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의 영광

[스크랩]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뚜르(Tours) 2010. 4. 25. 15:22

황사영 백서 (黃嗣永 帛書)



죄인 도마 등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주교님께 호소하옵니다.

지난봄에 그 곳에 갔던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와 주교님께서 안녕하시다는 소식은 잘 들었습니다만 그 후 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 이미 해가 저물게 된 이 때도 기체 만안하신지 살피지 못했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주교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주님의 넓으신 은혜를 충만히 받으사 덕화가 날로 높아지실 것이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여 마지 아니하옵니다.

죄인 등은 죄악이 많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의노를 범하고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 아래로는 사람들과 의논조차 못한 채 박해만 크게 일어나게 하여 그 화가 신부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리고 죄인 등은 이 위기에 처하여서도 스승과 함께 목숨을 버려 주님께 보답하지도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감히 붓을 들어 우러러 호소하리이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교가 전복될 위기에 처하여 있고 백성들은 물에 빠져 죽는 고통을 겪고 있으나 어지신 아버지를 이미 잃은지라 그를 붙들고 부르짖을 길이 없고 진실한 형제들은 사방에 흩어져 서로 의논하고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주교님께서는 온정 깊은 부모를 겸하시고 사목의 책임을 지셨으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극도에 달한 고통 속에서 우리들은 다른 누구를 불러야 하겠습니까.

이제 박해의 전말을 대강 아뢰고자 하오나 그 일이 일어난 지가 이미 오래 되었고 또 그 실마리가 하도 복잡하여 한꺼번에 진술하기가 어려워 다음에 자세히 적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살펴 주옵소서.

현재 교회 사정은 말이 아니옵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죄인이 요행 화를 면하였고 요왕이 아직 발각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나라에 주님의 은총이 아주 끊어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오호 죽은 사람들은 이미 목숨을 바쳐 성교를 증명하였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이오나 재능이 적고 힘이 약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두 세 명의 교우가 비밀리에 모여 당면한 문제들을 의논한 결과 그동안 속에 품었던 사정을 일일이 아뢰오기로 하였으니 읽어 보시고 이렇듯 외로운 자들을 가엾게 보시어 조속히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기를 바라옵니다.

죄인 등은 마치 양떼가 흩어져 달아나듯이 어떤 이는 산골로 도망쳐 숨고 혹은 떠돌이가 되어 길에서 헤메면서도 울음마저 터뜨리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습니다.

실로 목이 메고 가슴이 쓰라리고 뼈가 저려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주님의 전능과 넓으신 사랑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님의 도우심을 정성들여 빌어주시고 자비의 정을 크게 베푸시어 저희들을 이 물불속에서 건져주시고 가족들과 함께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해주옵소서.

오늘날 성교가 온 세상에 널리 퍼져 그 성덕을 노래로 읊지 아니 하는 이 없고 그 영적 감화를 기뻐하며 흥겹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는데 이 먼 끝에 사는 백성들이라고 해서 어찌 주님의 자식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지방이 멀고 궁벽하여 가장 늦게 성교를 들었고 또 그들의 기질이 약하여 고통을 견디기가 어려운데다 10년 동안이나 갖은 풍파로 눈물과 불안 속에 지냈기에 금년의 박해는 얼마나 참혹한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이 어찌 이토록 극도에 처해질 수가 있습니까.

이 난이 비록 끝난다 하더라도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으면 예수의 거룩한 이름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이쯤 미치고 보니 간장이 서늘합니다.

중국과 서양 교우들이 우리들의 이 위기와 고통을 듣는다면 어찌 동정하지 아니 하리이까.

감히 바라옵건대 교황께 자세히 아뢰시어 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쓰셔서 세계 각국에 알려 주님의 박애정신을 본받은 성교회가 그 공동체 의식을 드러내어 죄인들을 간절한 희망이 채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죄인들은 가슴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려 울며 이 어려운 사정을 피력하오며 목을 늘이고 발돋음을 하여 오직 반가운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립니다.

주교님께서는 죄인들이 드리고 싶은 말씀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함을 가련히 여기소서.

을묘년(一七九五)에 주문모 신부를 잡으려다 놓친 후부터 선왕의 의심과 두려움은 날로 깊어져 남모르게 수사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신부의 잠적을 알아내지 못하자 조화준이라는 자를 시켜 겉으로는 교우인 체 꾸며 충청도 일대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여 드디어 기미년(一七九九) 겨울 청주에 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충청도의 열심한 교두들은 거의 다 잡혀 죽었습니다.

최 도마 필공은 중인 계급의 사람으로서 성질이 곧고 의지가 굳세고 정의로운데다 재물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열심이 대단하여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풍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유년(一七九一) 박해때 불행히 유혹에 빠져 배교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왕이 몹시 기뻐하여 그를 장가들게 하고 벼슬까지 주니 도마는 하는 수 없이 다 받아들이긴 했지만 근년에 와서는 집에 돌아와 있으면서 과거의 잘못을 몹시 뉘우치며 항상 몸을 받쳐 속죄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미년 八월에 선왕이 뜻밖에 그를 형조로 불러 들여 “네가 아직도 사학을 받드느냐?”고 물으시매 도마는 자기가 바랐던 대로 ‘이제야 죽게 되었구나.’ 하고 충효에 대한 성교의 도리와 자기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심정을 솔직히 진술하였더니 그 말이 빛나게 밝고 위엄이 있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그러자 법관은 몹시 놀라고 분통이 터져 진술사항을 그대로 임금께 보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왕은 다시 더 형벌을 내리지도 않고 아무런 판결도 없이 그냥 석방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들이 왕께 상소문을 올려 도마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역시 모호한 대답을 내려 그를 포용하는 뜻을 보여 일은 그 정도에서 가라앉았습니다.

리 말딩 중배는 소론의 一명(첩의 자식의 칭호)으로 경기도 여주에 살았는데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고 지조가 쾌활하였습니다. 원래 김건순과 생사를 같이 하리만치 가깝게 사귀어 왔었는데 건순이 성교를 믿게 되자 말딩도 그를 따라 믿고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불같이 뜨거웠고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대담하게 행동했으며 남들이 자기의 믿음을 눈치를 챌까봐 무서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경신년(一八OO) 부활축일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 마을 교우들과 길가에 모여앉아 높은 소리로 희락삼종(부활절에 바치는 三종경)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또 술을 마시고 나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는 놀이를 날이 저물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원수진 집의 밀고로 그는 한사람의 교우들과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교우 중에는 마음이 약한 이도 있었지만 말딩의 격려와 권면에 힘을 입어 혹독한 형벌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모두 한결같이 버티어 끝내 석방되지 못하고 다들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말딩은 본래 의술을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정통하지 못하였는데 옥에 갇힌 후 혹시 병에 대하여 문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런 다음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하여 주어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명성이 크게 퍼져 멀고 가까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옥문 밖은 늘 장날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고을 군수도 금할 도리가 없었고 자기도 병이 나면 와서 약 처방을 얻어 갔습니다.

이래서 옥중 살림이 구차하지 않았습니다.

김건순은 사람들이 혹시 말딩의 병 고치는 능력을 물으면 칭찬이 너무 과하다 할까봐 열 명중에 여덟 아 홉 명은 고친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사람도 효험을 보지 못한 이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루는 감옥의 관리가 의서를 좀 보여 달라고 하니까 그는 “내게는 의서는 없소. 다만 천주님을 공경할 뿐이요. 당신도 의술을 배우고 싶거든 천주님을 믿으시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옥리가 “책들은 다 불태워 버렸는데 무엇으로 배운단 말이요?‘ 하니 말딩은 웃으면서 ”내 가슴속에 있는 불타지 않는 책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계몽하여 교회에 나오도록 하기에 족하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함께 갇혀 있던 원요왕에게는 한 늙은 여종이 있어 늘 옥에 찾아와 돌보아 주면서 집안의 따분한 형편을 늘어 좋으며 배교하기를 꾀었었는데 요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번은 할멈의 말이 하도 처참하고 간절하여 요왕도 번민을 하며 마음의 동요를 느꼈습니다.

이것을 알아 챈 말딩이 그 할멈을 노려보았더니 할멈은 겁이 나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물러가고는 다시는 옥에 찾아오지도 않고 후에 이생원의 눈빛이 하도 무서워서 다시는 못 가겠다고 하더랍니다.

말딩은 옥중에서도 늘 책을 베끼고 경문을 외며 진리를 설명하여 사람들을 권유하였는데 간수 한 사람도 감화되어 교를 믿었으며 나중엔 매우 열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권철신은 남인측 대가의 자손으로서 경기도 양근군(오늘의 양평군)에 살았는데 그는 평소에 경서와 예서로 세상에 이름난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온 가족이 다 믿고 따랐습니다.

본시 이름 난 집안이라 남들의 비방도 대단하였습니다.

그 아우 일신이 신해년(一七九一)박해에 죽고 나서부터는 감히 계명을 터놓고 지키지 못하였는데도 그를 원수같이 취급하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심하여 을미년(一七九一) 여름에는 드디어 그의 고향의 고약한 귀신같은 놈들이 터무니없는 죄를 꾸며 관청에 고발까지 하게 되었고 이에 권씨 집안의 자체들도 맞서 대항하게 되었으므로 사건은 장차 크게 벌어지게 되었는데 마침 그 고을 군수가 현명하게 처리하여 싸움은 거기서 중재되었고 고발 내용이 사실 근거가 없다는 것도 판명되어 간교한 모략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간교한 모략을 비밀리에 계속하여 서울에 있는 악질 관리들과 결탁하여 경신년(一八OO) 五월에는 선왕을 직접 뵙고 “양근땅에는 그 고을에 사학이 한창 성행해서 아니 배우는 사람이 없고, 안 믿는 동리가 없는데도 군수란 자는 태평세월로 사찰조차 아니하니 이 군수를 마땅히 징계해야 한다.” 고 아뢰었습니다.

선왕이 그 보고를 듣고는 옳다고 판단하여 양근 군수를 인책 사임시키고 새 군수를 부임시키니 그는 부임하자 곧 묵은 사건을 끄집어내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러자 늙고 겁이 많은 철신은 서울로 올라가서 잠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가두었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벌을 대신 받겠다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군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기어이 철신을 불러들이려고 하여 사건은 오래도록 종결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선왕은 성교에 대하여 의심이 많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그는 본래 무슨 사건이든 크게 확대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신부 사건은 두 나라 사이에 관계되는 일이라 만일 드러나면 그 처리가 매우 곤란하겠으므로 을묘년 후 여러 신하들이 성교를 엄금하라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일체를 말단 관리들에게 내맡기고 자기는 간섭하지 아니한 것처럼 보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지방의 박해는 비밀 지령이 아닌 것이 없었고 일부러 아니한 체한 것은 교우들의 마음을 늦추어 놓고 몰래 신부를 체포하여 암암리에 결말을 지으려고 했던 것인데 미처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여삼은 본래 충청도 사람으로 삼형제가 다 성세를 받고 박해를 피하려고 서울로 이사와 살고 있었는데 여삼은 근년에 와서 냉담을 하고 배교까지 하더니 부랑자들과 어울려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두 형들도 이것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리안정이라는 사람도 역시 충청도 사람으로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재산이 약간 있는 자로서 여삼이와는 사돈간이었습니다.

여삼은 가난하여 늘 안정에서 돈을 좀 돌려주기를 바랐지만 안정은 그가 달라는 대로 다 들어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삼은 늘 안정에게 원한을 품고 이를 갈고 있던 중 그는 안정이가 늘 성사를 받고 있음을 눈치 채고는 ‘만일 신부가 안정에게 재물을 내게 좀 나누어 주라고만 한다면 거절하지 못할 테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는 그 말은 신부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안정이가 재물을 나누어 주지 않자 이것은 신부가 안정에게서 부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트집을 잡아 이젠 그 분풀이를 신부께로 돌려 모략으로 해치고자 신부의 동정을 살펴 포도부장에게 밀고를 했습니다.

五~六년 동안나 수사를 해도 알아내지 못했던 신부의 정체가 알려지니 이 말을 들은 포도부장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들은 일이 성공하면 너를 봉급이 많은 관직에 추천해주겠다고 하며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신부는 골롬바의 집에 있었는데 여삼이는 이것까지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부장더러 “아무 날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면 알려주겠다.” 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삼이는 약속한 날이 이르기 전에 다른 사람의 집에 갔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집에 돌아올 수 없게 되어 부장은 헛걸음만 하였습니다.

다행히 한 교우가 이 사정을 알고 신부에게 알려 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서 안정더러 돈 수십 냥 쯤 가지고 가서 여삼이와 화해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삼의 원한과 분노는 잠시 누그러졌고 또 며칠 안 되어 국왕이 세상을 떠나매 각 관청에선 일이 분주하여 사건은 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삼은 이미 신부를 밀고한 뒤요 또 자기로서도 이제는 어찌 할 수 없게 되어 늘 악질분자들과 어울려 음모를 꾸며 기어코 흉악한 짓을 끝까지 저지르고야 말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 나라의 양반들은 二OO년 이래 당파가 생겨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남인, 노론, 소론, 소복의 네 당파가 있는데 선왕의 말년에 남인이 또 두 파로 갈라져 그 한파는 리가환, 정약용, 리승훈, 홍낙민 등 몇몇 사람들로서 이전엔 모두 천주교를 믿었으나 목숨을 아껴 배교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는 몹시 성교를 해치는 척 했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믿음 속에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은 수가 적고 그 세력이 외롭고 위태로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은 홍의호, 목만중 등 진짜로 성교를 해치는 자들인데 一O년 이래 양편은 서로 깊은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노론도 또 갈라져 두 파가 되었는데 시파(時派)라는 것은 모두 임금의 뜻을 받들어 선왕의 신복의 신하가 되었고 벽파라는 것은 모두 당론을 고수하여 임금의 뜻을 항거하므로 시파와는 원수같이 지났으나 당원이 많고 세력이 크므로 선왕도 두려워하였고 근래에는 온 나라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리가환은 문장으로 세상을 뒤흔들었고 정약용은 재주와 기지가 누구보다도 뛰어 났으므로 을묘년 이전에는 선왕이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나 을묘년 후로는 차차 멀어져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벽파에서는 이 두 사람을 몹시 꺼려하여 기어코 해치려고 했습니다.

가환 등이 배교하고 성교를 해치는데도 벽파에서는 그를 사당으로 몰고 별 병 중상과 공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번번이 그들을 감싸주므로 벽파에서 마음대로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선왕이 돌아가시자 그 뒤를 이은 임금은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하게 되었는데 대왕대비는 선왕의 계조모요, 본래 벽파 출신으로 그의 친정이 일찍이 선왕에게 폐가 당했던 터이라 여래 해 동안 품었던 원한을 풀길이 없다가 뜻밖에 정권을 잡게 되자 벽파를 끼고 학정을 펴 경신년(一八OO) 十一월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한쪽으로 시파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 조정을 반이나 비게 하였습니다.

또 전부터 선교를 박해하던 악당들은 벽파와 계속 서로 연락을 취해 왔었는데 세태가 크게 변하자 요란스럽게 들고 일어나 큰일을 저지를 기세를 보였습니다.

경신년 四월에 여러 교우들이 명도회에 가입한 후로 신공을 부지런히 하고 회원 아닌 사람들은 움직여 자진하여 모두 남을 감화시키는데 힘을 썼으므로 그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회두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는데 부녀자가 삼분의 이요, 무식한 평민이 삼분의 일이고, 양반집 남자들은 이 세상의 화가 무서워서 믿고 따르는 자들이 극히 적었습니다.

을묘년(一七九五) 박해때 골롬바는 신부를 보호한 공이 컸고 재능이 출중했으므로 신부는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고, 골롬바 역시 열심히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또 그는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벼슬하는 집안의 부녀들이 입교하는 예가 아주 많아졌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법이 역적이 아닌 이상은 양반의 집안 부녀자에게는 형벌이 미치지 않으므로 금령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신부도 이점을 이용해서 선교를 널리 현양할 근거를 삼고자 하여 그네들을 특히 후하게 대접하매 교회안의 대세는 모두 부녀자 교우에게로 돌아갔고 이러한 인연으로 선교의 소문이 또한 널리 퍼졌습니다.

성교가 이 나라의 큰 정책 문제로 되어 있으므로 새 임금이 즉위하면 반듯이 먼저 어떤 조처가 있을 것은 분명하였지만 그것이 무엇일지 몰라 신부는 더욱더 조심하고 교우들도 모두 속으로 근심하고 걱정하였습니다.

十二 월 十七일 형조에서 포졸을 보내어 최도마를 체포하여 가두었는데 이 사람은 지난해의 송사가 미결중에 있었으므로 이번 체포된 일은 뜻밖의 일이 아니요, 또한 그때는 성교를 금하기로 되어 있었을 뿐 조정에서는 아직 금령을 내리지 아니하였으므로 교우들은 경계는 했었지만 그다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았었습니다.

十九일 성모 자헌 첨례날 새벽 최 도마의 종제 최 베드루가 길가에 있는 약방의 안방에서 몇 몇 사람과 함께 경문을 통경하고 있었는데 마침 창문 밖에서 투전(투전이란 노름의 이름인데 부랑자들이 돈을 걸고 노름을 하므로 사법부가 이를 금지하였음)을 단속하는 관원들이 지나가다가 창문 안에서 가슴을 치는 소리가 나자 투전 던지는 장단소리로 생각하고 창문을 열어 제치고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투전을 발견하지 못하자 각자의 몸수색을 하여 첨례표 한 장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몰라 이것이 무었엇지 알 수가 없자 글을 아는 관리에게로 가지고 가 보였더니 그것이 곳 성교에 관계되는 그림임을 알려주어 그들은 다시 교우들을 잡으러 돌아왔었는데 그러나 이미 날이 밝아 다른 교우들은 다 흩어져 달아났고, 최베드루 와 오스더왕만이 붙잡혀 관청으로 끌려가 도마와 함께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에 포도부장들은 김 여삼이와 부랑배들을 끼고 그들을 정보원으로 삼아 아니가는데 없이 돌아다니며 눈을 부릅뜨고 교우들을 찾아다니메 교중이 물결일 듯이 요란했으나 마침 세모가 되어 사태가 잠시 잠잠해 졌습니다. 그러나 정월 초아흐레 총회장 최 요왕이 잡히고 나서 부터는 부장들이 밤낮없이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잡아간 사람들이 두 포도청(자포청 우포청이 있음)에 가득히 찼는데 모두들 무식하고 또 새로 입교한 사람들과 여염집 부녀자들이라 의지가 강한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十一일 대왕대비가 교서를 내려 상교를 엄금하기를 선왕이 늘 말씀하시되 참다운 학문이 밝혀지면 사학은 저절로 꺼져 버릴 것이라 하셨는데 이제 듣건데 사학이 여전히 수도로부터 경기와 충청지방에 이르기 까지 기세를 보인다 하니 어찌 소름이 끼치고 한심한 일이 아니랴 서울과 지방에 다섯집씩 통합한 통반제도를 엄격히 세워 그 통에 사학을 하는 자가 있으면 통장이 관청에 고발하여 징계하게 하라 그래도 뉘우치지 아니하면 반역죄를 적용하여 모조리 사형에 처하여 씨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고 하니 각처가 소란하여 지고 환란의 불길이 더욱 맹렬해져 교우들은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명도의 회장 정 아오스딩은 정 약용의 셋째 형으로 본시 양근서 살다가 경신년(一八OO) 五월 박해때에 온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벌써 사학자로 비방을 받아왔던지라 그해 여름에 한 악질 관리가 선왕의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지적하여 처형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이 꾸짖어 화를 면한 바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사태가 이미 변하여 재난의 불길이 점점 맹렬하게 타오름을 보고 자기도 도저히 면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여 성물과 서적과 신부의 편지등을 농속에 넣어가지고 다른 집에다가 맡겨두다가 그집도 곧 습격을 당할까 두려워 본집으로 도로 가져다 두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장들에게 빼앗길까 무서워서 임 도마라는 사람을 나무장사로 꾸며 농을 마른 솔잎으로 싸가지고 十九일 해질녘에 짊어지고 거리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농은 크고 솔잎은 엷어서 아무래도 나무짐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때 한성부에 밀도살 감시원이 이것을 보고 몰래 잡은 쇠고기가 아닌가 의심이나(무허가 도살은 엄금하였음) 그사람을 관청으로 끌고가 농을 열어보니 모두가 성교에 관한 서적과 상본과 신부의 편지였는지라 부윤(俯尹)이 크게 놀라 그농과 사람을 포청으로 압송하니 이것은 불에다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어 환란이 더욱 확대 되었습니다. 책과 농이 압수당하자 교우들은 놀라 조석으로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만 十O여일이 지나도록 잠잠하고 아무 동정이 없더니 二월초에 포도대장 리 유경이 정근되고 신임된 신 대현이 집무하자 옥에 가득했던 배교자들은 모두 석방하고 최 도마형제와 최 요왕과 임 도마만을 석방하지 않았는데 이들을 때려 죽이려 한다고도 하고 멀리 귀향보내기로 방금 의논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밖에서 검거가 잠시 그치니 교우들이 기뻐하며 이대로 계속해서 무사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때에 소북의 박 장설 노론의 이 석우 남인의 최 현중 등이 잇달아 성교를 몹시 헐뜯고 반역죄로 처벌하기를 청원하며 아울러 신 대현이 교우들을 가볍게 처리한 것을 죄로 몰았습니다. 그러나 대비가 크게 노하여 대현을 잡아 가두고 이사람을 금부로 옯겼습니다. 이나라 국법에 조정의 관리와 역적은 군부에서 처리하고 포도청에서는 도적들만 취급하고 평민의 범죄는 형조에서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우들은 평민이지만 포도청에 속하게 되어 도적으로 처단되어야 하는 데 금부로 옮긴 것은 역적으로 처벌하려고 한 것입니다. 二월 초아흐렛날 리 가환 정 약용 리 승훈 홍 낙민을 금부에 가두고 十一일에는 권 철신과 정 약종을 체포하고 포도청에 엄명을 내려 전에 석방한 사람들까지 재구속하게 하고 여주와 양근에 가둔 사람들을 금부에 올리도록 하니 경향에 이름있는 교우들은 한 사람도 모면한 이가 없었습니다. 길에는 포졸들이 깔려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밤낮 그치지 아니 하고 금부와 양 포도청과 형조도 만원이 되어 더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二四일에는 골롬바의 온가족이 체포되고 이어 양반집 부녀자들도 제법 많이 체포되었으나 상세한 것은 잘 듣지 못했습니다. 정 아오스딩이 관가에 이르자 관원이 농 속에 든 책들에 대해 그 내력을 물으니 아오스딩은 다 자기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관원이 농 속의 편지를 내 놓고 하나하나 캐어 물었으나 아오스딩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관원이 사람을 그 가족에게 보내어 너의 남편 너의 아버지가 신부의 성명과 있는 곳만 알리면 절대로 죽을 리가 없는데 혹독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아니 하니 너희들 가족은 틀림 없이 알고 있을 터이니 가장의 목숨을 생각하여 바른 대로 말하라 고 하였으나 가족들도 한결 같이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회의를 열어 대역부도 죄로 판결하고 二六일에는 아오스딩과 최 요왕 최 도마 홍 방지거 사베리오 홍 낙진 리 승훈 여섯 사람들을 목을 베어 죽이고 그 후 아홉 사람 역시 참수형에 처하였는데 그 중 여자 세사람이 있었지만 가운데 한 사람 골롬바를 제외하고는 다른 두 여자와 남자 여섯명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최 베드루 등이 아닌가 하지만 전해들은 말이 정확하지가 않아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또 여주와 양근에 갇혔던 사람들도 모두 본 고을로 돌려보내 거기서 참수형에 처하였는데 아직 사실을 조사하지 못하여 일일이 아뢸 수가 없습니다. 총회장 최 요왕 창선이는 중간계급 출신으로 을묘년에 순교한 최 마디아의 조카이며 진실한 교훈이 전해 내려오는 집안에서 자라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였고 몸가짐이 평화스럽고 언행이 공정하여 二O년을 하루같이 지냈습니다. 그는 외모가 순수하고 말수가 적으면서도 정의로와서 누구든지 의혹이 생기거나 곤란을 당하거나 혹은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할 때면 그의 얼굴만 한 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 일이 아니며 어려운 일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또 그의 말은 두어 마디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 졌습니다. 도리에 대한 강론도 자세하고 명백하여 재미가 있으므로 비록 듣기 좋게 말할 생각이 없이 나오는 대로 말하더라도 사람들이 즐겨 들으며 싫증을 내지 아니하고 또한 그 말이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사람들이 받는 신익이 컸습니다. 그의 순명과 겸손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남보다 특별히 뛰어나는 점도 없고 꼬집어낼 결점도 없었습니다. 그는 교우들 중에서 덕망이 제일 높아 그를 사모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이 입정동에 있었으므로 교우들은 그를 관천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조 화진이 충청도를 수색할 때 관천이가 교우들의 영수임을 알았으나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할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최 요왕은 박해가 장차 커질 것을 알고 다른 교우의 집에 피해 있다가 신유년(一八O一)정월 초닷새날 몸이 불편하여 부득이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조섭하던 중 초아흐렛날 밤중에 김 여삼이 포도부장을 데리고 와서 집을 둘러싸고 체포하는 바람에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一O여일 후 치도곤으로 열 세 대를 맞았는데 매를 맞는 동안에는 기절하여 죽어 엎드러진 것 같았으나 매질이 끝나고 관원이 그의 죄목을 셀 때면 그는 벌떡 일어서서 성교의 一O계명을 강론하여 밝혔습니다. 관원의 말이 네가 부모를 효도로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니 그는 잘 생각해 보시오 밤에 잠이 든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 하오 그렇거늘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니 관원도 대답을 못하고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후 소식이 끊어졌더니 그 후 정 아오스딩과 함께 한날에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四三세이었습니다. 정 아오스딩 약종은 성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고 상세하고 치밀함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일찍이 선도(仙道)를 배워서 오래 살뜻이 있어 천지 개벽설을 그릇 믿었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지가 다시 변하는 때는 신선도 역시 함께 사라짐을 면치 못할 터이니 이것 역시 결국 길이 사는 길이 아니니 배울 것이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성교의 도리를 듣게 되어 독실히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신해년(一七九一)박해에 그의 형제와 친구들은 모두 움츠려졌으나 그만은 유독히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세속이야기에는 서툴렀으나 교리를 강론하기를 가장 좋아하여 비록 병이 들어 괴롭고 양식이 없어 굶주릴 때에도 그런 괴로움은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도리의 한 끝이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잠과 음식의 흥미마저 잃은 듯 전심전력 연구하여 반드시 해득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묵상 공부를 그치지 아니 하고 우몽한 자를 만나면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쳐 주기를 혀가 피로하고 목이 아플 정도까지 하여도 실증 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으며 아무리 막힌 사람이라도 그의 앞에서 깨치지 못하는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무식한 교우들을 위하여 이 나라의 언문으로 <주교요지>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성교의 여러 책을 인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보태서 아주 쉽고 명백하게 썼으므로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 까지도 책을 펴 보기만 하면 환히 알 수 있고 의심나거나 모호한 대가 없었습니다. 이 책이 이 나라에서 목초나 땔나무 보다도 더 중요하다 하여 신부는 간행을 인준 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의 학문 연구가 습관이 되고 성품이 되어 교우들을 만나면 안부 인사나 하고 나서는 곧 도리 강론을 펴 놓고 날이 저물도록 계속해 다른 이야기는 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혹 자기가 모르던 도리 한두 가지를 알아 깨닫개 되면 만족하여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혹 냉담하고 태도가 명확하지 못한 자가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 하면 딱하고 민망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지 도리에 대해 물으면 마치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생각해 내는 기색도 없이 척척 풀어주어 끊어지는 일이 없었고 어려운 문제를 늘어 놓아도 가려내는데 조금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질서가 있어 어긋나거나 뒤바뀜이 없었으며 정확하고도 기묘하였으며 또한 아름답고도 상세하고 확실하여 사람들의 신덕을 굳세게 하소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덕망은 관천만 못하였으나 도리에 밝기는 그보다 훨씬 더 낳았습니다. 그는 또 천주의 모든 덕과 여러 가지 도리가 광범하고 방대하여 여러 가지 책에 흩어져 총론이 없으므로 독자들이 납득하기가 어렵다 하여 장차 여러 책에서 가려 뽑아 부분별로 구별한 것을 한데 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 제명을 <성교전서>라 하여 후배들에게 남겨 주려고 하였으나 그 책의 초를 절반도 답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자 관원이 국왕의 명을 거스렸음을 문책하니 그는 성교의 진실한 도리를 솔직하게 진술하고 그것을 금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밝혀 말했습니다. 그러자 관원이 크게 노하여 국왕의 명령을 반대한다고 해서 반역죄를 선언하였습니다.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위에 올라 처형장에 갈 때에도 그는 큰소리로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은은 당연한 일이요 공심판 때 우리들의 울음은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요 여러분의 기쁜 웃음은 변하여 참된 고통이 되리니 웃지들 마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형을 당할 때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이것은 당연히 해야 될 일이니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이를 본받아 이 후 이렇게 하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처형장에서 그는 칼에 한번 맞아 목과 머리가 반쯤 잘렸었는데도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은 크게 벌려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는 조용히 엎더졌습니다. 최 도마와 함께 처형되었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四 二세 이었습니다. 최 도마는 병이 많았고 옥중에서 오래 시달려 지쳐서 수레에 오르자 곧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형장이 가까워 오자 비로소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나타났으며 그는 맨 먼저 형을 받았는데 그의 나이는 五六세 이었습니다. 홍 사베리오 교만이는 권 철신의 외숙으로 경기 포천현에 살았으며 젊어서 진사에 올랐고 만년에는 경학(經學)을 좋아하였는데 권씨 집안이 입교하자 그도 따라 믿게 되어 관계(官界)에 나설 뜻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이웃 사람들을 권유하자 그들을 감화시켜 온 고을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딸이 아오스딩에게 시집을 가자 그로 인해 남들의 비방을 받게 되어 드디어 체포되어 치명하였습니다. 홍 바오로 낙민은 본래 충청도 예산현 사람으로 젊어서 진사시헙에 합격하였고 서울로 이사한 후 리 승훈 정 약종과 어울려 갑진년(一七八四)과 을사년(一七八五)사이에 성교를 믿고 봉행하였습니다. 그는 열심하고 도리에 밝아 교중 사무를 잘 보아 칭찬을 받았으나 남의 이목을 거려 계속 과거를 보아 기유년(一七八九)엔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詞諫院)정언(正言)에 이르렀습니다. 신해년 박해 때는 선왕이 억지로 배교를 명하니 나쁜 표양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배교한 자들은 전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데 비해 바오로만은 신공 드리고 재지키는 것을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을유년(一七九五) 성사 볼 때가 이르러 보례하고 고해성사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판공때가 오기 전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성명이 한 영익이란 자의 고발에 들어 있어 선왕이 또 배교하라고 압박하였습니다. 그 뒤로 그는 집에 있을 때는 계명을 완전히 지키고 외출했을 때는 세속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을미년(一七九九)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는 신주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이르러선 열심히 약간 일어나 앞으로는 전심으로 주님께 귀화할 작정이었는데 이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기 전에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옥 안의 사정은 엄격한 비밀에 붙어져 있으므로 자세히 알 도리는 없었습니다. 그의 죄목이 본래 큰 것이 아니었으니 만일 관청에 이르러 배교만 하였더라면 죽지는 않았을텐데 참수형을 받은 것으로 보아 그가 성교에 어긋난 일을 한 것은 아님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리 승훈 베드루는 이 가환의 생질이요 정 아오스딩의 매형입니다. 젊어서 진사에 급제하고 학문궁리를 좋아하여 선비 리 벽이 크게 기특히 여겼습니다. 그 때 리 벽이 성교의 서적의 비밀히 읽고 있었으나 승훈은 아직 이를 몰랐습니다. 계묘년(一七八三)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매 리 벽이 그에게 은밀히 부탁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안에 서양 전교사들이 있었으니 찾아보고 신경 한부룰 얻은 후 동시에 성세 받기를 청하면 서양 선비들이 자네를 크게 사랑할 것이니 신기한 물건과 패물을 많이 얻어 가지고 오고 빈 손으로는 돌아오지 말라 고하였습니다. 승훈이 그의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상세를 청하매 여러 신부들이 영세하기에 필요한 도리를 모른다고 영세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량 신부가 힘써 우겨 성세를 주고 또한 성서도 주었습니다. 승훈이 집에 돌아오자 리 벽 등이 놀라 함께 전심전력으로 그 책을 읽어 보고 비로소 진리를 터득하고는 가까운 친구들을 권유하여 당시 이름 난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승훈을 추대하여 영수로 세웠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약한 벗들의 많은 비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참아 견디며 성교를 봉행하였습니다. 선왕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경술년(一七九O)가을에는 벼슬을 주어 평택 현령까지 지내게 하자 그는 신해년에 체포되어 배교하고는 성교를 비방하는 글을 여러 번 저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자기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을묘년에 신부가 이 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성사의 은혜 받기를 준비했으나 며칠 안 되어 박해가 일어나매 승훈은 두려워 다시 움츠려들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성서를 전파하였기 때문에 악한 무리들이 성교를 공격하고 배척할 때에는 반드시 승훈에게도 그 죄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선왕은 그를 두호 하였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세속을 따랐으나 혹 옛 가까운 친구를 만나면 옛 깊은 정을 잊지 못하여 떠나기를 아쉬워하며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날 생각을 하다가 화를 당하였는데 그는 서적을 전파한 죄가 있어 아무리 배교한다 해도 사형을 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선종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가 없어 더 두고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가환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고 성장하매 풍채가 늠름하고 도량이 크고 문장으로서는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으며 아니 읽은 책이 없었고 기억력이 강하여 신과 같았습니다. 또 천문과 기하학에도 정통하였는데 일찍이 그는 탄식하기를 이 늙은 몸이 죽으면 이 나라에는 기하학의 씨가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기학(理氣學)을 약간믿던 그는 천체를 둘러보며 마음 속으로 이처럼 웅대한 조직에 주재하는 이가 없다 하리요 하고 감탄한 적도 있었습니다. 三O세가 넘어 진사에 오르고 대과에 급제하니 선왕이 그를 인물로 중히 여겼습니다. 갑진 을묘년(一七九四,一七九五)무렵에 리 벽 등이 성교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책하여 말하기를 나도 서양 서적 몇권을 읽어 보았는데(자기 집에<직방외기><서학범>등이 있었음) 기이한 글이요 궁벽한 저술에 지나지 않고 다만 내 식견을 넓히는데 그쳤는데 어찌 족히 인생을 안정시키고 인명을 확립시킬 수 있으리요 하였습니다. 리 벽이 이치를 따저가며 답변하니 가환이 그의 말에 굴복하여 드디어 책을 구해다 비밀히 읽었습니다. 리 벽은 그에게 초보 입문서 몇 권을 주었는데 그 때 (성년광익,聖年廣益.)한권이 있었으나 가환이 영적을 믿지 않을까 하여 빌려 주지 않으려고 했으나 가환이 기어코 싸우다시피하여 그 때 있던 성교 서적을 모두 가져다가 정신을 쏟아 거듭 읽고 또 읽어 믿기로 결심하고는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진리요 정도로다 진실로 사실이 아니라면 서적 가운데 쓰인 말은 전부 하늘을 모함한 것이요 하늘을 소홀히 여긴 것이니 만일 그렇다면 서양 바다를 건너와 이렇게 전교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반드시 벼락을 맞아 죽었으리라 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는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아침 저녁으로 리 벽 등과 비밀히 희합하여 열심히 대단하였습니다. 이 때 리 승훈 등이 망녕되게 함부로 성사를 집행하였는데 가환은 남에게 권하여 그 들에게서 성세를 받도록 하였으나 자기는 그러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자신은 사신으로 북경에 가서 서양 사람들에게 성세를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세태가 어려워지자 그는 마침내 모든 신공하기를 그쳤는데 그 때 성교를 믿는다고 비방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환의 사돈과 일가 친척들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악한들이 항상 그를 불러 교주라고 규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신해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광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교우들을 많이 해침으로써 자기 변명의 계책을 삼았었는데 교우들에게 도둑 다스리는 형법을 맨 처음 적용한 이도 가환이었습니다. 신해년 이후 선왕이 남인을 많이 기용하자 가환은 그 세력을 타 여러 벼슬을 지내고 공조판서에까지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을묘년에 새 사람이 순교한 후 악한 무리들이 신부의 사정을 모르므로 그 죄를 리 승훈과 리 가환에게 뒤집어 씌어 잇달아 상소하고 공격하매 선왕도 할 수 없이 리 승훈을 예산으로 귀양 보내고 가환은 좌천시켜 충주 목사를 시켰습니다. 충주엔 마침 한 교우가 있어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는데 가환은 그를 혹독한 형벌로 다스려 억지로 배교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교우들에게 주리형을 처음 사용한 이도 가환이었는데 주리란 도둑을 다스리는 독특한 형벌입니다. 그는 또 관의 기생을 첩으로 삼았는데 이런 것은 모두 다 자기에 대한 비방을 벗으려고 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버림을 받아 다시는 등용되지 아니 하여 집에서 글이나 읽고 쓰면서 스스로 즐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원래 신앙이 깊어 딸과 며느리와 첩과 여종들을 권화하였는데 가끔 서책이 탄로가 나도 가환은 조사하거나 금하지 않았습니다. 가환은 무오(一七九八,一七九九)사이에 지방에서 박해가 잇달아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신념을 은밀히 말하기를 이것을 비유하면 막대기로 재를 두드리는것과 같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욱 일어나는 것이니 상감이 아무리 금할지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금부에 잡혀 들어갔을 때에는 아직도 자기는 염려 없다고 믿었으나 옥의 일을 보는 자들이 다 평소에 원수처럼 미워하던 자들이라 기어코 사지에 몰아 넣으려고 하여 도저히 면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자 변치 아니하여 혹독한 매질과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다가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때 나이는 六O세였습니다. 여섯사람이 순교하기 며칠 전 권 철신도 역시 매를 맞고 순교하였는데 그가 착하게 잘 죽었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사오니 탐지하여 알려 드릴때까지 기다려 주시옵소서 최 베드루는 필제는 (字)가 자순이요 도마의 종제로서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어 약종상을 하여 생활을 했는데 값이 싸고 약재가 좋아 모두 그를 신용하였습니다. 진실하고 충직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 바라다 보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어진 사람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도마는 의지가 굳고 성품이 뛰어난 사람이지만 베드루를 항상 우러러 보고 어렵게 대해 비록 나이로는 아우이지만 모든 일을 그와 문의한 다음에야 행하였고 자기 나름대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도마에게는 친 아우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교를 훼방하고 배척하고 교우들이 라면 모두 비난하면서도 베드루만은 감히 비방하지 못하고 천주교 안에는 자순이 한 사람밖에 없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라 고 늘 자순을 칭찬하였습니다. 신부가 일치기 베드루를 기특히 여겨 칭찬하기를 부부간에 정덕을 지키는 자로서 끝까지 상공하는 이가 적은데 자순 부부는 결심이 굳고 고신극기를 갈수록 부지런히 하니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루의 아버지는 본래 외교인이었는데 아들이 체포되매 놀라고 걱정한 나머지 병이들어 죽게 되자 천주교를 믿고 세를 받았습니다. 베드루는 옥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관에 출감을 청하니 관은 집에 돌아가 장례 지낼 것을 허락하고 또 은근한 말로 훈수를 주어 달아나 피하라고 했지만 베드루는 그 말대로 하지 아니 하고 장례를 치른 뒤 기일 안에 감옥에 돌아와 마침내 목이 잘려 순교하였습니다. 나이는 三二세 이었습니다. 일찍이 베드루는 몇몇이 친구들과 함께 서로 자신의 소원을 말할 때 그는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소원이라고 하였는데 결국 그 말대로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로는 베드루가 매를 이기지 못해 배교하였는데도 관가에서 석방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다시 성교를 설명하고 사형을 받았다고도 하나 확실한 바가 없고 아직은 의문일 뿐입니다. 김 요사팟 건순은 노론 대가의 자손이요 집이 경기도 여주에 있었습니다. 그의 선조 상헌이 나라에 큰 공훈을 세웠기 떄문에 자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받아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집안이 되었습니다. 요사팟은 어릴 떄부터 특이한 데가 있어 아홉 살 때에 선도를 배울 생각이 나 서당에서 훈장에게 논어를 배웠는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할 것이라는 대문에 와서 마땅히 공경해야 할진대 멀리 함은 옳지 않은 일이요 마땅히 멀리 해야 할진대 공경함은 옳지 않은 일이거늘 공경하고 멀리 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으니 훈장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집에는 전부터 (기인 십 편<畸人十篇)이라는 책이 있어 요사팟은 그책 읽기를 좋아했고 一O여세에는 (천당지옥론)을 저술하여 천당과 지옥이 반드시 있음을 밝혔고 더 자라면서부터는 문학에 널리 통달하여 <경사자집> (經史子集)과 의서(醫書)와 지리에도 통달하고 불교와 노자와 병서(兵書)에 까지도 정통하지 아니 한 것이 없었습니다. 열 여덟 살 때 양부의 상을 당했는데 이 나라와 상복은 송나라의 제도를 본 딴것이라 옛날 법과 틀린 데가 많았으므로 이것을 다시 뜯어 고쳤습니다. 그러자 민간의 선비들이 크게 놀라 들고 일어나 글을 보내 힐책하였더니 요사팟이 글을 지어 이에 응답하였는데 그 인용한 증거가 넓고도 많고 문장이 아름다워 리 가환이 읽어 보고 나는 감히 바라다 보지도 못한다 고 탄복하였습니다. 그는 집안에서는 충직하고 신의가 높으며 독실하고 효성스러워 그 명성이 인근 이웃에 널리 알려 졌습니다. 본래 가산이 부유하여 재물을 나누어 희사하면서도 자기가 먹고 입은 것은 검소하기가 가난한 사람과 같아 그 명성이 대단해서 서울에 나들이 갈 때마다 가마와 말을 타고 모여 들었는데 그를 한번 만나 보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리 말딩등 五.六명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친교를 맺고 장차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강절(江浙)을 거쳐 북경에 이르러 서양 선비들과 만나 잘 사는 방법을 많이 배워 가지고 본국에 돌아와 가르치려고 하였으나 입교하였기 때문에 실현치 못하였고 이 五.六명이 모두가 천주교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 때 성교를 봉행하는 사람은 모두 남인이었고 노론 측에서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요사팟은 성교를 몹시 부러워하고 사모하였으나 들어갈 길이 없다가 우연히 한 시골 교우를 통해 미카엘 대천신 상본을 얻어 보고 성교가 술법과 서로 통한다고 오해를 하고는 강 이천 등과 함께 술법(術法)에 종사하였습니다. 강 이천이란 자는 소북의 명사로 심술이 단정치 못하여 이 나라가 필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나라안이 소란해지면 이 술법을 익혀 시기를 보아 집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요사팟은 그것을 모르고 그를 사귀었던 것입니다. 신부가 요사팟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글을 보내 그를 권유하였는데 그는 크게 감복하여 전에 배우던 것을 모두 버리고 진심으로 천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떄 나이 二二세였습니다. 그와 함께 가까운 친구들이 입교하였는데 오직 이천만이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이 안되어 이천의 진상이 탄로나 결국 입건이 되었는데 사실 진술에 요사팟이 관련되어 있었으나 선왕이 전부터 그의 재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극력 두호하여 화를 면케 하였습니다. 그는 영세한 후 열심히 불같이 일어나매 부형들이 알고 엄히 말리게 되어 三 . 四년간은 집안 박해가 없을 때가 없었고 따라서 비방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의 체포된 경위와 환을 당할 때의 태도에 대하여서는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만 들리는 말로는 그가 처형될 때에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벼슬이나 명예는 모두 헛되고 거짓된 것이로다 나 역시 약간의 명망이 있고 벼슬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것이 헛되고 거짓되므로 포기하였노라 오직 천주의 성교만이 지극히 진실하므로 이를 위하여는 죽음을 사양치 않노니 그대들은 이 뜻을 자세히 생각할지니라 말하고 마침내 순교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二六세라 장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했습니다. 김 백순은 서울 사람이요 건순의 일가 형으로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공명을 구할 생각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선조 성용은 벼슬이 나라의 재상이라 숭덕 병자년(一六三六)에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함락하자 상용은 의리를 굽히지 않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사당과 정문이 세워졌고 나라에서는 대궐 안에 대보단을 세워 전의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과 승정 두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국왕이 병자란에 죽은 이의 자손들을 데려다 전배(展拜)의 예를 드리고 예식이 끝난면 과거를 베풀어 제사에 참여한 사람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이것을 충량과(忠良科)라고 하였습니다. 백순은 이제사에 출석하지 아니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나라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과거에 급제할 기회를 노리는 것으로 성실하지 못한 것이기에 나는 참여하지 않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는 처음 몇 해 동안은 남을 따라 덩달아 성교를 비방하며 과거 공부에 힘쓰더니 세태가 위험함을 보고는 관계에 투신할 마음을 버리고 송나라 유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치가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않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드디어 노자와 장자의 서적을 읽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죽어서도 멀치 않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워 친구들에게 강의하였더니 친구들은 이 사람의 이론이 새로운 것이니 반드시 서양의 교를 쫓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순이 듣고 의심하기를 내가 남보다 뛰어난 견해를 얻었는데 남들이 서교라고 하니 서교에는 반드시 오묘한 이치가 있을 것이라 하여 마침내 교우들과 상종하게 되어 여러 해 동안 서로 토론한 결과 굳게 믿고 따라 계명과 법규를 엄격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입교하여 열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성질이 억세고 사나와 자기 남편이 높은 벼슬에 올라 유명하게 되기를 바라다가 하루 아침에 장래 끊어지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온갖 욕을 퍼부으며 일가 친척과 친구들까지 헐뜯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백순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외숙이 그를 설복시키려 하였으나 설복 당하지 않자 외숙은 네가 내 말을 듣지도 아니 하면 너와 절교하겠다 고까지 했지만 백순은 차라리 외숙과는절교할지언정 주님과는 절교 못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의 친구들은 모두 절교 통고문을 보냈고 종중 모임에서는 그를 문중에서 축출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백순은 태연하였습니다. 그는 늘 내가 천주를 믿고 나자 내 마음이 산과 같아 요동하지 않는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건순이와 함께 한날에 참수형을 받았는데 그의 나이 三二세요 입교한지가 오래되지 않아 상세를 받지 못해 본명이 없었습니다. 리 희영 루가는 요사팟의 아주 가까운 친구로 여주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한 사람인데 본래 화공(畵工)으로 성인들의 상본을 잘 그렸습니다. 그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홍 비리버 필주는 골롬바의 전실 아들로 성품이 선량하여 어머니를 따라 교에 나왔으나 처음엔 별로 부지런하거나 열심하지 않더니 신부를 모신지 一년만에 아주 딴 사람이 되어 모두 놀라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집에 있으면서도 늘 미사에 복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옥에 들어가매 관원이 신부의 동정을 물으면서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나 비리버는 고통을 참아 견디며 긑내 실토하지 아니 하여 마침내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나이 二八세 이었습니다. 강 골롬바는 한 이름 있는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언변이 있고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생각과 취미가 고상하여 어려서 방안에 앉아 있을 때부터 이미 성녀가 될 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나아갈 길을 몰라 남을 따라 염불을 읊었는데 지식이 약간 열린 一O여세가 되자 그것이 허황하여 믿을 것이 못됨을 알고 다시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라서 덕산 홍 지영의 후처로 들어갔는데 남편이 옹졸하여 마음에 맞지 않아서 늘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충청도에 처음 성교가 들어갔을 떄 골롬바는 천주교라는 세 글자를 듣고 혼자서의 짐작에 천주라 함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 교의 이름이 옳으니 도리도 틀림 없을 것이라 하여 책을 구해 한 번 읽어보자 마음이 기울어져 믿고 따랐습니다. 그의 총명하고 부지런함과 민첩하고 열심한 극기는 아주 뛰어나 아무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온 집안을 권유하여 귀화시키고 이웃 동리까지 전했는데 오직 남편 지영이만은 주견이 전연 없어 아내가 권유하면 옳다 옳다 하며 쫓다가는 악한 무리가 할뜯으면 그래 그래하고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아내가 나무라면 눈믈을 흘리며 참회하다가도 나쁜 친구가 오면 금시 전과 같이 되었습니다. 골롬바가 아무리 힘을 써도 아무런 효과가 없어 그와 함께 일을 할 수 없었으므로 신해년 박해에 자기 고향이 시끄러워지자 그는 남편에게 농토를 맡기고 자녀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사바의 북경 왕래를 많이 도와 주었습니다. 을묘년에 영세를 했는데 신부는 그를 심히 기뻐하며 회장으로 임명하여 여교우들을 보살피는 임무을 맡겼습니다. 五월 박해에 그는 피신할 계획을 먼저 주장하고 혼자 주선하여 신부를 자기 집에 숨겨 두고 힘을 다해 미리 막아 보호함으로써 포졸들이 체포하러 문앞까지 왔다가도 그냥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박해가 지난 후에도 신부는 그의 집을 거처로 정하였으며 골롬바는 六 년이나 교회의 모든 요긴한 사무를 도와 신부의 총애와 신임은 누구도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골롬바는 안으로는 신부를 받들어 거처와 의식을 모두 알뜰하게 보살피고 밖으로는 교회 사무를 처리하여 경영과 수응에 조금도 차질이 없었습니다. 그는 처녀들을 많이 모아 가르쳤고 그것이 끝나면 각기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천주님을 믿으라고 권고하도록 하고 자신도 역시 두루 다니며 전교하기에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여 편히 잠자는 시간이 없었으며 도리가 밝고 구변이 좋아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귀화시켰고 일처리를 과감하게 하고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다 두려워 하였습니다. 체포되어 관청에 이르자 관원이 신부의 거처를 물으며 주리를 여섯 번이나 틀었으나 음성과 기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아니 하매 양쪽에 늘어섰던 형리들이 이것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나이는 四一세이었습니다. 선왕에게는 서형(庶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반역죄로 죽은 뒤 선왕이 그를 강화도로 추방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온 나라가 들고 일어나 그를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내와 며느리를 본래 살던 궁에 그대로 살게 하였습니다. 신해 임자녀(一七九一, 一七九二)무렵 한 여교우가 있어 그를 가련히 여겨 권유하여 감화시켰더니 사람들이 모두 우환의 근거가 이런 데 있을 것이라 하여 그들과 내왕하기를 꺼렸지마는 골롬바는 꺼림낌이 없이 주선하여 이미 성사를 받게 하고 명도회에 입회시켰는데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모두 우울하고 금심해 했습니다. 결국 발각되어 극약을 내려 자살하게 하고 강화도의 죄인도 성교는 믿지 않았으나 공범으로 몰아 역시 극약을 내려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두 부인의 성과 본명도 모르고 최 베드루 이하 여러 교우들의 순교한 날짜도 모릅니다. 조 베드루는 양근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가 홀아비로 빈궁하여 힘써 농사를 지어 살아갔는데 베드루의 나이가 三O이 되도록 관례도 못하고 장가도 못 갔습니다. 그는 몸이 몹시 쇠약하여 외양도 보잘 것 없었거니와 세상 일에도 어두워 사람들이 그를 비웃고 사람 축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정 아오스딩의 집에 가서 공부했는데 아오스딩만이 그의 큰 열심을 칭찬하였습니다. 경신년(一八OO) 四월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여주 리 말딩의 마을에 갔다가 말딩이 체포될 때 부자가 함께 붙들려 관청으로 끌려갔으나 베드루가 굴복하지 않았으니 관원이 노하여 네가 내 명령을 쫓지 않으면 네 아버지를 당장에 죽이리라 하고 아버지를 끌어내어 그가 보는 앞에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루는 하는 수 없이 배교하는 말을 했습니다. 석방되어 문을 나올 때 말딩 등이 깨우치고 권면하매 베드루는 마음을 돌이켜 회두하고 다시 들어가 성교를 증명하였습니다. 관원이 크게 노하여 그를 재수감하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고문을 당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예사로운 매를 맞았지만 베드루만은 가장 혹독한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것은 담당관이 그의 사람됨을 보고 마음 속으로 멸시하여 이런 자는 쉽사리 항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 고 생각 했었는데 뜻밖에 오히려 크게 완강 하므로 몹시 미워져서 기어코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의 감옥생활 十一개월동안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 매우 많았습니다. 다 기억하지 못하고 후에 사실을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루는 옥중에서 대세를 받았는데 신유년(一八O一) 二월에 관원이 또 다시 몸 쓸 형벌을 가하며 억지로 배교하기를 명령하니 하늘에는 두 천주가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없소 그러니 한 번 죽는 것 외에는 더 할말이 없소 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관원이 명하여 다시 옥에 가두었는데 며칠 후 옥 안에서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때는 二月 一四일이었습니다. 이 루수는 충청도에 전교했다는 죄로 공주에서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그때 아직 배교중에 있었는데 죽을 때 어떠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가 선종했다고 하나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산과 예산에도 순교자가 한사람씩 있다 하나 누구인지 모릅니다. 전라도는 신해년 이후 一O 년동안 박해가 없어 교우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四월 초 전주의 류 아오스딩과 고산의 윤 방지거등 二OO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오직 김제의 가난한 선비 한씨라는 사람과 전주의 평민 최 여겸이라는 사람만이 의지가 굳어 참수형으로 순교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굴복하였습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배교한 사람들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 보냈는데 그 수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류 아오스딩 형제와 윤 방지거는 지도자였기 때문에 바로 귀양 보내지 아니하고 서울로 올려다가 가두었습니다. 김 도마는 체포되었을 때 자기가 그들과 내왕한 일이 있다고 실토 함으로 그 역시 서울로 올려다가 가두었는데 죽였는지 아니면 귀양을 보냈는지 아직 모릅니다. 외교인들에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식으로 처형된 자와 옥중에서 죽은 사람이 三OO여명인데 지방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 합니다. 조선 건국 이래 사람을 죽인 수가 올해처럼 많은 적이 없었다 하나 믿을 만한 말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또 헛되이 죽은 자가 누구이며 순교한 사람이 몇인지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 기어코 죽여 없애려 하는 자는 지위가 높고 글을 잘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몽한 평민들을 혹 알아도 모르는 체 내버려 두고 취조도 혹독하게 아니 하여 서울 장안 평민들은 살아 있는 수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二 월 보름 전의 일은 죄인이 친히 목격하였으므로 꽤 상세하게 아오나 그 이후 일은 전하는 말을 얻어 들은 것이기에 매우 간략하고 탐탁하지도 않습니다. 순교자들의 사적은 분명히 들은 것과 평소에 전부터 잘 아는 것을 추려서 적은 것이라 대강에 지나지 아니 하고 그 나머지는 감히 함부로 기록하지 못합니다. 기록한 것 가운데도 오히려 진실되지 못한 데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좀더 자세히 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신부께서는 을묘년 이래 늘 골롬바네 집에 살면서 간혹 딴 곳에 돌아다녔는데 이것은 오직 골롬바만이 알았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박해가 일어나자 한 남자 교우가 사태가 긴박함을 보고 신부의 처신이 위험할까 하여 지방으로 내려와 숨어 사는 교우들을 찾아보고 적당한 자리 두군데를 마련해 놓고 서울로 돌아와 골롬바를 만나 신부님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킬 계획이 있어서 그러니 신부님을 한 번만나 보게 해 달라 고 했으나 골롬바는 이미 안전한 곳이 마련되었으니 구태어 다시 옮겨 갈 필요가 없다 고 하였습니다. 이 교우가 여러 번 간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갔습니다. 五.六일후 화가 일어날 기미가 점차 커지자 이 교우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온가족과 함께 먼데로 피해 갔습니다. 정 아오스딩이 관처에 잡혀가 공술하지 아니하니 관청은 골롬바 모자를 잡아다가 혹독한 형벌로 고문하였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골롬바의 여종을 데려다가 주리를 틀어 문초하니 여종이 혹형을 이기지 못하여 사실대로 진술하고 아울러 나이와 얼굴 모습을 알려 주었습니다. 관원이 골롬바를 보고 너의 집 종이 다 불어 놓았으므로 너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으니 신부의 처소를 말하라 고 하매 골롬바는 그 사람이 전에는 우리 집에 있었지마는 떠나간지가 오래서 지금은 그의 처소를 모른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신부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돌려 상금을 걸고 각 지방으로 두루 탐색하였습니다. 三월 중순께 신부는 자수하였는데 (그때 어디 누구의 집에 살았으며 무엇 때문에 자수 했는지 그리고 자수한 날짜는 언제인지 등은 모릅니다) 그가 바로 금부로 들어가 관졸들이 놀라 누구냐 고 물으니 그는 나 역시 천주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으로 조정에서 이것을 엄중히 금하고 무죄한 사람들을 많이 죽인다고 하니 살아 있는 것이 무익하므로 스스로 죽기를 구하러 왔노라 고 대답했습니다. 관졸들이 그를 붙들어 관원 앞에 데려가 그가 신부임을 알고 옥에 가두고 양 발에 쇠고랑을 채우고는 형벌과 문초는 하지 않았습니다. 옥중에서 필기 문답한 것이 매우 많았다고 하나 얻어 볼 수가 없고 다만 외교인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자수한 사람은 자기가 서양 사람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여섯 사람이 반역죄로 처형되었는데 신부가 자수하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서양사람이 옥 중에서 천주교인들은 역적이 아님을 변명하고 있다 고도 하고 또 서양 사람이 그냥 죽음을 당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에야 사형을 청하려 한다 고도 했는데 이런 소문은 거짓이 아닌 것 같습니다. 四월 보름 후 정부에서는 어영대장(御營大將)에게 명하여 신부를 군문효수(사형한 다음에 보내는 형벌) 하게 하였는데 대장이 병을 핑계하고 사흘동안이나 출근하지 아니하매 사흘 후 그를 파면하고 새로 임명한 대장을 내 보내 사형을 집행하게 하였습니다. 신부를 옥에서 끌어내어 처음으로 형벌을 가해 문초하고 나서(무릎을 서른 번 쳤습니다) 데리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신부는 길가 좌우 구경꾼들을 둘러 보고 목이 마르니 술을 달라 하매 군졸이 술 한잔을 바쳤습니다. 다 마시고 나서 성 밖 남쪽 一O리되는 연무장(강가의 모래밭이요 지명은 노량임)으로 갔습니다. 귀에 화살을 꿴 후 군졸이 죄목이 적힌 판결문을 주어 읽어 보게 하였습니다. 그 조서는 꽤 길었는데 신부는 조용히 다 보고 나서 목을 늘여 칼을 받았습니다. 때는 四월 一九일 성삼첨례 저녁 六시였습니다. 목을 베자 졸지에 큰 바람이 일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 소리가 요란하니 장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황급해 하지 아니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한 교우는 三OO리 밖에서 길을 가고 있었고 또 한 교우는 四OO리밖에 피난해 가서 있었는데 바람과 천둥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필연코 이 날이 이상한 일이 있으리라고 하여 날짜를 기억해 두었는데 그 후에 들으니 신부가 순교한 날이 바로 그 날 그 시였습니다. 머리를 닷새 동안 거리에 달아놓고 밤낮으로 지켜 사람이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대장이 훍으로 덮으라고 명령하고 여전히 엄히 지키게 하였는데 교우들이 묻은 곳을 몰래 알아 두었다가 후에 옯겨 장사 지내려 하였으나 악질 관리가 위에 아뢰기를 이 사람은 매장하는 것이 옳지 않으니 파내어 드러내 놓도록 명령하십시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묻으라고 명했던 대장이 이왕 묻어 버린 것을 그렇게까지야 할 것이 있겠느냐 고 간하여 일이 끝났는데 무덤을 지키는 군졸들이 지키기가 귀찮아 몰래 딴 곳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이 암장한 곳을 두루 찾아 다녔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을 집행 할 때 관리들이 이 사람은 제주 사람이라 고 선언하였는데 그것은 중국 정부에 보고하지 아니 하고 종적을 덮어 버리려 한 것입니다. 신부가 순교한 후 박해의 대세가 약간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사찰(査察)과 체포는 여전히 끊어지지 않아 감옥에 갇힌 사람이 아직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로는 참수형을 당하여야 할 사람이 아홉명이나 된다고 하나 사실 여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부가 이 나라에 오자마자 고발한 자가 있어 이미 선왕이 알고 있었으므로 七년동안 조심하고 또 두려워서 일을 줄일 수밖에 없어 감히 성사를 널리 집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은혜를 입은 자가 많지 못하고 그 태반이 여교우들입니다. 지방의 교우들과 장안에 사는 평민들로서 열심한 이가 적지 않았으나 은혜를 받은 이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많은 고통을 참아 받으며 여러 해를 두고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세태가 불안하여 비록 사사로운 집 방안에서라도 감히 입을 열어 신부라는 두 글자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뜻밖에도 악인들에게 피살되어 그 머리를 매어 단 다음에야 그 얼굴을 보게 되니 一O년 동안이나 애쓴 정성이 하루 아침에 허사로 돌아가 영혼과 육신이 멸망할 지경에 이르고 생사를 의지할 데가 없게 되어 모두 얼빠지고 실망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죄인 등이 그들에게 신부님이 오신 것은 오로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니 어찌 널리 구원을 베풀고자 아니 하셨겠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갖가지 장애로 마음 속에만 사랑을 참고 드러내지 못하시다가 이제 이미 순교하셨으니 천당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힘이 세상에 계실 때 보다 훨씬 더할 것이요. 그러니 우리들의 의지할데와 그대들의 소망도 전에 비해 배로 커져야 하고 털끝만큼이라도 실망해서는 안되오 하고 위로 헀지만 그들은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의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는가하면 한편으로는 스스로 마음을 달래기도 합니다. 아마 이러한 광경은 옛날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 서양의 박해가 오늘이 나라의 참상보다 더 심했다 해도 성직자가 대를 이어 성사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교가 멸망하지 않고 인생의 영혼이 다 구제되었는데 이 나라에서는 형편이 너무 달라 그런 희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양이 목자를 잃고도 풀을 뜯어 먹고 자라고 젖먹이가 어머니를 잃고도 살아 나가기를 바랄 수는 있지만 저희들은 백번 생각해 실로 살 길이 없습니다. 죄인등은 예로부터 침침하고 어두운 지역에 태어났으나 다행히 천주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의 이름을 현양하여 특별한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로 생각하였는데 중도에서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어찌 알았습니까 일찍이 듣건데 순교자들의 피는 성교의 씨라 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불행하게도 동으로 일본과 이웃하고 있어 섬나라의 오랑캐들이 잔인하고 흉악하여 스스로 천주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잘한 것으로 받아 들이려고 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오리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품은 부드럽고 약하고 법령이 해이하여 일본처럼 그렇게 각박하고 악독하지는 않겠지마는 현재 교우중에 지식 있고 의지가 굳은 사람이 몇이 안되어 우몽한 자와 부녀와 아이들을 대충 합하면 수천 명에 내리지 아니 하나 그들을 지도할 사람이 없어 일으킬 방도가 없습니다. 이런 형편으로야 어찌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一O년이 못가서 비록 정부의 박해가 없더라도 저절로 소멸하고 말 것이니 아 참으로 슬픈 일이옵니다. 죽기 전에 성교가 끊어져 없어지는 것을 어떻게 차마 보겠습니까 죄인 등은 금년에 화를 면하여 고마움과 두려움이 엇갈립니다. 인자하신 은혜의 보살핌으로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고맙고 죄악이 크고 많아 간선자 중에 들지 못하였으니 두렵습니다. 이 남은 생명으로 주님을 위하여 힘을 다하고자 하오나 지혜가 모자랄 뿐 아니라 힘도 없으니 장차 이 분통을 이대로 안고 땅 속에 들어가야 하며 이 원통한 한을 이대로 품고 이세상을 마쳐야 하겠습니까 슬프고 답답한 가운데 누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며 누가 우리를 위로해 주겠습니까 주교님의 인자하신 존전에서 통곡하며 호소하고자 하오나 관문과 산하가 가로 막혀 우러러 보아도 뵈올 수 없으니 더욱 더 속히 타고 답답하옵니다. 장차 어찌 하오리까 죄인 등이 신부께 자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슬퍼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더욱 크게 당황하고 걱정한 것은 혹시 이 일이 중국 조정에 보고 되어 그 누(累)가 북경 본당에까지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의 교회일은 다시는 가망이 없게 될 것이므로 그 때문에 밤낮으로 이 나라 일보다 더 근심하고 걱정하였었는데 다행히 극진한 보우하심으로 근본이 흔들리지 아니 하고 아울러 죄인이 죽지 않고 요왕도 무고한 것으로 보아 주님의 뜻이 이 나라 일을 주교님께 맡긴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니 죄인 등이 어찌 심중의 이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하소연 하여 이 은혜를 우러러 받들지 아니 하겠습니까 모두 말씀드리오니 원컨데 굽어 살피소서 모든 나라 중에 이 나라가 제일 가난하고 교우들은 더욱 더 가난하여 겨우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는 자가 一O여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갑인년에 일(청나라 주 문모를 우리 나라에 맞아 들인 일)이 있었을 때 신부를 영접하는 절차를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신부가 이 나라에 도착한 후에야 겨우 움직이게 되어 일마다 군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생소한 일에 경험이 없는 탓이라 하지마는 사실은 가난하여 힘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근년에 입교하는 사람이 약간 많아지고 재정도 전보다 조금 나아졌습니다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또한 합당치 못한 사람을 끌어 들여 화난이 이처럼 참혹 하게 된 것도 그 태반이 재정난 때문입니다. 금년 박해가 끝난후 화를 입은 사람은 전재산이 없어졌고 살려고 했던 자들은 홀몸으로 도망하여 가난한 형편은 도리어 갑인년 이전보다 더 심해 설혹 무슨 계획이 있다 하여도 실행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다 파괴된 뒤이지만 재정만 있으면 할 일이 있습니다. 교우들로 말하면 아직 현저히 나타난 자는 없지만 몇몇 쓸 만한 사람들이 있어 끌어 들일 수도 있고 정세로 말하면 을묘년 이후 해마다 더 어려워 졌는데 거기에서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선왕이 신부를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기어코 찾아 내려고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론이 남인을 꺼리고 미워하여 애써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선왕의 의심하던 것도 이미 깨어졌고 노론이 미워하던 것도 다 없어졌으며 교우 중에 이름 났던 사람들도 다 죽었으므로 금년만 지내면 잠잠할 것입니다. 지방으로 말씀드리자면 서울에는 비록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있어 교우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는 그 법이 몹시 엄하지만 교우가 살지 않는 곳에서는 통법을 만들었어도 유명무실하여 모두 마음 놓고 지내 게 되니 발을 붙일 수 있습니다. 실정으로 말씀 드리면 경기 충청 전라 三도는 본래 교우가 많고 경상 강원 二도는 금년에 피난간 사람이 더러 살고 있는 까닭에 탐정관이 이 다섯도를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황해 평안 도는 본래 교우가 없었고 이사간 교우도 없어서 잠잠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변문(邊門)에서는 조사와 감시가 있지만 一. 二년 이래 전연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감시나 조사가 차차 소홀해 질 것이므로 손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경륜(經綸)으로 말씀 드리면 이전 사람들은 모두 널리 드러내기를 힘썼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마땅히 보존하기에 힘써야 하니 도랑을 깊이 파고 담을 견고히 쌓고 삼가 자신을 엄격히 지키며 이미 입교한 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미성년자들은 훈계하고 가르쳐 주의 도우심을 정성되이 기구하고 잠잠히 기회를 기다리면 가히 보존하기에 걱정이 없겠습니다. 갑인년(一七九四)에 있은 일에 교우들이 분수에 넘치도록 기뻐하고 다행스럽게 여겨 엄히 근신치 않은 까닭에 첫 번에 한 번 실수한 일이 차차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앞수레의 엎어짐이 얼마되지 않았으니 이제는 더욱 더 삼가고 또 삼가 스스로 파탄만 일으키지 않으면 환난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현재 사태가 이렇다고 해서 반드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은 모두 재물이 있은 다음에야 논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지역의 성교회의 존망과 영적 생명의 살고 죽음이 악한 맘몬(재물)에 달려 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재물이 없는 관계로 성교가 망하고 영혼이 죽는다면 그 원한이 또한 어떠하오리까 이제 몽매함을 무릅쓰고 감히 말씀올려 청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이 일을 위하여 서양 여러 나라에 애걸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나라에 성교를 유지하고 생명을 구제하는 자본이 되게 하시면 면밀히 운영하고 올바른 준비를 갖춘 뒤 다시 살아날 은혜를 청하오리다 청컨대 주교님은 가련히 보시고 살펴 주옵소서 이런 청은 번거롭고 수고를 끼쳐 드리는 일이라 외람된 줄 아오나 묵묵하여 구하지 않거나 구하여도 얻지 못하면 이는 영영 죽는 것과 같은지라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기에 입을 열어 말씀 드리나이다. 죄인등은 몸과 마음을 숨김없이 우러러 부탁하오니 주교님께서는 위로는 자비하시고 지선하신 은주를 본받으시고 아래로는 가난하고 궁색하고 잔약한 자식들을 생각 하시와 우리의 부탁을 만족히 채워 주시고 우리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시면 성교는 물론 인생들에게 크게 다행한 일이 되겠습니다. 죄인등에게는 버림받지 않는 은혜를 내리시어 재생하는 길을 허락하시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며칠이나 몇 달 동안에 될 것으로 기대할 수 없고 제대로 경영하고 주선하는데 적어도 三 .四년은 걸려야 할 것입니다. 국경을 넘어가는데 두 가지 난관이 있으니 하나는 머리털이요 또 하나는 언어입니다. 머리털은 쉽게 자라도 입과 혀는 변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말만 능통하면 그다지 위험한 곤란이 없겠습니다. 죄인 등의 생각으로는 이 나라 사람 하나가 먼저 그곳 천주당에 들어가서 그곳 연소한 교우 학생들에게 이 나라 말을 가르쳐 후일에 대비하는 것이 극히 타당할 것으로 생각하옵니다만 높으신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만약 허락하신다면 피차간에 암호를 정하고 어쩐 소리로 약속하여 동문을 기약하고 동문(冬門)이 불편하다면 다시 춘문(春門)으로 기약하면 순조롭게 될 가망이 있습니다. 또 가장 편리한 것으로는 열심하고 근신한 중국인 교우 한 사람을 책문(柵門)안에 이사시켜 극히 조심하여 소문이 나가지 않도록 가게를 차리고 숙소를 열어 행인들을 받아 들이면 왕래할 때와 서신 교환에 별로 힘들지 않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그 중에 이뤄지는 묘한 일을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나라 사람들의 생명이 관련된 것이요 실행하기도 과히 어렵지 아니 합니다. 만약 우리 신부와 같이 이 나라를 불쌍히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틀림없이 기꺼이 받아 들일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데 열심하고 신중한 사람들에게 널리 물어 보시고 꼭 이루어 지도록 주선하심니 어떠한가 하옵니다. 이 나라는 방금 위태롭고 불안하고 문란한 지경에 처해 있어 무슨 일이나 막론하고 황제의 명령이 있으면 감히 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타서 교종께서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시어 내가 조선에 성교를 전하고자 하는데 듣건데 그 나라는 중국 조정에 속하여 있어 외국과 상통하지 아니 한다 하므로 이렇게 청하오니 원컨데 폐하는 그 나라에 따로 칙령을 내리시어 서양 선교사를 받아 들여 그들로 하여금 충성하고 효도하는 도리를 가르쳐 백성들이 황조에 충성을 다하여 폐하의 덕에 보답케 하옵소서 하고 간청하면 황제는 본래 서양 선교사의 충실하고 근실함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 허락을 받을 가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천자(天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라는 격이니 성교가 평화롭게 나아갈 것입니다. 중국의 형세가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원컨데 유의하옵소서 이 나라에 있어서의 천주의 은혜는 다른데보다 월등하게 컸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전교사가 온 일도 없이 천주께서 친히 특별하게 교리를 가르쳐 주셨고 이어 성사를 베풀어 줄 이를 주시는 등 내리신 갖가지 특은을 손가락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금년의 이 벌은 죄인들이 은혜를 저버린 탓으로 일어난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의 자비하심이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아니 하시고 이처럼 잔혹하게 파괴된 가운데도 한 줄기의 길을 남겨 놓으신 것은 이 나라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표증임이 밝혀 보증된 것입니다. 천주님의 도우심이 이와 같으니 만일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의 천주교 봉행자들이 합심하고 전력을 다해 도우려고만 든다면 재난을 길복으로 바꾸어 이 손바닥 만한 땅을 어찌 구원해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죄인 등은 이렇게 스스로 위로하고 남도 위로해 주면서 죽음을 참고 목숨을 늘리고 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천주의 의향대로 하시어 속히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원하옵니다. 엎드려 듣건데 근년에 중국은 서쪽에 도둑의 무리가 창궐에 관군이 여러 번 패하여 국토가 날로 죽어간다고 하니 황제의 마음은 틀림없이 근심되고 괴로울 것입니다. 이런 기회에 언변 좋고 수단 좋은 사람으로 해서 황제가 평소에 신임하는 자가 있으면 황제께 말씀 드리되 편안할 때 위급함을 잊지말라고 건재할 때에 패망함을 잊지 아니 함이 오래 존속하는 길입니다 이 나라가 동쪽으로부터 일어나 전국을 통치한 지가 二OO년에 가까워 이제까지 이르렀습니다.천하의 대세는 그 전복을 예기치 못합니다. 후세에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의례 영고탑(寧古塔)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지만 그 지역은 외지고 좁아서 쓸 만한 곳이 못 됩니다. 조선은 영고탑에서 강 하나가 격해 있을 뿐이요 조석에 굴뚝 연기를 바라보며 또 소리 질러 부르면 서로 들리는 거리인데 그 지역의 길이가 三OOO리나 됩니다. 동남방은 땅이 기름지고 서북방은 장정들과 말들이 날세고 굳셉니다. 산악이 三천리를 연해 있어 목재를 이루 다 쓸 수 없고 바다가 三면을 둘러 있어 생선과 소금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경상도의 인삼은 천하도록 많고 제주도의 좋은 말은 그 수를 헤아릴수 없습니다. 산물 역시 천연석으로 많고 좋은 나라이지만 이씨(李氏)가 미약하여 실오리 같아 겨우 끊어지지 않고 여군(女君)이 정치를 하니 세력 있는 신하들이 권세를 부리므로 행정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탄식하고 원망합니다. 이러한 때에 내정(內政)을 펴 의복을 차별없이 입게 하고 서로의 왕래를 터 이 나라를 영고탑에 소속시킴으로써 황제의 영토를 넓히고 안주와 평양 사이에 안무청을 설치하여 친왕(親王)을 임명하고 그 나라를 감독 보호하게 하되 은덕을 후이 베풀어 민심을 굳게 단결시켜 놓으면 전국에 사변이 일어나더라도 요동과 심양 동쪽을 갈라 근거로 삼아 그 험한 산악 지대를 방위할 수 있고 또한 장정들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가 유사시 출동시키면 이것이 튼튼한 기초를 만대에 이루도록 마련하는 것입니다. 또 들으니 그 나라 왕이 나이 어려 아직 왕비를 맞지 않았다 하니 만약 종실(宗室)의 딸 하나를 골라 공주라 하여 시집을 보내어 왕비를 삼는다면 왕은 사위가 되고 이 다음 왕은 외손이 되므로 자연 황조에 충성을 다할 것이요 또한 몽고를 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를 놓치고 계획을 세우지 아니 한다면 하루 아침에 다른 사람이 불쑥 일어나 점거하고 질서를 잡아 병력을 강하게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유리하지 아니 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재난을 가까이 준 것이 되지나 않을까 하여 두렵습니다. 때가 왔는데도 실행치 아니하면 나중에 후회하여도 어쩔 도리가 없으니 원컨데 폐하께서는 결단을 내리소서 대강 이런 뜻으로 말씀 드리되 중국 조정의 정세에 맞도록 조절하시어 전하시길 바라옵니다. 만약 황제가 이를 들어주고 교우들이 중간에서 일을 주선만 한다면 성교가 차차 크게 퍼져 막아 낼 수 없는 세력으로까지 이를 가망이 있습니다. 중국에는 이미 교우가 많고 접촉할 길도 넓으니 어찌 황제에게 진언할 길이 없겠습니까. 곁에서 듣건데 작년에 칙사로 왔던 영국 학사가(英學士)왕후의 친적이고 또 주교님과 가까운 사이이며 그 집안 남자 종 중에 교우가 있다 하오니 혹시 그 인연으로 이 계획을 추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런 인물이 있어 힘써 주장한다면 황제는 받아 들일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이유 없는 내복(內服)을 명할 수는 없으니 반드시 한 두 가지 죄과가 있은 다음에라야 이것을 구실로 계획을 추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에는 불공평하고 불법한 행동이 허다 하오나 일일이 다 말씀 드릴 수는 없고 다만 역서(時憲書)사사로 만든 일과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사사로이 만든 일 이 두가지는 중국 조정이 평소에 알면서도 문책하지 아니한 일이오니 한번 조사해 보면 족히 죄목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계획은 황실에도 유익할 뿐 아니라 이 나라에도 해 될 것이 없습니다. 현재 이나라는 형세가 위급하여 결코 오래 지탱하기 어려운데 만일 내복(內服)이 되면 간신들의 눈초리가 저절로 그칠 것이요 따라서 리씨의 명성과 위세가 배로 커질 것이매 어찌 이것이 성교의 안정뿐이겠습니까. 이 또한 국가의 복이기도 합니다. 청컨데 현실에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지 마시고 채납하옵소서. 지난해 내리신 편지에 수년 후에는 큰 배를 보내 시겠다는 분부를 박았습니다만 이제 는 정세가 이미 변하였으므로 무턱대고 와서는 성공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꼼짝 못하고 명령에 복종시킬 수 있는 계책이 있습니다. 하오나 그대로 실행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만 진술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나라의 병력은 본래 미약하고 모든 나라 가운데 맨 끝인데다가 태평세월이 二OO년을 게속해 왔으므로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위에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어진 신하가 없어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기만 한다면 흙더미처럼 무너지고 기와장처럼 흩어질 것이나 그대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할 수 있다면 군함 수백척과 정예군 五六만명을 얻어 대포와 무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말도 잘하고 사리에도 밝은 중국선비 三,四명을 데리고 해안에 이르러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되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여자와 재물을 탐내어 온 것이 아니고 교종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에 생령을 구원하러 온 것이니 귀국에서 한 사람의 정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 들이신다면 우리는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도 없고 절대로 대포 한방이나 화살하나 쏘지 않고 티끌하나 풀 한 포기 건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한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는 북치고 춤추며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천주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반듯이 천주의 벌을 집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으리니 왕께선 한사람을 받아들여 나라에 벌을 면하게 하시려는지 아니면 나라를 잃더라도 그 한사람을 받아들이지 아니 하실는지 그 어느 하나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천주 성교는 충효와 자애를 가장 힘써 의무로 삼으니 온 나라가 봉행하면 실로 한국에 한없는 복이 올 것이요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왕께선 부디 의심치 마옵소서 라고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서양 여러나라가 참된 천주를 흠승하므로 오래 태평하고 길게 통치하는 결과를 동양 각국에 미치게 하리니 서양선교사를 용남하여 맞아 드리는 것은 매우 유익하며 결코 해 받는 것이 없음을 거듭 타이르면 반드시 온나라가 놀라고 두려워 감히 쫒지 아니하지 못할 것입니다. 군함에 척수와 군대의 인원수가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은 숫자면 대단히 좋겠지만 힘이 모자란다면 배 수십척에 군인 五六천명이라도 족할 것입니다. 수년 전에 서양상선 한척이 이 나라에 동네에 표류하여 왔을 적에 한 교우가 배에 올라 자세히 보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그 배 한척이면 우리나라 전함 백척은 족히 대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성교를 혹독하게 해치는 것은 그 인간성이 잔악해서가 아니라 실은 두가지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하나는 당파끼리의 논쟁이 몹시 심하여 이런 것을 빙자하여 남을 배척하고 모함하는 자료로 삼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견문이 넓지 못해 안다는 것이 오직 송나라 학문뿐이므로 자기와 조금만 다른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친지간의 큰 괴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를 비유하면 궁벽한 시골의 어린 아이가 방안에서만 자라 바깥사람을 못 보다가 우연히 낯선 손님을 만나면 반듯이 깜짝 놀라 우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이나라에 광경이 이와 같은데 실은 의심이 많고 겁이 많고 어리석고 무식하고 약하기가 천하에 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께서 자수한 뒤에도 교우들이 소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오래동안 감히 사형 집행도 못하다가 교우들이 어찌하여 못할 것을 확실히 알고 나서야 담이 커져 신부를 학살하였습니다. 이처럼 의심과 두려움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때를 타서 꼭 처부술 기세로 임하여 그 마음을 떨리게 하고난 다음 근심할 것이 없다는 이치로 잘 타일러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 인도하면 받아들이고 않고 간에 이해(利害)가 비교될 것이요 또 위력을 두려워하고 편안을 원하는 마음에서도 감히 거절하지 못 할 것입니다. 이 계책이 어렵기는 하나 실현만 된다면 반듯이 조금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형편이 허락하여 극력 추진해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행동은 그 실행이 쉽고 어렵고 간에 성교의 표양에 맞지 않는 방법이라고 하나 죄인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 나라에서는 一O년 이래 순교한 이가 극히 많아 성교회의 사제와 국가의 중신들까지 꼼짝 못하고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악질 도당들이 역적의 누명을 그들에게 억지로 뒤집어 씌었지만 사실상 털끝만큼도 나라에 충성하지 않은 증거를 얻지 못했고 그들의 착하고 어진 태도는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도 간직해져 있습니다. 만일 이 나라에 교우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내란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악한 표양 일 것입니다. 서양으로 말하면 성교의 본 고장으로 二천년 이래 모든 나라에 성교가 전파되어 귀화되지 않은 곳이 없는데 이 탄알 만한 이 나라만이 순종치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완강히 대항하여 성교를 잔인하게 박해하고 성직자를 학살하였습니다. 이런 것은 동양에서 二OO년 동안 없었던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문책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거룩한 가르침에 의거하면 전교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그 죄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중하다 했으니 이 나라를 전멸한다 해도 성교의 표양에 해로울 것이 없을 진대 지금의 이 밥법은 오직 명성과 기세를 크게 벌려 전교를 용납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백성이 살해되지 않고 재물을 빼앗김이 없으니 인애와 정의의 극치로서 오히려 뛰어나는 표양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표양이 아름답지 못할까 걱정하리이까 다만 힘이 미치지 못할까 걱정할 뿐입니다. 또 어떤 이는 이와 같이 하면 그것이 중국에 보고 되어 북경 천주당에 해가 미칠 것이라고 합니다만 저는 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편지 가운데 설명하기를 교종께서 일찍이 신부 아무에게 명하여 귀국에서 전교하게 하였던 바 귀국이 용남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학살하였고 이제 또 전교사를 받아 들이지 아니 하니 우리는 마땅히 사절을 보내어 귀국의 죄를 중국에 알리고 압박 받는 백성을 위로하고 학정하는 나라의 죄를 밝히리라 하면 이 나라는 중국 선비를 불법 학살한 죄가 드러나게 중국 정부에게 문책을 당하게 될까봐 감히 보고조차 못할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책문(柵門)안에 가게를 차리는 일이 현재로선 가장 요긴하고 시급한 일로 빨리되면 될 수록 더욱 다행하겠습니다. 그 외의 계획도 三四년 안에 시행하여야 가히 성공을 바랄 수 있겠습니다. 이 때를 지나면 세상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습니다. 죄인들은 하루를 보내기가 한 해와 같은데 스스로 할 힘은 없고 바라는 마음만이 심히 간절하오니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구원하여 주옵소서. 금년 박해에 이름이 알려진 교우로서 화를 면한 사람이 극히 적은데 남아 있는 사람은 숨을 죽이고 엎드려 아주 멸망하여 없어진 듯이 보여야만 성교가 보존되겠으므로 혹은 장삿군이 되어 돌아다니고 혹은 살던 곳을 떠나 다른데 이사를 가는 등 길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또한 대재와 소재 날을 당할 때 마다 신자라는 것이 폭로되기 쉬우므로 감히 간청하오니 현재 이 나라 교우들로서 여행하는 자에게는 대 소재를 막론하고 일체 면제해 주셔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겨 생명을 보존하게 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한 사람이 지난 번 고해 때에 다음번 고해 때 까지 한 주일 동안에 이틀씩 대재를 지키기로 허원을 했었는데 박해가 일어난 뒤로 이 사람이 집을 떠나 피신하여 헤매다가 산골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산 중 음식이 영양이 적을 뿐 아니라 또 객지의 형편이 몹시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재를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허원을 깨뜨린 죄가 있을 것 같아 감히 간청 하오니 너그러이 용서하시옵고 아울러 여쭙건데 기왕에 지키지 못한 것이 죄가 되지는 않겠는지요. 천주 강생 후 一八O一년 시몬 다두첨례 후 一일 죄인 도마 등은 두 번 절하옵고 삼가 갖추나이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


1. 인물:교회창설 초기 지도적 신도중의 하나이며 순교자.

자는 덕소(德紹),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남인(南人) 명문의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黃錫範)과 모친 이씨(李氏)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5품 정랑직(正郞職)을 역임한 바 있으며, 모친은 이동욱(李東郁)과 8촌간인 이동운(李東運)의 딸이다. 그는 1790년(正祖 14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정조(正祖)의 특별한 격려를 받았고, 정조가 그의 손을 잡아주기까지 하였으므로 그는 이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 한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직후 정약용(丁若鏞)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 명련(命連, 마리아)과 결혼하였다. 그는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으며 정약종(丁若鍾), 홍낙민(洪樂敏)과 함께 천주교 신앙에 관하여 진지한 토론을 한 후, 알렉산데르(Alexander)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그의 영세 직후인 1791년 10월(음)에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발생하여, 그의 많은 친척과 친우들이 천주교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를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救世之良藥)으로 확신하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포기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조상에 대한 제사의 포기는 관직에의 진출을 단념함을 뜻하는 일이었다. 그는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신부최인길(崔仁吉)의 집에서 만난 후 주신부의 측근인으로 활동하였고, 주신부가 조직한 명도회(明道會)의 주요 회원이 되었다. 즉 그는 남송로(南松老), 최태산(崔太山), 손인원(孫仁遠), 조신행(趙信行), 이재신(李在信) 등 5인과 함께 명도회의 단위 조직 중 하나를 구성하여 이를 인도하고 있었다. 앞날이 촉망되던 양반인 그가 대부분이 양인이었던 이들과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을 다져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1796년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柳觀儉), 권일신(權日身) 그리고 최창현(崔昌顯)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주문모신부와 협의하여 북경의 주교에게 해로(海路)를 통한 서양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청년 황사영이 이와 같은 당시 교회의 극비상황에 간여하고 있음을 보면, 교회 내에서 그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798년 이후 자신의 향리인 경기도 고양(高揚)을 떠나 서울에 이주하여 애오개[阿峴洞], 북촌(北村)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신도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지냈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며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직전에는 가장 활동적인 교회지도자로 부상되어 나갔다. 19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약종 등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다. 그는 1801년 2월(음) 초순 체포를 피하여 서울 도성(都城) 안을 전전하다가 상복(喪服)으로 변장하고, 스스로는 이상인(李喪人)이라 자처하며 피신 중에 만난 김한빈(金漢彬)을 따라 충청도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였다. 김한빈은 전라도 고산(高山) 출신으로 충청도 청양(淸陽)에 이주했다가 서울로 다시 옮기어 살던 중 신유박해를 만난 인물이다. 김한빈은 충청도 청양인(淸陽人) 김귀동(金貴同)이 지방에서 일어났던 박해를 피애 제천(堤川)에 피신하고 있음을 알았으므로 황사영을 김한빈의 처소로 인도했던 것이다. 제천으로 피신한 황사영은 김귀동의 집에서 은거하며, 자신이 겪은 박해상황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김한빈을 1801년 3월(음) 서울로 보내 박해의 진행과정을 알아오게 하였다. 그는 제천에서 교회의 재건방안을 생각하거나, 시작(詩作)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이 때 그가 작성한 기록들은 ‘백서’(帛書)를 쓰는데 있어서 기본적 자료가 되었다. 한편 박해를 피해 떠돌아다니던 황심(黃沁)은 김한빈이 제천으로 떠났음을 탐문하고서 김한빈만나기 위해 제천으로 왔다. 황심은 이미 1798년과 1799년 쇄마구인(刷馬驅人)의 명색으로 북경에 가서 주문모신부의 서한을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했던 인물이었다. 8월 26일(음) 황심만나 황사영은 박해의 경과와 교회의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 주교에게 발송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이 백서는 황심의 체포로 인해 사전에 발각되었으며, 황사영 자신도 1801년 11월 5일(음)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소재해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되었다. 한편, 그의 처형 이후 황사영이 소유했던 가산은 적몰(籍沒)되었고 그의 노비(奴婢) 5인은 관노비로(官奴婢)로 몰수되었다. 그리고 그의 숙부 황석필(黃錫弼)은 경흥(慶興)으로 정배되었으며, 그의 처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군에 정배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나 추자도(秋子島)에 정배되었다가 하(下)추자도 예초리에서 성장하였다.


2.황사영 백서:백서는 비단에 씌어진 글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박해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건의 보고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비밀문서이다. <황사영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씌어진 것인데, 모두 122행 1만 3,3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이 백서는 ‘서론’, ‘본론’, ‘결론, 대안제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은 1행부터 6행까지로서, 여기에서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본론’은 7행부터 90행까지로서 전체 분량 중 거의 70%에 해당된다.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황사영은 여기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교회관계 사건들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있다. 즉 그는 최필공, 이중배, 김건순, 권철신, 이안정, 이가환, 강완숙, 최필제, 오석충, 정약종, 임대인, 최창현,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 김백순, 이희영, 홍필주, 조용삼, 이존창, 유항검, 윤지헌 등의 체포와 죽음을 증언하고 있으며, 주문모신부의 활동과 자수 및 죽음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밝혀 주고 있다. 한편, 91행 이하의 ‘결론’ 내지 ‘대안제시’의 부분에서는 먼저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 박해의 종식에 관한 강한 열망을 표현해 주었다. 그리고 청국교회와의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에 이어서 신앙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그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淸)의 위력에 의존하여 신앙자유를 얻는 방안을 먼저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국이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하여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주기를 요청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청국의 감호(監護)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받아 보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그는 서양의 무력시위를 통해 신앙자유를 얻는 방안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5, 6만명을 동원하여 조선에 신앙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이어서 그는 박해로 인해 교회의 규칙을 지킬 수 없음을 호소하며 대소재(大小齋)의 관면을 청하는 내용의 글로 백서를 끝맺고 있다. 이 백서의 발신자는 황심 도마(多默)로 되어 있다. 황심은 이미 조선교회의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한 바 있었던 인물이므로, 황사영은 그의 이름을 빌어 조선교회의 사정을 보고하고 대책의 마련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백서가 작성된 곳은 배론김귀동 가(家)였다. 그가 백서에 씌어진 사실들을 수집 정리하고 구상하기 시작한 때는 자신이 배론으로 피신했던 1801년 2월(음) 전후로 파악된다. 그는 피신 중 박해에 관한 사실을 김한빈 등을 통해 계속 수집하였고 이를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6일(음) 황심만나게 되자 그날 밤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황심 편에 북경으로 발송하려다 미수에 그쳤던 것이다. <황사영 백서>는 1801년 압수된 이후 의금부에서 계속 보관해 오다가 1894년 옛 문서들을 파기할 때 그 원본이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뮈텔 주교는 1925년 7월 5일(음)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이 자료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하였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백서의 사본은 발각 당시부터 작성되기 시작해서 ≪벽위편≫(闢衛編), ≪신유사학죄인 사영 등 추안≫(辛酉邪學罪人嗣永等推案)을 비롯한 몇몇 자료에 재수록되어 있다. 한편 뮈텔 주교는 백서의 원본을 로마로 발송하기 이전 이를 실물 크기대로 동판에 담아 인쇄하여 학계에 배포하였다. 또한 한국 교회사연구소에서는 1966년 이를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황사영 백서>의 번역본은 1925년 뮈텔프랑스어 역본(譯本), 1946년 야마구찌 마사유끼(山口正之)의 일본어 번역본, 1976년 정음사에서 간행한 윤재영(尹在瑛)의 한굴번역본 등이 있다.


황사영은 “천주교 신앙이 백성과 나라에 해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정에서 이를 반드시 금지시키고자 하니, 천주교를 힘써 지켜보고자 하는 의도”(邪學罪人嗣永等推案)로 이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박해로 인해 죽어간 자신의 동료들에 관한 기록을 철저히 남기어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그는 박해의 상황을 철저히 기록해서 전달함으로써 조선교회의 재건에 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본론’의 기록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황사영 백서>는 신유박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그는 ‘대안제시’의 부분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 주었다. 1801년 당시 조선의 사회에서는 청나라의 정통성과 문화를 부인하는 북벌론적(北伐論的) 배청감정(排淸感情)과 함께, 청국의 문물을 적극적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북학론(北學論)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신앙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방안으로 조선을 청국에 종속시켜 보고자 하였다. 그의 이 발상은 북벌론자는 물론이고 북학론자에게도 수용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또한 그는 서양선박과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그의 발상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서양선박과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한 바 있었던 초기 교회의 경험에, 박해라는 극한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무력의 요소가 결부되어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회에 널리 유행되고 있던 해상세력(海上勢力)의 조선침략에 관한 위기의식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발상은 달레(Dallet)의 표현대로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급박한 박해의 상황 때문에, 조선왕조가 존재하는 한 신앙자유의 획득이나, 자신을 포함한 신도들의 생명유지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왕조의 존재를 부정해 보려는 ‘몽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대안제시’가 ‘몽상’의 일종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이 ‘몽상’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 이 ‘몽상’은 그의 죽음에 있어서 직접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황사영의 ‘대안제시’를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던 상황 아래서 제시되었던 그의 ‘몽상’을 반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데에는 재고가 요청된다. 그러나 그의 ‘대안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신앙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3. 황사영 백서사건:<황사영 백서>가 발각됨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천주교탄압 사건으로서, 신유박해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된다. 이로써 주문모신부의 자수와 처형 이후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크게 일어났다. 1801년 9월 26일(음) 황사영이 체포됨으로써 이 사건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이들의 체포에 앞서 황심과 가까웠던 옥천희(玉千禧)가 체포되어 이들을 함께 국문하게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 황심, 옥천희, 김한빈 등 관련인들은 형조에서 취조를 받았고, 사건의 주범인 황사영은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황사영에 대한 신문은 10월 9일(음)에 시작되었다. 그의 신문이 체포 이후 10여일간 지체되었던 것은 사건의 중요성으로 인해 이 사건과의 관련사항을 파악하고 사건에 대한 대안을 사전에 마련하려 했기 때문이다. 신문은 주로 ‘대안제시’의 반역적 요소를 추궁하는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황사영 개인 및 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찾아내려 하였고, 백서의 사본이 청국에 전달되었을 가능성 등을 집중적으로 신문하였다. 신문의 결과 황심김한빈은 10월 23일(음)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황심에게 적용된 죄명은 모역동참죄(謀逆同參罪)였으며, 김한빈은 지정은장죄(知情隱藏罪)가 적용되었다. 그리고 11월 5일(음) 이사건의 중심인물인 황사영은 궁흉극악 대역부도죄(窮凶極惡大逆不道罪)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또한 김귀동 및 그 밖의 관계자와 가족들이 처벌됨으로써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1801년 10월(음)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천주교 탄압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진주사(陳奏使)의 임무도 부여해주었다. 이때 파견된 진주사 조윤대(曺允大)일행은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16행 923자로 축소하여 청국의 예부(禮部)에 보고하였다. 이 축소본을 흔히 <가백서>(假帛書)라 부르고 있다. 이 가백서에는 청국의 조선 감호책(監護策)이나 종주권(宗主權) 발동 등에 관한 내용은 완전 삭제시켰으며, 서양선박의 요청사실과, 월경통신(越境通信) 등의 사실을 이조흉계(二條凶計)로 지적하였다. <황사영 백서>가 발각된 이후 청국인 주문모신부의 처형 사실이 청국에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조정에서는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진주사를 파견하여 신유박해 전반에 관한 청국의 이해를 촉구하고, 주문모신부의 처형에 따를 수 있는 청국측의 반발을 예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진주사 조윤대의 파견은 <황사영 백서> 사건을 외교적 측면에서도 마무리짓는 것이었다. (趙珖)


[참고문헌] 黃嗣永帛書,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 辛酉邪學罪人嗣永等推案 / 李基慶, 闢衛編, 曙光社, 1978 / 李晩采, 闢衛編, 闢衛社, 1931 / 邪學懲義, 弗咸文化社, 1977 / 尹在瑛譯, 黃嗣永帛書外, 正音社, 1967 / 山口正之, 黃嗣永帛書の 硏究, 全國書房, 大阪 1946 / 趙珖, 黃嗣永帛書의 社會思想的 背景, 史叢, 高麗大 史學會, 1977.

 

 

▒ 제천의 배론성지와 황사영백서 [기자 : 서용선]

 

  성지가 있는 계곡의 모양이 배 밑 같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린다는 배론성지는 제천의 배군산과 구학산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은 배론의 골짜기엔 박해를 받아오던 천주교 신앙인들이 감시의 눈을 피해 숨어들어 옹기를 구우며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또한 배론성지의 옹기토굴은 울분의 황사영 백서가 씌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황사영 백서란? 흰명주 자락에 13,311자로 씌어진 탄원서이다. 황사영은 16세에 장원급제한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속할 정도의 수재였다.

황사영은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듣고 벼슬을 마다한 채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를 받아 신앙의 길을 택한다.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며 배론으로 숨어든 황사영은 주문모 신부의 처형소식들 전해 듣고 울분으로 북경 구베아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적는다. 가로62cm 세로38cm의 흰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씌어진 백서는, 조정의 종주국인 청의 위력에 의존하여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주기를 요청했고 청국의 감호를 요청하여 조선을 청의 한 성으로 편입시킴으로서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받기를 희망했다.


또한 그는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5,6만 명을 동원하여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희망을 적은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히고 황사영도 대역무도 죄인으로 27세에 능지처참 극형에 처해진다.

이 사건으로 황사영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 외아들은 추자도로 유배된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에 숨겨져 있다가 현재는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다.


언론사 방방곡곡 서용선 기자

 

 

배론과 황사영의 "백서"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의 백운산(白雲山)과 구학산(九鶴山) 줄기에 둘러 싸인 벽촌. 이제 신자들에게 익숙해진 '배론(舟論) 성지'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배론이란 명칭은 이곳 골짜기의 형상이 배 바닥처럼 깊고 길게 뻗어 있다는 데서 붙여졌다.
 
옛날 이 부근에는 아랫배론, 중땀배론, 윗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미륵재 등 6개 동리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교우촌이 있던 곳은 바로 점촌배론이었다. 이 점촌배론의 본래 이름은 '팔송정의 도점촌(陶店村)'으로,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충청도 남부에서 피신해 온 신자들이 옹기점을 운영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부르게 된 이름이었다. 그후 박해가 끝나고 다시 이곳에 돌아온 신자들은 1890년대에 와서 '사학(邪學)쟁이들의 옹기점'이라는 기억 때문에 전교 활동에 지장을 받을까 염려하여 마을 이름을 바꾸어 주도록 관계 당국에 요청하였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구학리 배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원주에서 가자면 동쪽으로 치악산 줄기의 끝자락에 연결되어 있는 가라피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 왼편에는 중앙선의 유명한 또아리굴이 있다. 또 남쪽으로 가자면 온갖 설화로 얽혀 있는 박달재를 넘어야 한다. 바로 이 두 고개처럼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하여 길고 긴 고난의 여정을 넘나든 곳이었다.
 
배론 사적지가 갖고 있는 특징은, 첫째 그 복음사가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점이고, 둘째 다른 사적지와는 달리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 함께 간직해 온 곳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요, 유명한 황사영(알렉시오)의 "백서"(帛書)가 탄생한 곳이며,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또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여러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배론 교우촌에 대한 기록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부터 나타난다. 이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유일한 목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는 것을 본 황사영은, 그 해 2월 말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와 강원도를 거쳐 이곳으로 숨어 들게 되었다. 그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던 교우 김귀동이 그를 받아들여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고 그의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현재 배론에 조성되어 있는 토굴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최근에 다시 조성한 것이다.
 
황사영은 이후 토굴에 은거하여 자신이 겪은 사실들과 김한빈(베드로), 황심(토마스) 등이 알아 오는 박해 내용들을 세명주에 적어 나갔다. 이것이 '명주에 담은 신심', 곧 "백서"로, 122행, 13,384자에 달하는 장문의 서한 형태의 글이다. 그 내용은, 박해의 원인과 "백서"의 작성 이유를 기록한 첫 부분, 신유박해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둘째 부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셋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황사영은 이 서한을 북경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전달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달리 결정되고 말았다. 북경 주교는 조선 교회의 소식을 듣기 위해 간절하게 밀사들을 기다렸지만 하루하루가 헛수고였다.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책임을 맡은 밀사 옥천희(요한)과 황심이 9월에 체포되었고, 얼마 뒤에는 황사영도 배론에서 체포되고 만 것이다. 오히려 "백서"는 박해자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렇게도 신앙의 자유를 고대하던 황사영은 1801년 11월 5일(음력)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병선 수백 척에 정병(精兵) 5-6만, 대포 등 날카롭고 강한 병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을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3-4명을 데리고 오십시오. 그리고 이 나라의 해안에 정박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선교를 용인하고 우호 조약을 체결하도록 요구하십시오. 그리고 국왕에게 '한 사람의 선교사를 받아들여 온 나라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라.'고 요청하십시오(황사영의 "백서", 110-111행 중에서).
 
이처럼 황사영은 무력을 통한 선교의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우호 조약 체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냐? 모반이나?'의 갈림길에서 방황해야만 했던 조선의 신앙인이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뇌도 민족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비록 전근대적인 민족의식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결코 수긍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훗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하느님의 종'을 선택하면서 황사영을 제외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신심과 순교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차기진, 사목 246호(1999년 7월), pp.123-124>
출처 : 세계를 읽어주는 나뭇잎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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