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地巡禮

상홍리 무명순교자 묘와 삼홍리 공소 방문기

뚜르(Tours) 2010. 8. 23. 01:28

 상홍리 무명순교자 묘와 삼홍리 공소 방문기

 

 

 

병인박해 때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목격하였던 이주필, 이병준, 임인필, 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1935년 서산 동문동 성당의 제4대 범 베드로(1903-1946; 재임 1932.7 - 1946) 신부가 생매장지 일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 및 묵주, 십자가를 수습하여 서산군 음암면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습니다. 그리고 1995년 9월 이를 다시 해미 성지로 이장하여 본래의 순교터인 현 순교자 기념탑 앞에 모셨습니다.

 

 상홍리 순교자 묘소는 바로 해미 조산리 진둠벙과 여숫골에서 생매장 당한 위대한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모셨던 곳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 바로(범 베드로) 신부는 해미 하천변에 생매장 된 무명순교자들의 유해를 본당 총회장 백낙선(요한)의 가잿골 수원백씨 문중 묘역 상단에 안장했습니다.

 

바로 신부는 1930년 6월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고 1932년 8월 5일 서산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1937년에는 서산 성당을 신축하였습니다. 사목활동에도 열심하였던 바로 신부는 어느 날 봉성체 중에 병환 중에 있는 교우가 영하지 못한 성체를 대신 영하고 결국 병을 얻어 선종하였습니다.

  

상홍리 공소는 건물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합니다. 2대 주임 폴리 신부(1884-1950 데시데라토)가 부임해서 1919년에 지은 근대 건축물로 바실리카 양식의 평면 구조에 따라 전통적인 한옥의 평면을 변형하였으며, 건물 양쪽에 회랑을 두었습니다. 서양의 종교 건축물에 한옥의 전통 구성법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공소 전면부에는 1986년에 고 백남익 몬시뇰과 고 임진창 전 서강대 교수가 500만원을 지원해 복원한 종탑이 세워져 있는데, 마치 사찰(寺刹) 일주문 같은 양식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일품이라고 합니다.

 

종탑 전면부에 걸려있는 현판 '天主堂'(천주당)은 1919년 건립 당시 제작된 것이며, 상홍리 공소는 2007년 7월 3일 등록 문화재 제33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20년 상홍리 본당이 설립되었으나 1937년 서산읍 동문리(현 서산시 동문동)으로 본당을 옮기며 공소가 되었습니다.

 

 

 

 

 

 

상홍리 공소 제대

 

서산 동문동 성당 

 

2010년 9월 한국순교자 현양회에서 실시하는 지방성지순례 코스로 선정된 상홍리 순교자 묘와 상홍리 공소를 답사하고 돌아왔습니다. 9월 26일(일)과 28일(화), 2일에 걸쳐 순례할 계획이며 해미 지역의 최초 순교자인 인언민(1737-1800 마르티노) 기념비도 찾아 볼 계획입니다.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는 삽교 지역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단지에 넣어 삽교천에 던져 버리고 한양에 올라가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 때에 체포되었고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뒤 다시 해미로 압송되었습니다. 청주에서 받은 형벌로 인해 걸을 수 조차 없었기에 조정의 관리들이 사용하던 말을 타고 압송되었습니다. 해미옥에서 만난 이보현(李步玄, 1773-1800, 프란치스코)과 서로 권면하며 갖은 형벌과 배교의 유혹을 물리치고 변함없는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관장은 "인언민과 이보현을 같이 때려 죽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형리들은 그를 끌어내어 매질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형리 중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이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습니다. 이내 그이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합니다.

 

"그렇고말고,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