 아기도 영한다. 그리고 성찬식에 사용되는 제병은 서방과 달리 누룩이 들어 있는 빵을 사용하고 있다.

c. 고해성사
사제는 고해자의 개별고백을 들은 후 고백자의 머리 위에 에삐트라힐리온(사제용 영대)의 한끝을 얹고 사죄경을 외우는데 서방과 달리 "... 생각과 말과 행실의 모든 죄를 사해주소서" 라고 한다.

d. 신품성사
기혼자에게도 서품을 준다. 그러나 독신자가 부제서품을 받은 이후에는 결혼을 할 수 없으며, 기혼자가 상처를 했을 경우에는 재혼을 할 수 없다. 따라서 독신사제와 기혼사제의 두 부류가 있으며 주교는 독신사제 중에서 선임되며 기혼자인 경우는 상처한 경우에 일정한 기간 수도생활을 한 사람이어야 가능하다.  
 

III. 성화상 파괴 논쟁

 


5세기와 6세기에 걸쳐 그리스도교 신자들 중 많은 이들이 그림을 통해서 영적인 하느님께 대한 거리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우상 숭배의 위험을 염려하여 신자들의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또한 인간을 하느님의 한 형상으로 보았다. 즉 그리스도는 본성이 하느님과 가까운데 비하여 인간은 다만 그 외모만 하느님과 가깝다. 따라서 이콘들에 묘사된 그림들도 원상의 모상이므로 원상에 유사한 점을 고려하면 원상의 한 몫을 차지한다고 간주하는 신 플라톤 철학에 의거한 회화사상이 이러한 목판에 그려진 그림들에 다시 전용되었다.

 

1. 파괴의 시작-레오 3세

691년과 692년에 걸쳐 개최되었던 트룰란(Trullan)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함을 규제하였다. 교회의 이러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성화상(이콘)에 대한 문제가 다시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레오 3세 황제는 726년 성화상을 논박하기 시작하였고 잇달아 성화상과 성화상을 공경하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우상숭배를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서 제국의 일치를 이루고 절대적 군주가 되고자 하는 야심으로 교회를 자신의 권위에 굴복시키려고 이콘 공경자들을 박해한 것이었다. 그는 군대에 의한 폭력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콘스탄티노플의 총 대주교도 지조 없는 아나스타시우스로 교체하여 그의 동의를 얻어 730년 성화상 파괴에 대한 칙령을 반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성화상 논쟁이 일어났고 비잔틴 왕국을 멸망 직전에 이르게 했으며 84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이콘들이 파괴되었고 이콘 공경자들은 박해를 당했으며 수많은 이들이 그로 인해 순교까지 당해야 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2세와 그의 후계자 그레고리오 3세는 이콘 파괴의 중지를 요청하고, 이콘에 대한 파괴와 비방의 행위에 파문의 벌을 부과하였다.

 

2. 파괴의 가속-콘스탄티누스 5세(741-775)

그러나 레오 3세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 코뿌로니무스 치하의 동방에서는 이콘에 대한 박해가 더욱 격렬해졌다. 그는 754년 히에레야에서 이콘 공경을 반대하는 주교들 338명을 모아놓고 공의회라 명명하였다. 그러나 총대주교는 아무도 참석치 않아 공의회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 회의에서 황제는 자기의 원의에 따라 성화상 파괴를 재가받았고 이콘 공경은 사탄의 행위요, 새로운 우상숭배라고 선언되었으며 이콘 공경의 옹호자들을 파문하였다. 이후로 제국의 모든 주교는 동의를 해야 되었으며 성화상은 모든 교회에서 제거되어야 했고, 벽화와 모자이크에는 석회칠을 했고, 그 자리는 세속적인 풍경화로 대치하였다. 이러한 조처에 용감히 반대한 것은 거의 수도자들이었다. 그로 인해 761년이래 수도자들은 무자비한 박해를 받아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고, 또 많은 수도원은 몰수되어 무기고등으로 바뀌었다.

 

3. 파괴의 완화-레오 4세

이후 콘스탄티누스 5세의 아들 레오 4세 치하에서는 좀 완화된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역시 전대의 형법이 존속하고 있었기에 신고가 있을 때에는 형이 집행되곤 했다.

 

4. 공경으로의 전환-콘스탄티누스 6세와 이레네 황후(780-790)

레오 4세의 사망 후 어린 새 황제의 섭정을 맡게 된 이레네 황후는 이콘을 공경했고 또 그로 인해 추방당한 일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충실한 콘스탄티노플의 총 대주교 타르시우스의 도움으로 하느리아누스 1세 교황과 일치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787년 가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약 350명의 주교들은 754년의 시노두스의 결정사항을 배척하고, 옛 전통에 의하여 십자가, 그리스도, 천주의 모친, 천사와 성인들에게 촛불/향 등과 함께 무릎을 꿇어 정성껏 공경할 수 있고 또 해야함을 선언했고, 그럼에도 참다운 흠숭은 오직 하느님께만 합당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결의는 이후 약 30년동안 비잔틴 제국에 지속되었다.

 

5. 파괴의 재시작 -레오 5세, 미카엘 2세, 테오필루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 레오 5세(813-820)는 815년에 성화상 파괴를 다시금 명령하였고 754년의 성화상 공경 반대의 결의를 다시금 복귀시켰다. 이어 콘스탄티노플의 니체포루스 총 대주교가 해임, 추방되었으며 또다시 수많은 수도자들이 처형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이후 미카엘 2세, 테오필루스 황제 때도 계속되어 거의 30년이나 지속되었다.

 

6. 다시 공경으로의 전환-미카엘 3세와 테오도라 황후

테오필루스 황제의 미망인인 테오도라 황후는 어른 아들의 섭정이 되어 메토디우스 신임 콘스탄티노플의 총 대주교의 도움으로 843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이콘 공경을 다시금 인정케 하였고 그리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사순절 첫 주일을 "정교주일"로 정하였다. 대영광송, 삼성송(세 성인)으로 주님을 찬양하면서 성화상을 높이 치켜들고 행렬을 하는 이 기념축일은 오늘날까지도 보존되고 기념되고 있다. 의식 중에 사제는 제 7차 세계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의 기록을 큰 소리로 낭독한다. "예언자들이 본대로, 사도들이 가르친 대로, 교회가 이어받은 대로, 교부들이 가르친 대로, 온 세상의 교회가 합의한대로, 거짓이 쫓겨난 대로, 지혜가 떳떳하게 전파한대로, 그리스도가 치하하신 대로,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생각하며, 말하며, 전파하라. 그분의 성인들의 말로, 저서로, 명상으로, 성제로, 성당에서 성화상으로 공경하라.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공경하며 경배하라. 그리고 또한 그분의 성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사자들로서 연관적으로 공경하라." 이렇게 성화상 논쟁 이후 깊은 종교적 감동, 강한 영성과 절제에서 나온 모습의 이콘들이 나타났다. 이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에서 의해 멸망할 때까지 이콘의 표준이 되었다.
 

IV. 이콘의 장식

 


 이콘을 공경하고 애호하는 마음에서 그림 자체를 지극히 존중하고 특별한 취급을 하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이콘의 가장자리나 혹은 화면 전체를 값비싼 귀금속이나 금은 세공으로 장식하였다. 이콘을 보석으로 장식하는 습관은 비잔틴의 영향을 받아 다양하게 러시아 각처에 전파되었다.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혹은 어떤 도시가 위험에서 구출되었음을 감사하는 마음에서 이러한 화려한 이콘들을 기증한 것이 그 발생원인이었다. 중세 이후로 러시아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형식의 이콘 장식기술이 나타났다.

 

1. 바스마

화면 전체를 그대로 두고 이콘의 가장 자리 부분을 문양이 세공된 가는 은판으로 못질하여 붙이는 것을 말한다.

 

2. 리사

화면 뒷배경과 전체의 가장자리를 혹은 인물의 피부 부분만 빼놓고, 즉 얼굴과 손만 남기고 은판으로 된 덮개에 그림의 나머지 세부적인 부분, 건물, 산수, 의복 등을 그대로 본따서 망치로 두들겨 타출세공 기법으로 제작하였는데, 이러한 은판으로 된 덮개는 뛰어난 수공품이었다. 후에는 값이 싼 금속으로 덮개를 만들기도 했다.

 

3. 포드리지에 이코네

19세기 말 경에는 포트리지에 이코네라고도 불리는 리사가 나왔는데 인물의 얼굴, 손과 발등만 화가가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공장에서 타각기로 여러 벌을 찍어낸 금속판으로 덮어 씌웠다.
 

V. 이콘의 유형

 


1. 오란스(Orans)

이 유형의 성모님의 자세는 두 팔을 위로 벌려 들어올리시고 기도를 드리시는 모습인데 아기 예수는 묘사되지 않는다. 이러한 성모님의 자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있어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구약과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던 기도의 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도 이러한 자세로 기도했고 초대 교회사람들도 그러했음을 카타콤바의 벽화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제들도 미사 중에 이러한 자세로 기도를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초세기부터 알려졌던 오란스형으로 그려진 성모 이콘은 4세기경에 비롯되었는데 그후 성모 이콘의 전형으로 그 시원적인 주제가 되었다. 이 이콘은 많은 동방교회의 성당들의 지성소위에 만들어지는 작은 반원형의 돔(Apsis)에 많이 그려지는데 이 작은 반원형의 돔은 성당 중앙의 커다란 돔과 이어져 있어 중앙 돔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되어 하느님이 나라와 지상을 일치시키는 분이시며 하늘의 문이라고 칭해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a. 플라티테라(Platitera)

오란스형의 성모는 '플라티테라'라고도 불리는데 이러한 호칭은 옛 찬가의 다음 구절에서 근거한다. "가브리엘은 찬미합니다. 기뻐하라 동정녀여! .... 당신은 하늘보다 넓은 분(Plati tera ton ouranon)이시며, 창조주를 품으신 분이십니다."

 

b. 뽀크로브시카야(Pokrobskaya) -보호자이신 성모

역시 오란스 형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성모가 들어올린 두 팔에는 오모포리온(동방교회의 주교용 영대=서방교회의 빨리움)이 걸쳐져 있다. 이러한 성모의 이콘은 그 기원을 콘스탄티노플에 두고 있다. 10세기 경 그곳의 블라케르넨 성당에서 성모께서는 '그리스도 안의 어리석은 자'를 자처하던 성 안드레아(?-956)와 에피판니우스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오모포리온을 펼쳐 보이시며 나타나셨다고 한다. 이 때 성모는 세자 성 요한과 복음사가 성 요한, 그리고 몇몇 성인들을 대동하고 계셨다. 이 발현을 본 안드레아는 성모께서 성인들과 함께 기도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중재와 보호를 우리에게 선물하심을, 오모포리온을 우리들 머리 위에 펼치심으로써 보여 주셨다고 하였다. 따라서 러시아말로 "뽀크로브스카야"라는 말은 바로 "보호"라는 뜻으로 이 이콘의 이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이콘을 기념하는 축일인 10월 1일은 또한 가수였던 로마노스(5세기) 축일이기도 하여 이 이콘의 하단 중앙에는 지성소 앞의 이콘 칸막이(이코노스타시스) 앞에 로마노스가 서 있는 모습을 그려 넣는다. 이 이콘은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나 러시아에서는 각별히 기념하여 곳곳에 뽀크로브스카야의 성모께 봉헌된 성당들을 볼 수 있다.

 

2. 즈나메니에(Znamenie), 빠나기아(Panagia) - 표상의 성모, 계시의 성모

이 이콘은 성모의 여러 이콘 중 가장 존경받는 이콘의 하나로 성서의 다음 말씀에서 기원하였다. "주께서 몸소 표징을 보여 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이 이콘도 오란스의 모습과 같이 기도하는 자세로 그려지나 가슴에 광륜(Mandola or Nimbus-신성한 빛과 영광, 하늘을 의미함)이 그려져 있고 그 안에는 그리스도 임마누엘께서 한 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축복을 내리고 계신다. 따라서 임마누엘께서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장대함을 표현한 것이며, 성모와 동일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고통중의 인간에게 축복을 주는 형상이다.

이 표상의 성모 이콘은 두 종류가 있는데 상반신만 묘사되는 것을 '즈나메니에'라고 하고, 전신이 묘사되는 것을 '빠나기아'라고 한다. 전신상은 13세기까지 러시아에서는 그리 널리 사용되지 않았으나 반신상인 표상의 성모는 노브고로드 화파에서 즐겨 그려진 이콘이었다. 또 이 이콘의 뒷 배경에는 성모님 양옆으로 빛나는 세라핌 또는 때때로 다른 천사들이 그려지는데 이는 '세라핌 보다 비할 바 없이 영화로우며 케루빔 보다 더 고귀한' 성모님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콘은 대개 독자적으로 보존되기보다는 이코노스타시스(지성소 앞의 성상대)에서 구속을 기다리는 구약의 예언자들의 중심부에 그려지거나 지성소 위의 반원형 천장에 그려지는데 이는 신성한 육화에 대한 구약 예언서의 정점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되어져온 내용을 묘사하는 이 이콘은 매우 표상적인 이콘으로 '표상의 성모'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 표상은 신성한 육화의 핵심이고,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본성상 인격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현시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의 현시인 것이다.

12세기에 자유 도시 노브고르도라는 도시는 수즈달 군의 공격을 받을 때 이 표상의 성모 이콘을 성벽에 걸고 성모의 도움을 청했다. 이때 수즈달 군인들은 시력을 잃고 대패하였다. 그래서 표상의 성모는 특히 노브고르드 시에서 공경을 받게 되었고 시의 문장이 되었다.

 

3. 호데게트리아(Hodogetria-길의 인도자이신 성모)

이 이콘은 성모님과 예수님이 곧은 자세로 정면을 향하고 계시고 예수님이 한 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또 한 손은 강복을 주시는 자세로 그려진다. 아기 예수의 오른손 엄지와 무명지는 축복을 내리시는 권위를 상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희랍어 약자를 형상화하고 있다. (오늘날도 동방교회의 성직자들은 이처럼 엄지와 무명지로 십자표를 그으며 강복을 준다). 그리고 왼손에 들고 계시는 두루마리는 말씀(Logos)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님 옆의 IC, XC는 희랍어 '예수 그리스도'의 약자이다. 또한 성모의 상단 좌우에는 '천주의 모친'의 희랍어(          )의 약자(  -  )가 쓰여 있다. 예수는 이 이콘에서 더 이상 젖먹이가 아니며, 영원한 하느님으로서 비록 어림에도 불구하고 지혜로 가득 차 있고, 그의 옷은 영광으로 가득 찼으며 금사로 짜여져 있다. 그리고 시선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성모님은 똑바로, 몸을 곧게 하고 있고 위엄이 있으며 그녀는 아들을 향한 친밀감의 표현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성모님의 오른손은 가슴 위로 올려진 모습으로 기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수여의 자세이기도 하다. 즉 천주의 모친께서는 그녀에 의해 이 세상에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계신다. 또 그러한 모습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는 성서 구절을 상기시킨다. 이 이콘의 기원은 성 루가에 의해 최초로 그려졌다고 하는 비잔틴 전승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에 따르면 복되신 천주의 모친께서 이 초상화를 보시고 '이 그림과 함께 언제나 나의 축복이 있으리라'고 하셨다 한다. 루가는 이 성화를 안티오키아의 그가 가장 존경하던 테오필로에게 자신의 복음서 사본과 함게 보냈다고 한다. 그 후 5세기 중엽 이 성화는 에브도키아 황후에 의해 조심스럽게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는데, 이는 그녀의 시어머니 플케리아에게 선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후 이 호데게트리아 이콘은 이콘 형식의 한 전형으로 받아들여지고 이 원본을 본 따서 여러 가지의 이콘들이 그려지게 되었는데 그 이콘들은 각 지방의 전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한 것들 중에 한 가지를 예로 들면 아래와 같다.

 

* 스몰렌스크의 성모(Smolenskaja)

스몰렌스크의 성모 이콘은 호데게트리아의 비잔틴 이콘에서와 같이 격식을 갖춘 자세로 오른팔에 똑바로, 그리고 높이 아기예수를 안고 있다. 그리고 성모의 좌우로 상단 모퉁이에 대천사들이 그려지는데 이는 미카엘(오른쪽)과 가브리엘(왼쪽) 대천사이다. 스몰렌스크의 호데케트리아(축일 7월 28일)은 성 블라디미르의 부인인 안나가 그리스에서 러시아로 가져왔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같은 이름의 비잔틴 공주가 1046년에 체르니코프의 베볼로드와 결혼하여 가져왔다고도 한다. 브라지미르 모나키라는 작가에 의하며 1101년에 스몰렌스크의 주교좌 성당에 이 이콘이 있었다고 한다. 스몰렌스크의 성모 이콘은 비잔틴의 호데게트리아의 고전적 타입과 가장 밀접하게 닮았다. 천주의 모친과 아기 엠마누엘의 위엄있는 자세는 똑같다. 우리를 주목하는 장엄한 자세도 같다. 그리고 섬세한 천주의 모친의 머리 부분과 우아하고 품위있는 목 부분 등은 3개의 별(하나는 이마 위에 그리고 두 개는 양 어깨 위에 - 때로는 별이 두 개인 경우도 있음) 장식된 베일로 씌워져 있다. 여기서 3개의 별은 영원한 동정성의 상징이다. 즉 예수를 낳기 전에도, 낳는 동안에도 낳은 후에도 동정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별들은 거의 모든 성모 이콘에 그려진다.

 

* 티츠빈의 성모(R-Tichibinskaja)

티츠빈의 성모의 특징은 비잔틴 호데게트리아의 형태가 많은 변화를 겪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임마누엘의 얼굴을 더 이상 정면으로 신자들을 향해 있지 않고 약 1/3정도만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임마누엘은 그의 어머니 왼쪽 팔 위에 아직도 매우 똑바른 자세로 앉아 계시며 오른쪽 다리는 금 줄무늬가 없는 단순한 옷 위에 포개어져 있는데 한 발은 발바닥을 보이고 있고, 나머지 한 발은 앞을 향해 뻗어 있다. 그리고 팔은 장엄함이 덜한 축복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성모님의 머리는 아기 예수께로 조금 숙여져 있다. 그러나 시선은 아기 예수가 아닌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 이 모든 성모의 전체 몸가짐은 타락한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그녀의 아들 앞에서 중재하고 있는 자비로운 어머니를 보여주며, 슬프고 우수에 잠긴 얼굴을 표현하고 있다. 이 티츠빈의 성모도 1383년 이래로 러시아에서 존경을 받아왔다. 전승에 의하면 이 성화의 원화는 1383년 러시아의 타츠빈카 강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곧 이 성화상이 발견된 곳에는 교회가 세워졌고 후에는 수도원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성화상은 1613년 스웨덴의 침입으로 여러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 수도원의 파괴를 면하게 하였으며 스웨덴과의 평화조약을 맺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 까잔의 성모(R-Kazanskaja)

성모님과 예수님은 상반신만 묘사되는데 성모님은 머리를 왼쪽으로 숙이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것 같고, 예수님께서는 정면을 바라보며 똑바로 서 계시며, 오른손만이 강복 주시는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왼손과 성모님의 양손은 묘사되지 않는다. 이 이콘의 출현에 관한 기적이야기는 고대 러시아 연대기와 러시아 성인전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1579년 모스크바에서 500마일 거리에 있는 볼가강 유역의 한 도시 카잔에서 성모님께서 한 소녀에게 여러 차례 꿈속에 나타나셔서 이 성화상이 묻혀 있는 장소를 가르쳐주며 당국에 알리도록 명하셨다고 한다. 성직자들과 지방관들은 이러한 메시지를 믿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결국 그 어린 소녀와 어머니는 성모님께서 일러주신 장소를 파 이 이콘을 발견해 내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달려와 카잔의 대성당으로 화려하고 장엄하게 옮겨 모셨다. 그 후 이 이콘은 표트르 대제에 의해 1710년 쌍크투스 페테르스부르그로 옮겨졌고 그 후로 숱한 기적들이 일어나 더욱 러시아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제정 말기까지 큰 공경을 받았다. 특히 1612년 10월 22일에는 폴란드로부터 모스크바를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1812년 스몰렌스크의 성모 이콘과 함께 나폴레옹과 싸우던 러시아 군대에 패배하여 물러나자 온 러시아인들은 카잔의 성모께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고자 대성당을 건립했다. 그러므로 카잔의 성모는 러시아에서는 국민적 승리를 가져오는 이콘으로서 존경을 받아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족시켜주는 기적의 이콘으로서 17세기 이래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공경을 받고 있다.

 

4. 자비의 성모(우밀레니에, R-umilenie, 엘레우사, G-eleousa)

어머니로서의 마리아가 아기를 다정하게 감싸 안은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런 유형은 9세기 혹은 10세기에 비잔틴에서 처음으로 생겨났다. 아기 예수가 성모님의 얼굴 가까이 몸을 대고 포옹하고 있는 것과 성모님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에서 깊은 애정이 나타나는 것이 전형적이 모습이다.

 

* 블라디미르의 성모(R-Bladimirskaja)

이 이콘의 특징적인 묘사는 성모와 아기 예수의 자세이다. 오른쪽 팔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는 아기를 향해서 다정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고, 한편 아기 예수도 자신의 볼을 어머니의 볼에 맞대며 어머니의 목을 오른손으로 감고 무엇인가를 구하는 듯, 속삭이는 듯이 보인다. 즉 이 이콘은 어머니와 아기가 내면적으로 깊이 하나로 얽힌 것이 여느 다른 성모화 보다도 월등하게 표현되어 있다. 성모의 눈은 아기 예수의 인간성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Logos)인 성자의 신성에로 향하여 있다. 성모의 겉옷(마포리온)의 두개의 별은 앞서 호데케트리아 유형에서의 세 개의 별과 달리, 즉 머리의 별은 영지(英智, 上智)를, 한쪽 어깨의 별은 마음의 열정을 표현한다. 이 '우아한 사랑을 의미하는 자비의 성모' 유형에 속하는 성모상은 역대기에 의하면 처음에는 예루살렘이 있다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고 12세기에 이르러 러시아 키로프 교외의 한 수녀원에 옮겨졌다가 1155년에 성모 자신의 발현을 통해 블라지미르의 거리로 옮겨져 모셨다. 그후 1395년에 안드레이 보고리스키 공에 의해서 모스크바로 옮겨져 타타르인과의 싸움에서 일종의 군기의 역할을 하며 러시아인들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국난에서 이 성모님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으므로 러시아에서는 일년에 3회, 즉 5월 21일, 6월 23일, 8월 26일에 블라디미르의 성모를 기념하여 러시아의 수호자로 모시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이콘은 11-12세기경에 비잔틴에서 그려졌고, 16세기에 일부가 수정되었으며, 최근에는 제대로 보존이 되지 않아 그 동안 수차에 걸쳐 복원작업이 있었으므로 12세기 본래의 것은 성모님과 예수님의 얼굴 및 옷의 일부분 뿐이다.

 

* 톨가의 성모(R-Tolgaskaja)

역시 자비의 성모 유형에 속하나 이 이콘의 특성은 아기 예수가 성모의 무릎 위에 서서 힘차게 성모를 껴안고 있으며, 성모는 옥좌에 앉아 있는데, 전신상 또는 반신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좌우로 천사들이 옹위하고 있는 모습도 그려진다. 성모님은 구세주의 수난을 미리 알고 얼굴에 슬픔이 가득하고, 아니 예수는 성모님의 무릎에 서서 성모의 위로와 사랑을 구하고 있다. 이 이콘은 성모님께서 야로슬라브의 주교 브로호르에게 이러한 영상으로 나타나셨으며, 이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던 그 장소에는 1314년경 톨가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이를 기념하며 이 성화를 그려 봉헌하였다.

 

* 돈의 성모(R-Donskaja)

자비의 성모 유형에 속한다. 얼굴에 우울함과 위엄은 없지만 어머니와 아기가 깊은 애정으로 서로 사랑함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다른 이콘들과 다른 특징은 아기 예수의 두 다리가 가지런히 모아져 있고, 무릎 위까지 옷이 걷어져 있다. 전승에 의하면 원래의 이 이콘은 돈 지방에 있었으나 1380년 드미트리 돈스코이 공이 모스크바로 가져와 타타르인들에 대항하여 러시아를 승리로 이끈 데에 그 기원과 중요성을 두고 있다.

 

* 꼬르순(R-korsunskaja)

이 유형은 성모님과 예수를 부분적으로만 묘사하며 앞서 보았던 자비의 성모 이콘의 친밀한 성격이 더욱 강조되고 있으며, 특별하고도 강한 모성을 강조하고 있다. 성모님의 얼굴은 엄숙함보다는 친밀함과 따뜻함이 가득하다. 양손으로 아들을 꼭 껴안고 있는 성모님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부드럽고 청순하게 응시하며 우수에 잠겨 있다. 거룩한 아기는 오른손으로 성모의 마포리온의 가장자리를 잡고 자신을 향해 끌어당기며 성모의 뺨을 맞대고 누르고 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두루마리를 잡고 있다. 이는 하느님의 지혜가 이처럼 인간의 세상에 출현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어머니의 돌봄과 애정이 필요한 무기력한 아기의 앳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콘의 이름은, 988년에 영세한 거룩한 군주 블라지미르에 의한 오래된 연대기에 의하면 꼬르순이라는 고대의 작은 읍(항구 : 그리스어로 케르소네수스)의 이름에서 왔다 한다. 이 항구를 통하여 그리스의 이콘들이 러시아로 전달되었기에 일반적으로 그리스 이콘들을 꼬르순 이콘이라 불렀다.

 

5. 수난의 성모(R-strastznaja)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우리에게는 '수난의 성모' 보다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로 더 잘 알려진 이콘으로 왼쪽 위의 미카엘 대천사는 해면에 꽂힌 막대기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을 들고 있고, 오른쪽 위의 가브리엘 대천사는 십자가를 들고 있다. 아기 예수는 그들을 보며 놀라 두려움에 떨며 몸을 돌려 어머니 품으로 피난하고 있다. 그러한 화급함을 묘사하기 위해 예수님의 한쪽 신발이 벗어져 매달려 있음을 그렸고, 어머니는 예수님 쪽을 향해 약간 머리를 기울이며 슬픔에 찬 표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이콘은 시실 계통에서 제조되기 시작하였다.

 

6. 승리의 성모(G-Nikopoia)

이 이콘은 "하느님께서 그분의 무릎을 옥좌로 삼으셨다"라는 전례서의 글구에서 기인했으며 천상에서 영광을 누리는 천주의 모친의 모습으로 431년 에페소 공의회 이후 성모공경의 교의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이콘으로 보급되었다. 이 성화는 주로 그리스 지역에서 볼 수 있으며, 러시아에서는 보기 어렵다.

 

7. 기타 성모

 

* 세 개의 손을 가진 성모

이 이콘은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에 관한 전설과 관련된다. 그에 따르면 모반죄로 탄핵되어 누명을 쓴 요한은 오른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에 요한은 성모 이콘 앞에서 하느님께 자신은 무죄이며 자신의 문필로 성화 공경을 위하여 계속 투쟁할 수 있도록 잘린 손을 다시 돌려주도록 기도 드렸다. 그러자 그의 잘린 손이 팔에 다시 붙었고 그때부터 요한의 팔목에는 빨간선의 흔적만이 남게 되었고, 요한의 감사의 표시로 은으로 만든 손을 자신이 기도하였던 이콘 앞에 기증하였다 한다.

 

* 데에시스의 성모 (최정오 역편, [마리아 사전], 계성출판사, 1990)

하늘을 향해 손을 뻗치고 서 계시는 마리아,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는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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