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상식

[스크랩] [성금요일]주님 수난 예식, 가상칠언, 자비의 기도

뚜르(Tours) 2010. 4. 25. 15:14

[성금요일]주님 수난 예식♬ECCE LIGNUM  



The Fresco Cycle (View of the Cappella Maggiore)-PIERO della FRANCESCA
1452-60.Fresco. San Francesco, Arezzo


성금요일
Good Friday
Venerdi Santo - Passione del Signore
4월9일.celebrazione mobile


초기 교회부터 이날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한 십자가 고통의 재현하고 봉헌한 ’비애의 날’이었습니다.
1955년 이후, 성금요일에 부여된 가장 적합한 공식명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금요일」입니다.
이전까지는 ’파스카를 위한 준비의 금요일’로 불리웠습니다
성금요일 전례에 관한 가장 오래된 증언은 4세기 말 예루살렘에서 발견됩니다
에제리아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성금요일은 순례지를 돌며 기도하는 날로서
신자들은 성목요일 저녁에는 올리브 동산에서 게세마니로,
금요일에는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다락방에서 골고타 언덕으로 옮겨가며 기도했고
이때 주교는 교우들이 경배할 수 있도록 십자가 나무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 순례 지점에서 사람들은 수난에 대한 예언서들과 복음을 읽고 시편을 노래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성금요일은 로마 전례에서 미사가 봉헌되지 않는 유일한 날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완성하신 인류 구원의 기쁨이 지극한 충만에 달하는 부활성야를 위해 유보된 것입니다.

이날의 전례는 말씀 전례로 시작하여 영성체로 끝이 나며, 그 중간에 장엄한 십자가의 경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처럼 이날은 요한이 전한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습니다.
그리고 이날의 ’신자들의 기도’는 다른 날과는 달리 사제가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여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신자들의 기도가 끝이 나면, 부제는 자색보로 가려진 십자가를 사제에게 건네고
사제는 십자가를 받아서 보자기를 벗기면서 ’보라 십자 나무(Ecce lignum)’를 노래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모두 와서 경배하세(Venite, adoremus)’로 화답을 하게 됩니다.
이 예절이 세 번 반복된 후, 신자들의 십자가 경배가 이루어집니다.

이 예절이 갖는 의미는 우리 구원의 성스런 표징인 십자가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며 나아가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이라는 신비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라는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이룩하신 구원의 승리를 묵상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지나간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라는 표징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히 구원과 부활의 희망의 빛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려 계시던 십자가 위에는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INRI)’라는 명폐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사람이 의도한 잔인한 역설이 이제는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역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 날은 슬픔만이 지배하는 날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십자가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이는 기쁨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ICON]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북러시아 화파. 16세기. 파리 국립미술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장면의 묘사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각기 다른 모양으로 조각되거나 그려졌다.
서방교회는 주로 요한 복음의 수난사에 따라 그린 반면
동방교회에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마태오 복음의 수난사에 대한 강론에서 영감을 받아 조직적이고 상징적으로 그렸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서있으며,
그들 뒤에는 거룩한 부녀들과 백부장, 군인들,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군중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마리아를 향해 숙여진 예수의 얼굴은 지극한 고통중에도 고귀한 위엄과 평화를 지닌 표정을 짓고 계신다.
이는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분의 몸은 죽음 안에서도 부패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디다.

십자가 아래에는 골고타 동굴이 열려 있는데 이는 죽음과 지옥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상징한다.
이 동굴에는 아담의 해골이 보인다.
전승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가 구원해야 될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무덤위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이것은 구약의 아담과 신약의 아담이 연결됨으로써, 죽음을 불러온 첫 아담이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된것을 표현한 것이다.

십자가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건축물은 예루살렘 성벽이다. 당시의 모든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역시 성벽 바깥쪽에서 고통을 받았다.
즉, 예수의 시신이 도시, 성전 그리고 박해자들을 불결하게 만들지 않도록 도시 밖에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또한 영성적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6세기 경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밖에서 수난하신 것처럼 이 땅 위에는 차지할 도성이 없고,
다만 앞으로 올 도성을 바라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벽을 헐고 나아가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히브리 13,12-13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문 밖으로 그분께 나아가 그분의 치욕을 겪읍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팔이 달려 있는 횡목은 하늘을 배경삼고 있다
이렇게 창공에 놓인 십자가는 악의 세력에서 온 우주을 해방시킨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우주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모는 왼손으로는 망토를 쥐고 오른손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내밀고 있다. 그녀는 비탄의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반대편의 요한은 영적인 공포와 번민으로 가득차 오른손으로 얼굴을 쥐고 왼손은 십자가를 향하여 내밀고 있다.
성모의 뒤의 여인은 왼손으로 자기 뺨을 만지며 통곡하고 있다. 요한 뒤의 터반을 쓴 사람은 백부장 론지노스이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히심의 이콘’은 천상에로의 창문이 되며,
우리를 그 당시의 사건에 참여하도록 초대하며 구원의 신비와 결합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주여,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주의 후사에게 강복하시고
믿는 자에게 원수에 대한 승리를 주시고
십자가로 보호하소서.

사순 제3주일 조과 십자가 아뽈리띠끼온 중.

*이콘.신비의 미.(교회 미술아카데미.장긍선신부 편저)에서



[ICON] Crucifixion - XV c., Andrej Rublev Museum, Moscow

성 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죽음을 깨닫는 것은 삶을 아는 것


사람은 ’태어났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자신이 태어날 때 스스로 동의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렇게 사람의 생명은 인간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듯이 또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생의 한 가지 절차이다. 필연적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알지 못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분명하지만 그 때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 또한 아니다.
죽음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거두시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필연적이다. 누구나 분명하게 겪어야 하는 절차이다. 또한 삶과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
자신의 의지로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자기 죽음의 때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며, 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왜 사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삶을 이해하려면 죽음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삶과 죽음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살아있으면서 삶의 의미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어본 적도 없으면서 죽음을 깨달을 수 있는가?

교회는 일년 연중을 지내면서 죽음을 자주 묵상한다. 특히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성월(11월)과 위령의 날(11월 2일)이 그렇다.
성인들의 축일도 모두 그들이 죽은 날이다. 곧 하느님 나라에 새로 태어난 날로 이해한다. 특히 인간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날이 있다.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성삼일을 지내는데, 그 첫째날인 성금요일이다.
교회는 이 날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죽음을 당하셨고, 그 죽음으로 부활의 새 생명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이렇게 죽음의 의미는 생명을 지향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이셨기에 인간이 당하는 온갖 고통과 죽음까지도 그대로 다 맞이하신 것이다.
그 죽음을 묵상함으로써 참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① 죄의 결과는 고통이며 고통은 죽음을 가져온다.
인간이 저지른 모든 죄, 인류의 모든 범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당하셨다.
② 죽음으로 생명을 가져다주신다.
예수님께서 몸소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직접 행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묵상이다.

죽음,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커다란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래서 초세기 교회 때부터 성금요일 전례를 매우 깊이 있게 기념하고 거행하였다.

4세기말 예루살렘에서 성금요일은 순례지를 돌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날이었다.
먼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을 거행하셨던 다락방에서 기도한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채찍질을 당할 때 묶였던 돌기둥이 있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한다.
또 골고타로 자리를 옮겨서 기도하는데, 신자들이 경배할 수 있도록 십자가 나무를 보여주고,
각 순례지점마다 신자들은 수난에 관한 예언서와 복음을 읽고 시편을 노래하며 기도하였다.

7세기에 와서는 제대 위에 십자가를 현시하고 말씀 전례를 거행한 다음, 십자가 경배와 친구를 하였다.
이어 주님의 기도를 합송하고 십자가를 경배하며 성체를 영하였다. 이렇게 오늘날 성금요일 전례의 틀이 잡히게 된다.

성금요일의 전례는 시작예식 없이, 간단한 경배와 기도를 하고, 말씀 전례, 십자가 경배, 영성체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말씀 전례’는 ’우리 죄 때문에 상처를 입으신 구세주’(제1독서, 이사 52-53장)와
’예수께서 복종하는 것을 배우심으로써 당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제2독서, 히브 4-5장)는 내용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 죄를 대신하는 구세주이심을 밝혀준다.

복음은 요한의 수난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드라마틱하게 입체 낭독함으로써 현장감 있게 생생하게 주님의 죽음을 묵상한다.
아울러 보편 지향 기도(신자들의 기도)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무엇이며,
우리가 실천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죽음의 의미를 우리 생활 안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십자가 경배’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는 절정에 속한다.
이 경배 때 우리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 그리고 수난과 죽음의 절정으로 보여주신 크나큰 사랑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금요일은 그야말로 대단식의 날이다. 금식과 금육으로 몸을 비우고 따라서 마음을 비운다.
주님 부활의 새 생명을 향하는 관문인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 날 우리의 죽음도 함께 묵상하고 우리의 삶을 되살려보자.

(나기정 다니엘/신부·대구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경향잡지 2002년 3월호에서)



No. 35 Scenes from the Life of Christ: 19. Crucifixion-GIOTTO di Bondone
1304-06.Fresco, 200 x 185 cm. Cappella Scrovegni (Arena Chapel), Padua


주님 수난 성금요일(금식과 금육)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신’ 이 날에 교회는 주님이며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한다.
그리고 십자가를 경배하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시작된 교회의 탄생을 기념하고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한다.

교회는 매우 오랜 전통에 따라 이날 성찬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 예식만을 거행한다.
본래 이날의 전례는 말씀 전례가 중심을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 예식이 도입되어 오늘과 같은 전례를 거행하게 되었다.
십자가 경배는 4세기 말 예루살렘을 순례했던 에테리아 (그 이름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데,
처음에는 실비아라고 불리었으나 후에 에테리아 또는 에제리아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가
서방 교회에 알려 8세기 초에 로마예식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주님께서 수난하신 다음 부활하실 때까지 금식을 지키기 위하여 영성체를 하지 않았다.
그 뒤 성목요일에 성체를 모시는 관습이 들어왔으나 전례 개혁 전에는 집전 사제만이 성체를 받아 모셨다.
모든 교우에게 영성체가 허용된 것은 1955년에 있었던 전례 개혁 이후이다.
(가톨릭홈에서)

*성 주간.Holy Week (인창동성당게시판1696번) 참조.
*성모 칠고 묵주기도.(인창동성당게시판1657번) 참조.



      The San Damiano Cross



♬ECCE LIGNUM (십자가 경배 권고)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성 금요일 십자가 경배 예식중
사제가 십자가를 보여주는 예식을 거행하며
신자들에게 십자가 경배를 권고할 때 부르는 성가입니다.
사제의 권고에 신자들은 "모두 와서 경배하세."로 응답합니다.

[출처] [성금요일]주님 수난 예식♬ECCE LIGNUM |작성자 진주

 


가상칠언(架上七言).

1. 가상칠언(架上七言)의 의미.

예수께서 수난과 고통을 받으시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가지의 말씀이란 뜻으로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 합니다.

2. 가상칠언(架上七言)이란?

2.1. 루가복음 23장34절 :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서도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또 아버지께 인간의 허물을 용서하시도록
구원을 청하신 내용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본받아
용서하는 마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깨우쳐 주신 말씀입니다.

2.2. 루가복음 23장43절 :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형 당하실 때, 죄를 범하고 사형 당하는
두 죄인 중 우도의 회개를 받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진실로 회개한 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기 위하여서는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겸손이 요구됩니다.

2.3. 마르코복음 15장34절 : "엘로이, 엘로이 레마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누구든지 고통은 두렵고 멀리 피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물론 고통은 힘든 것이나 자기 완성과 성화를 위한 길이 되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한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2.4. 요한복음 19장26-27절 : "어머니,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요한에게) "보시오, 당신의 어머니이시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셨는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고
우리는 마리아를 힘있는 전구자와 보호자로 모시고 사는
행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2.5. 요한복음 19장28절 : "목마르다."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은
육신적 고통과 목마름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인간의 구원에 대한 갈망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구원에 대한 갈망으로
예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열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6. 요한복음 19장30절 : "다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 구원의 완전한 실현이었으며
인간이 맞이해야 하는 죽음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 이루신 생애는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과 자기봉헌, 신앙과 순명,
인내와 용서, 그리고 희생 등의 성덕의 실현이며
완성인 것으로 우리 신앙과 삶의 완전한 모델인 것입니다.

2.7. 루가복음 23장46절 : "아버지,
제 명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하느님께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우리도 아버지께 돌아갈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아버지 손에 맡긴다는 기도로써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 를
깊이 묵상하고 깨달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자비의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문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2000년 들어 첫번째로 시성하신 파우스티나 수녀님이 쓰신 내용입니다.

 우리의 이웃들에게 좀 더 자비로운 사람이 되도록 서로 노력하여 봅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자비의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

"오 주님, 저의 눈이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시어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남을 의심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제 이웃의 영혼안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
그들의 구원이 되도록하게 하여 주소서.

저의 귀가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시어
제 이웃의 필요에 주의를 두며
그들의 고통과 신음에 무관심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오 주님, 저의 혀가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시어
결코 제 이웃에게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모두에게 위로와 용서의 말을 하게 해 주소서.

오 주님, 저의 손이 자비로워지고 선행으로 가득차도록 도와주시어
이웃에게 오직 선한 일만을 하며
더욱 어렵고 고된 임무는 제 자신이 떠 맡도록하여 주소서.

저의 발이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시어
제 이웃을 돕는데 재빠르게 하여 주시고
제 자신의 피로와 권태를 극복하게 하여 주소서.
저의 참된 휴식은 제 이웃에 대한 봉사에 있습니다.

오 주님, 저의 심장이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시어
제 이웃의 모든 괴로움을 제가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저는 제 마음을 아무에게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며
저의 친절을 악용하는 그 사람에게도 충실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극히 자비로우신 성심안에
제 자신을 잠궈두겠습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가 제 위에 머무르게 하여 주소서.(일기 163)

오 저의 예수님, 저를 당신 자신으로 변형시켜 주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기 163)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있는 자비의성모 수녀원으로


하느님 자비의 사도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님이

생활하며 하느님 자비의 메시지를 받았고

순명하신 자비의 성모 수녀원 옛 성당.


최근에는 유럽을 비롯하여 여러 성당에서

 

고난의 십자상 대신 자비의 상을 제대에

모신다고 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출처 : 세계를 읽어주는 나뭇잎숨결
글쓴이 : 나뭇잎숨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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