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地巡禮

[스크랩] [순례] 내포 성지 순례 예식서

뚜르(Tours) 2010. 9. 21. 23:46

내포 성지 순례 예식서

 

 

                               <차  례>

 

1. 갈매못 성지 순례 예식서

2. 다락골 성지 순례 예식서

3. 솔뫼 성지 순례 예식서

4. 신리 성지 순례 예식서

5. 여사울 성지 순례 예식서

6. 해미 성지 순례 예식서

7. 황새바위 성지 순례 예식서

 

 

1. 갈매못 성지 순례 예식서

 

 

1. 찬미가

 

   ○ 갈매기들  서로모여  푸른바다  찬미하니

       저수평선  멀리에서  뭉게구름  피어올라

       바람타고  지나가며  양팔벌려  화답하네

  

   ● 고요하던  이바다에  징북소리  요란하고

       예서저서  군졸백성  소리치며  모여들어

       오주예수  믿어전한  죄목형벌  들썩이네

  

   ○ 안다블뤼  말딩위앵  오메트르  주교탁덕

       주교복사  루가석두  배론회장  요셉주기

       두눈감고  열린하늘  바라보며  기도하네

  

   ● 술렁이던  너울파도  도열하여  부복하고

       갈매기들  날개접고  머리숙여  기도하니

       뭉게구름  날아와서  순교자들  태우려네

  

   ○ 한칼날에  신덕이요  두칼날에  망덕이라

       세칼날에  오주천주  애덕지심  증거하니

       천상성인  소리높여  순교영과  환호하네

  

   ● 사랑하올  임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흠숭하올  성부성자  삼위일체  하느님께

       우리모두  영원무궁  찬미찬양  드리세나. 아멘



2. 성지안내


  1) 갈매못이 성지가 되기까지


   오천(鰲川)의 鰲는 ‘자라 오’, 또는 ‘큰 바다거북이 오’(본래 글자는 鼇)에 내 ‘천’자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이름이다. 오천의 면소재지는 본시 조선왕 11대 중조 5년(1510년)에 축조한 고소성(姑蘇城, 시어머니 ‘고’+소생할 ‘소’, 또는 쉴 ‘소’)의 머리글자를 떼고 지은 소성리(蘇城里)이다. 성지가 있는 곳의 행정명은 보령시 오촌면 영보리인데, 1914년에 일제가 행정 구역을 통폐합을 하기 전에는 갈마연동(葛馬淵洞), 그러니까 칡 ‘갈’+말 ‘마’+못 ‘연’+ 마을 ‘동’이 모아져 만들어진 땅이름이다. ‘갈마연’(葛馬淵)은 ‘갈매기’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말뜻과는 상관없이 음만 비슷하게 나도록 하는 취음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갈매못’은 ‘갈매기연못’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미루어진다.

   오천은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던 수영이 있었고 수군 통제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 갈매못이 순교지가 된 이유 중에 하나로 오천면에 속하는 외연도와의 관련성이다. 외연도(外烟島)(烟=연기 煙)는 황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46년 6월에 불란서 해군제독인 세실 함장이 세 척의 군함을 끌고 서울 한강으로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한강을 못 찾고 외연도에 정박하여 당시 임금이었던 헌종에게 1839년(기해박해)에 불란서 선교사, 즉 앵베르 범 주교님, 모방․샤스땅 신부님 등 3명의 불란서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편지만 상자에 남겨놓고 돌아간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세실 함장의 조선 영해 침입 사건을 계기로 당시 옥중에 있던 김대건 신부님의 처형이 앞당겨졌고, 1866년 3월 30일 흥선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을 내친다는 의미에서 세실 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촌 수영으로 안 다불뤼 주교님, 오 메트르․민 위앵 신부님, 신자 황석두와 장주기 등 5인을 끌고와 외연도를 향하여 목을 쳐 처형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병인양요 때 불란서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였으나 조선군은 이를 물리치고 나서 불란서군이 진출하였던 양화진 절두산에서 1866년 10월에 수 천명의 신자들을 목베어 죽인 것과 같은 이유에서의 이곳은 서양인 처형 장소 선정과 관련이 있다.

   오기선 신부님의 “곡예사 같은 인생”(171면 이하)에 1927년 정규량(레오, 1883-1953) 신부님께서 이곳 갈매못을 발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 레오 규량 신부님은 홍성 상정리에 사는 이 베드로 회장을 시켜 구씨 영감을 이 곳 영보리에 보내어 치명터를 찾게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살며 대대로 아전 노릇을 하던 비신자 이선화라는 노인(당시 72세)으로부터 증언을 통하여 이곳이 안 다블뤼 주교님, 민 위앵 신부님, 오메트르 신부님, 장주기 회장님, 황석두 회장님 등 다섯 분이 순교하신 자리임이 확인되었다.


2) 병인박해의 원인


   1864년(고종 1년)에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를 위하여 남하 정책을 펼치면서 두만강 유역을 침범하고 함경도 경흥부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다. 더욱이 1865년에 그 요구가 더 심해지자 흥선 대원군은 몹시 당황하였고, 천주교 신자였던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는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를 불러  불란서인 장 베르뇌 주교님을 불러 불란서에 도움을 청하여 나라를 구하라고 말하였다. 박 마르타는 장 주교님이 거처하는 집주인 홍봉주에게 이 사실을 전하였고, 홍봉주는 도승지 남종삼(요한)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남하를 불란서의 힘을 이용하여 막을 수 있다는 청원서를 대원군에게 올리도록 하여 동의를 얻었다.

   대원군은 1865년 12월 말경에 장 주교님을 만나고자 하였고, 그 면담 주선책을 도승지 남종삼에게 맡겼다. 황해도에서 전교 중이던 장 주교님을 찾느라 시간이 걸렸다. 1866년 1월 31일에서야 승지 남종삼은 장 주교님이 서울에 당도하였음을 알렸으나, 그 동안 변한 정세로 대원군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대원군은 중국 북경에 보낸 사신으로부터 1860년 10월 영국과 불란서 연합군에 의하여 북경이 함락되었고, 이에 중국 정부가 영·불국을 보복하기 위하여 천주교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가했다는 서한을 보내 왔다. 이 서한과 1839년 기해년에 3명의 서양 선교사를 살해한 점, 1846년 6월 외연도에 불란서 함대가 출몰하여 그 살해 책임을 물은 점, 그래서 언젠가는 조선도 불란서의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고관들은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교섭을 반대하였다. 또한 당시 운현궁에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것과 천주교에 대한 풍양 조씨인 조대비의 비난 등이 대원군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결심하고 장 주교님을 비롯하여 불란서 선교사에 대한 체포령에 서명하였다.

   1866년 2월 23일에 대원군은 장 주교님을, 3월 1일에는 불란서 신부님 3명과 신자들을 연이어 체포하면서 병인년 천주교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때 잡힌 분들은 1866년 3월 7일부터 11일 사이에 서소문 네거리와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였다. 대원군은 처음에는 서양 선교사들을 조선 땅에서 없애버리겠다는 뜻에서만 박해를 가하였으나 1866년 5월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지 도굴 사건을 계기로 박해는 내포를 중심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 갈매못 순교자


  (1) 안 다블뤼 주교(1818-1866), 민 위앵(1836-1866)·오메트르(1837-1866) 신부


   한편 충청도에 대한 대원군의 박해는 1866년 3월 11일 현재 합덕 신리 공소 강당에서 은거하면서 전교도 하고 교리서나 성경도 출판하시던 안 다블뤼 주교님이 신리 공소에서 1Km 쯤 떨어진 거더리 손치호(니꼴라오) 회장 집에 기거하다 잡히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안 주교님은 당시 교구장 계승권이 있는 부주교님이었기에 1866년 3월 7일 당시 조선 교구장이셨던 장 베르뇌 주교님이 순교하자마자 조선 교구 5대 교구장이 되었다. 그리고 교구장이 된지 24일만인 1866년 3월 30일 예수 수난 주일에 바로 이 곳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한편 수원 새암골에서 전교하던 오메트르 신부님은 박해가 일어나 장 베르뇌 주교님이 순교하자 어찌할 바를 몰라 신리에 계신 안 주교님께 와서 의견을 물었다. 안 주교님은 신리 공소 옆에 있는 세거리 공소에서 전교하던 민 위앵 신부님을 불러 내포 지역은 평야 지역이므로 피신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오메트르 신부님은 지금은 합덕 궁원(점원리)이라 불리던 소들로 가고, 민 위앵 신부님은 세거리 공소로 다시 돌아갔다.

   그후 이틀 동안 거더리와 소들 마을에 일곱 차례나 포졸들이 난입하여 수색을 하였다. 안 주교님과 오메트르 신부님은 삽교천을 이용하여 신리 개천에서 출발하여 서해 바다로 피신하려고 밤에 배를 탔으나 역풍이 불어 도무지 배를 항진할 수가 없었다. 배를 타고 나가는 것 보다 거더리 손 회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아 가셔서 그 곳에서 묵었다.

   그런데 3월 11일 배론 신학교 출신 박 필립보를 앞세우고 포졸들이 거더리 손 회장 집으로 들이닥쳤다. 주교님은 회장님의 도움으로 부엌 볏짚 속에 제구와 함께 숨어있었다. 포졸들이 부엌에 쌓인 볏짚을 발로 걷어차자 그곳에서 제구 바구니가 나왔다. 다시 볏짚에 발길질을 하니 주교님 머리가 나왔다. 그만 놀란 포졸은 놀라 물러섰다. 주교님께서 당신들이 잡고자하는 사람이 나니까 나를 잡으라고 하였다. 포졸들은 주교님을 추궁하여 다른 불란서 신부님들이 숨은 곳을 대라고 하였다. 주교님은 민 신부님의 동의를 얻어 자수를 시키려고 포졸들이 미행하지 않는 조건으로 신자들을 시켜 민 신부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포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주교님 서한을 가지고 가는 신자들과 동행하여 덕산과 고덕 사이에 있는 봉산 쇄재에 숨어 있던 민 신부님을 체포하였다. 포졸들은 민 신부님한테 많은 질문을 하였다. 민 신부님은 점원리 소들에 숨어 있던 오메트르 신부님도 이미 체포되신 줄 알고 포졸의 물음에 대하여 그만 “오 신부님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러자 포졸들은 “이런, 이 근처에 서양 신부가 또 있구만!” 하였다. 다음날 3월 12일에 포졸들은 민 신부님을 끌고 안 주교님이 구금되었던 거더리로 갔다.

   한편 안 주교님께서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오 메트르 신부님은 피신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주교님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교님은 오 신부님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수하라고 하였다. 무죄한 신자들이 잡혀서 재산을 빼앗기고 협박과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는 불행에 빠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주교와 신부들이 죽으면 신자들은 해치지 않을 것이니 기꺼이 순교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 신부님은 거더리로 와서 자수를 하였다.

   마침내 포졸들은 주교님의 간청을 들어주어 다른 신자들은 풀어주었다. 그러나 주교님 복사였던 연풍 사람 황석두 루가만은 주교님을 따르겠다고 나섰다. 포졸들은 서울로 떠나기 전에 이틀 더 거더리에서 묵었다. 그리고 삽교천을 건너 추사고택이 있는 용궁리와 신례원, 신창과 아산 음봉, 평택을 거쳐 주교님을 비롯 4명은 서울로 압송하였다. 4분은 서울로 압송되어 배론 신학교 집주인인 장주기 요셉과 합류하였다.

   이분들에 대한 심문이나 고문 사항에 대해서는 문서로 남은 것이 없고 달레 교회사에는 “서울 가까이에서 사람을 죽이면 혼사를 얼마 나기지 않고 병중에 있는 고종에게 화가 미친다 하여 200리 밖에서 목을 잘라 처형하라.”고 기록하였고, 일성록(日省錄: 조선 22대 정조부터 말엽까지 역대 임금의 언동을 기록한 책) 1866년 3월 22일자에 “다블뤼, 오메트르, 위앵 등 서양인들과 사교를 따르는 황가를 모두 포도청에서 충청도 수영으로 보내 참수하고 효수하여 훈계가 되게 하라.”는 왕령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866년 3월 22일자 승정원 일기(承政院日記)에 “포도청에 갇혀 있던 죄인들 즉 다블뤼, 오메트르, 위앵, 황석두, 장주기 등 도합 다섯명이 포졸들에게 넘겨져 충청도의 수영으로 압송되었음을 전하에게 아룁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 주교님, 민 신부님, 오 신부님, 황석두, 장주기 회장 등 다섯 분은 서울을 출발하여 평택, 공세리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음봉면 동천리 바위에서 안 주교님은 포졸들에게 술을 대접하셨다. 그 바위를 오기선 신부님께서 절두산으로 옮겨 놓았으며 ‘오성바위’ 또는 ‘복자바위’라 부른다. 연풍 성지에 가면 안 주교님께서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포졸들에게 술을 대접하시는 조각상을 볼 수 있다.


  (2) 장주기 요셉(1802-1866) 회장


   장주기 요셉(본래 이름은 낙소 樂韶)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화성군 양감면 육당리)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문을 잘 알았는데, 25세 되던 1826년에 중병을 않다가 형수 김 발바라의 인도로 중국인 유방제 신부님한테 세례를 받았다. 그후 가족들을 모두 영세 입교시키고 교리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의 신앙심과 교리 지식을 인정한 파리 외방 나 모방 신부님에 의하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하여 제천 배론에 은거하였다. 1855년 김대건 신부님의 스승인 이 메스트르 신부님이 신학교를 세우고자 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사용하게 하였다. 그는 신학교를 관리하고 신부님들과 신학생들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농사를 지었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이 배론 신학교를 습격하여 두 신부님(푸티에르, 프티니콜라)을 체포하자 제천 근처 노럴골로 피신했다가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졸들과 관장은 장주기를 나이 많은 촌늙은이로 간주하고 처음에는 풀어주려 했으나 장주기는 순교하기를 갈망하고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끝까지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곳 갈매못으로 끌려와 주교님과 신부님들, 그리고 황석두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3) 황석두 루가(1812-1866) 회장


   황석두 루가는 충북 연풍의 부유한 양반 집안 3대 독자로 태어났다. 황석두는 20세가 되던 해에 과거 시험을 치르러 서울로 가던 중 어느 주막에서 묵다가 한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 감동하여 교리책을 얻어 가지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과거급제를 바랐던 부친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교리서를 탐독하여 부친을 비롯하여 부인과 다른 가족들을 권면하여 입교를 시켰다. 그의 뛰어난 교리지식과 덕행이 주교님과 신부님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복사를 거쳐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님에게 사제품을 주었던 고 페레올 주교님의 허락을 받고 절제와 금욕을 위하여 아내와 별거하며 독신으로 생활하였다. 황석두는 안 주교님을 도와 중국의 예수회 신부 알레니가 한문으로 저술한 회죄직지(悔罪直指: 고해성사를 보지 못하고 임종을 맞는 이가 상등통회로 구원을 얻는 길을 가르친 책이다)를 번역하는 등 신리 공소에서 교리서를 번역하고 사전을 출판하다가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안 주교님은 황석두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하였으나 주교님과 함께 순교하기를 간청하였다. 마침내 서울로 압송되어 1866년 3월 23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달 30일 이곳 갈매못에서 안 주교님과 두 신부님들, 그리고 장주기와 함게 순교를 하였다.


  (4)그 밖의 순교자들


   박베드로, 손치양(요왕), 이영중, 이발트로메오, 임운필 등이 있다.

   박 베드로는 본디 충청 신창 사람이라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도리를 배워 열심히 수계하더니 창말서 살 적에 무진년에 홍주 포교에게 잡혀 “네 천주학을 하느냐?” 묻거늘 “내 과연 성교를 하노라” 하매 즉시 잡아 본관에 가 문목한 후 수영으로 보내어 진 친 곳에서 베어 죽이니 나이 24세더라. 증인은 면천 찻티에 사는 그 아우 박 필립보이다. (증언록 120번 224쪽, 치명일기 727번, 수영)

   손치양 사도 요한은 기해년에 치명한 손 안드레아의 사촌이며 홍주 거더리에 살더니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 몇 달 동안 갇혔더니, 이에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굴총하던 배주인이라 하여 큰 죄인으로 잡아 수영까지 보내어 치명하니 나이 50세요 때는 무진년 5월이라 증인은 재종손 요한이라.(증언록 86번 143쪽, 치명일기 728번, 충주)

   이영중은 본래 공주 서면 사람이라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에 갇혔더니, 이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때 태워 온 배의 주인이라 하여 손치양과 매 한가지로 수영까지 끌고 가 효수하니 나이 45세더라. (치명일기 729번, 수영)

   이 발토로메오는 본디 충청 덕산 사람이라 그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수계하더니 병인년 군란 때 경포에게 잡혀가다 도망하였더니 경오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 수영으로 가 진터에서 침수되니 나이 24세더라. (증언록 120번 222쪽, 치명일기 730번, 수영)

   임운필은 임 토마스(치명일기 636번 순교자)의 재당숙이라 여러 일가의 문장되므로 수하 사람을 잘 교훈하여 성교에 열심하더니 병인년 군난 때 모든 가족들이 많이 잡혀가 죽고 나이 많은 고로 피하여 나가지 못하여 집에 있어 끝을 보려 하더라. 홀연히 수영 포교가 들어와 잡거늘 “내 집은 성교함으로 인하여 아랫사람들이 많이 죽고 나도 성교를 봉행하니 너희 뜻대로 하라” 한즉 잡아 수영으로 가 수사가 문초한 후 즉시 교하여 죽이니 나이 70세더라. 증인은 해미 마새 사는 그 재종손 임 베드로이니 나이 43세다. (증언록 120번 237쪽)


  4) 갈매못에서의 군문효수 순교


   1866년 3월 30일 예수수난주일날 당시 이곳 수영장 임상준(任相竣)은 갈매못 성지 좌우로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깃발과 군사들을 세우고 장대 세 개를 묶어 마치 사진기 다리처럼 세 갈래로 벌려 그곳에 3명의 서양인을 묶게 하였다고 한다. 목을 칠 때는 나무토막에 목을 걸쳐놓고 쳤는데 목을 치기 전에 형리들은 주교님과 신부님들, 그리고 회장님들에게 상감이 있는 서울을 향하여 절을 하라고 하였는데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형리들은 강제로 절을 시키고 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망나니가 목을 자르고 나서 구경꾼들에게 돈을 내라 하니 모두 내뺏다고 한다. 그 당시 망나니들은 보령에서 데려온 사람들로서 어느 백정이 거두는 쌈꾼들이었다고 한다.

   순교 후 이곳 모래사장에 버려졌는데 3일 뒤 황석두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졌다. 나머지 4구는 3일 뒤에 형장 모래사장에 묻었다가 6월초 신자들이 야음을 이용하여 홍산 남포 서들골로 이장하였다. 1882년 3월 백(Blanc) 신부님의 지시로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졌다. 2년 뒤인 1894년 다시 서울 용산신학교로 옮겼다가 1900년에 명동성당에 안치, 1967년부터는 절두산 순교자기념관 지하성당에 안치되었다.

    안 주교님, 민 신부님, 오 신부님, 황석두, 장주기 회장 등 다섯 분은 1968년 10월 6일 베드로 대성당에서 바오로 6세 교황님에 의하여 복자품에, 1984년 5월 6일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하여 성인품에 올랐다. 1975년 9월 당시 대천 본당 주임이었던 정용택(요한) 신부님에 의하여 순교비가 갈매못에 세워졌고, 1984년 당시 대천 본당 주임이었던 손만재(요한)신부는 대흥동 본당 신자 정 에밀리오의 봉헌을 받아 이 자리에 시성 기념비를 세웠다.


  5) 병인박해의 확산과 종료


    1867년에 들어서서도 박해는 계속되어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 이러한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말살 정책은 1868년 4월(음)에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가 도굴하려다 발각되면서 격렬해졌다. 특히 충청남도 내포 지역에 박해가 극심했다. 1869년부터 1870년까지는 박해가 잠시 주춤하다가 1871년 신미양요로 다시 치열해져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1866년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대원군이 실각하는 1873년까지 계속되었다. 1886년 한불조약을 맺고 나서야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는 끝나게 된다.



3. 영성 강화


   안 다블뤼 주교는 오 메트르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수하라고 하였다. 무죄한 신자들이 잡혀서 재산을 빼앗기고 협박과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는 불행에 빠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주교와 신부들이 죽으면 신자들은 해치지 않을 것이니 기꺼이 순교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안 주교는 서울에서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 회장 등과 함께 갈매못 형장으로 오던 도중 아산 음봉면 동천리 바위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으로 포졸들에게 술을 대접하셨다. 포졸과 주교, 신부, 회장들과의 관계는 절망의 관계였다. 그러나 음식을 포졸들에게 대접함으로서 그 절망이 관계에 지극한 자비지심을 불어넣어 삶의 기쁨과 희망을 되살렸다.

   또한 황석두는 안 주교님이 체포될 떠나기를 거절하고 자기스승인 동시에 아버지인 분(주교님)을 따라가겠노라고 선언하였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하권 428-429면 참조). 진정한 우정이나 사랑은 환난 만났을 때 드러난다고 하였다. 또한 지는 태양을 향해 절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망의 상황으로 접어드는 안 주교님의 심정에 황석두는 우정과 애덕을 통하여 희망과 기쁨을 되살린다.

  우리는 육신의 나이는 저절로 먹어간다. 그리고 그렇게 먹은 육신의 나이는 결코 줄일 수 없다. 그러나 이곳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분들은 ‘절망의 나이’를 줄일 수 있음을 보여 주셨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절망이 쌓여 가는 곳에, 아니 온 세상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을 발아시켜 가꾸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소명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절망의 나이를 이곳 순교자들처럼 줄일 줄 알아야 한다.



4. 갈매못 순례자 및 성지를 위한 기도


○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 갈매못 성지를 찾는 이들을 축복하소서.

● 피로써 세상을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 이 곳을 순례하는 영혼들을 거룩하게 하소서.

○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님, 순례자들의 믿음을 더 해주소서.

● 순교자들의 찬양을 받으시는 성부 하느님, 이 땅을 축복하소서.

○ 순교자들의 모범이신 성자 그리스도님, 이 땅을 더욱 거룩하게 만드소서.

● 순교자들의 위로자이신 성령이시여, 이 땅의 거룩함을 지켜 주소서.

○ 성 안다블뤼 안토니오,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 성 민위앵 마르티노,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 성 오메트르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 성 황석두 루가,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 장주기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요,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5.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6. 강  복




2. 다락골 성지순례 예식서

 

 

1. 찬미가 : 최양업 신부 작 ≪사향가(思鄕歌)≫


   ○ 어하우리  제형제여  우리본향  찾아가세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곳이  본향인고

       금세만복  다받은들  천당복에  비길손냐

       금세고초  다받은들  지옥고에  비길소냐


   ● 지당으로  가자하니  아담원조  내치셨고

       복지에로  가자하니  모세성인  못들었네

       금세만복  다받은들  천당복에  비길손냐

       금세고초  다받은들  지옥고에  비길소냐


   ○ 부귀영화  얻었은들   몇해까지  즐거우며

       빈궁고난  많다한들   몇해까지  근심하리

       금세만복  다받은들   천당복에  비길손냐

       금세고초  다받은들   지옥고에  비길소냐. 아멘.



2.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이 땅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위대한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 지금도 어두움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 당신들은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쳤사오니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 땅에서 날로 발전케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 신자들은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 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 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3. 독  서 : 페롱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최양업 신부님의 선종 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서한


   경애하올 신부님,

   올해는 몹시 애통해 하며 편지를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 선교사들 중에서 제일 귀중한, 또 신부님께서도 당연하게 매우 사랑하신 착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신부는 공소 순방을 마치고 베르뇌 주교님한테로 가는 길이었는데, 도중에 장티푸스에 걸려 며칠만에 사망하였습니다. 매우 다행하게도 그는 배론 신학교에서 약 120리 떨어진 한 작은 교우촌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푸르티에 신부는 통지를 받고 그에게 마지막 사죄경을 염해 주고 종부성사를 주기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의식을 거의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고해성사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주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드러낼 만큼은 아직 의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예수 마리아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입니다. 또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종교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남쪽의 오지에서 방문하던 지역들은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한문 지식과 조선인으로서의 장점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일에 그를 누구보다도 적격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벌써 이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이 일에 종사할 만큼 이 말을 잘 아는 다블뤼 주교는 그를 잃음으로써 그의 오른 팔을 잃게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서는 이 죽음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제게 어떤 동료 신부보다도 귀한 존재였습니다. 제가 조선에 도착한 때부터 우리는 서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가 그를 존경하는 만큼 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는 저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으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서로 방문하고 대개는 함께 피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잃음으로써 매우 훌륭하고 충실한 친구를 잃었습니다. 착하신 하느님은 우리 불쌍한 조선을 좀 가혹하게 취급하시는 것 같습니다. 조선에 새 선교사가 오면 하느님은 즉시 우리 중에서 순진한 사람을 데려가십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는 매스트르 신부가 돌아가셨습니다. 올해는 더 귀중한 사람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눈물에 젖지 않을 수 있습니까. 게다가 베르뇌 주교님의 건강은 우리를 늘 불안하게 합니다. 이 불안은 주교님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그러고도 우리와 똑같이 일하기 때문에 더욱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작년부터 그의 고통으로 종종 미사까지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작년의 박해는 이미 끝났습니다. 벌써 가을부터 우리는 모두 폐허를 복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의 지역은 거의 아니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신부 지역은 좀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타격은 특히 베르뇌 주교님의 지역과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담당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에 가해졌습니다. 현재는 거의 다 방문을 받았습니다. 아직 다른 동료 신부들의 성과는 모릅니다. 저는 다블뤼 주교님이 베르뇌 주교님의 긴요한 간호 때문에 그곳에 가 있는 동안 제 지역 외에 또 그의 지역까지 맡아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5,800명의 신자를 맡게 되었는데 저의 방문은 계속해서 8개월 반이 걸렸습니다. 성과는 몇 명의 임종 대세를 포함해서 192명이 성인 영세하였습니다. ……

   추신 : 8월 9일.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가 막 저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신부의 병에 관해 자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토마스 신부가 쓰러진 것은 다름 아닌 과로 때문이랍니다. 실제로 지난해의 소요, 즉 경신박해는 그의 성사 집전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하였으며,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야 하였으므로 그가 한 달 동안에 취할 수 있었던 휴식은 나흘 밤을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우리의 어려움과 과도한 일들을 아신다면 〔판독안됨〕 저는 십중팔구 토마스 신부 지역을 맡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부탁합니다.



4. 성지안내


   이곳 줄무덤은 병인박해 때의 치명자가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젭줄무덤에 14기(1964년 오기선 신부님이 발견했을 당시에는 17기였다. 그후에 3기는 파묘되었다.), 제2줄무덤에 10기, 제3줄무덤에 13기 등 모두 37기의 무덤이 있다. 이 곳에 묻힌 순교자들은 당시 홍주(現 홍성)와 공주 감옥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그 친척들이 밤중에 운반하여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제1줄무덤은 경주 최씨 집안 사람들로 확인된 분들로 항렬에 따라 지금과 같이 이곳 경주 최씨 종중산에 3단계로 묻었다. 그러나 제2줄무덤은 야밤 운구했기 때문이거나, 또는 낮에 운구했다 하더라도 제대로 식별할 수 없는 시신들을 이곳에 운구하여 묻기 전에 경주 최씨가 아닌 이들로 판별된 이들은 제1줄무덤에서 남서쪽으로 20m 즘 떨어진 아래쪽에 1열로 10기가 매장하였다. 제3줄무덤은 제1줄무덤 북쪽으로 100m 후방 북향 비탈에 위치해 있는데 1981년 제1줄무덤 단장시 제2줄무덤과 더불어 발견된 줄무덤이다.

   무명 순교자 묘지와 성 최경환, 최양업의 탄생지가 있는 이곳은 한때 열심한 교우촌이었다. 성 최경환의 부친 최인주 일가는 박해를 피해 서울에서 이 곳에 정착하여 열심한 신앙 생활로 전교를 하였다. 그 후 박해가 일어나 교우촌이 발각되어 교우들은 잡혀 순교하거나 뿔뿔히 흩어졌다.

   특히 이 다락골은 최양업 신부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최 신부 집안에서 이 줄무덤을 만들고 박해가 두려워 천주교 신자들의 묘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는데, 몇 년 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마을을 불살라 이때 마을 주민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졌다고 한다.

   다락골은 처음에 월내리(月內里)로 불렸는데, 이를 순수 우리말로 달안골이라 하던 것이 다락골로 바뀐 것이다.

   차령 산맥의 줄기가 지나가는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는 오소산 기슭에 자리 잡은 청양 다락골은 굽이굽이 산비탈 중턱에 10여 호의 인가가 모여 있는 두메산골이다.

   조선 시대에는 홍주(지금의 홍성)에 속했으나 지금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라는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고 있는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청양에서 대천으로 국도를 따라 10킬로미터쯤 가면 화성면 소재지가 나온다(1992년 초까지 화성면 소재지 조금 못 미쳐 국도변에 최경환, 최양업 부자상(父子像)이 있었다. 그 부자상은 1986년 8월 방윤석 신부가 거립한 것으로 묵주와 성지(聖枝)를 들고 앉아 있는 최경환 성인, 그 옆에 서서 십자가와 성서를 펴든 최양업 신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락골은 면 소재지에서 북쪽 화암리쪽으로 다시 2.5킬로미터 가량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국도에서 갈라지는 초입에 ‘양업로(良業路) 성지 줄무덤 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가쁜 호흡을 고르며 마을 뒤 산길을 마저 오르면 항아리 모양으로 생긴 14처를 만난다. 그 옆을 지나면 경주 최씨 종산의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의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다.

   하지만 이 무덤들의 임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훔쳐 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만 입을 통해 전해진다.

   혹자는 황새 바위에서 순교한 이들이 묻힌 곳이라고도 하고 또는 동학란 때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 어디서 죽었든지 간에 확실한 것은 치명자들의 무덤이고 그들의 이름 없는 피 흘림으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다.

   청양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은 처음에는 ‘월내리(月內里)'로 불렸는데 이것을 순수 우리말로 ‘달안골'이라 한 것이 다락골로 바뀌어 전해졌다고 한다. 혹은 다래가 많이 나서 ‘다랫골'로 불렸다고도 한다.

   여기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791년이다. 신해박해 때 최양업 신부의 증조모 경성 이씨(증조부는 최한일 피난 전에 이미 사망)가 아들 최인주를 데리고 이곳 청양에 피신해 오면서부터다

   모자는 다락골로 들어와서 공터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 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다. 이곳에서 최인주는 결혼하여 아들 셋을 두었다. 그 중 막내가 최양업 신부님의 아버지 최경환 성인이다. 최경환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의 질녀 이성례(李聖禮)와 혼인하여 살다가 신앙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기 위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주했다. 최경환은 장남 최양업이 12세 되던해에 가족을 이끌고 이곳 다락골을 떠나 먼저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금성(지금의 김화)로 갔다가 다시 경기도 부평으로 옮겼다가 마침내 안양 수리산 깊은 골짜기 담배골에 정착하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깊은 산 속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의 집을 급습해 온 포졸들은 부인 이성례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난 뒤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선정․우정․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는 최씨 일가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로 풀려 나온다.

   그러나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 다시 갇힌 몸이 되고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는 4형제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 그 부인 이성례는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에 앞서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5. 영적 강화


   인간에 가장 강한 욕구는 불사성(不死性), 즉 생명보존욕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기를 마다하고 본능적으로 자손을 두어 자신의 생명을 세세 대대로 보존하려는 신화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삶의 경험을 통하여 인간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와 같은 불사성의 좌절은 명예욕을 충족함으로 극복하려 한다. 그래서 생명욕 다음으로 강한 인간의 욕구는 명예욕이다. 사실 사람은 우선 먹는 문제을 해결하려 한다. 그와 거의 동시에 재물을 모으려 한다. 식량과 재산이 모아지면 쾌락을 추구한다. 그리고 명예욕 또는 인정욕을 채우려 한다. 이처럼 사람의 욕구는 가장 밑바닥에 생명욕을, 최종적으로는 명예욕을 추구한다(랏징거의 <그리스도교 신앙 어제와 오늘> 239면 이하 참조).

   이곳 다락골에 묻힌 무명 순교자들은 그저 깊은 산에 이름 없이 핀 두메꽃과 같은 이들이다. 궁극적으로 명예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자유로이 이름 없이 살다가 간다는 것은 맑은 자기 응시와 발견 없이는 불가능하다.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하느님을 찾기 보다 우리의 명예를 찾고 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 같지만 누군가가 나의 일이나 나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하대할 때 우리는 견디기 어렵다.

   명예로부터 자유롭기까지 우리는 무명 순교자의 삶과 자유를 발견하고 그 삶을 따라야 한다.



6. 하느님 찬가


○ 거룩하신 하느님, 저희 모두 마음과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나이다.

● 거룩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저희에게 주시어

   하느님을 섬기며 거룩하게 살도록 하셨으니 하느님을 찬미하나이다.

○ 거룩하신 하느님, 저희가 죄를 짓고 하느님을 떠나 구원을 기다릴 때에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외아들을 보내시어 저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새 생명과 행복을 누리게 하셨으니 하느님을 찬미하나이다.

● 거룩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저희를 위하여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 마리아 태중에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저희 주님이요 대사제요 중개자로서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계시니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나이다.

○ 거룩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마칠 때까지 배필이요 신비체인 교회 안에 살아 계시며 온갖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하느님을 찬미하나이다.

● 거룩하신 하느님, 저희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신비체의 한 지체가 되어

   선택된 하느님 백성으로서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니 하느님을 찬미하나이다.

○ 거룩하신 하느님, 교회 안에서 저희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성사를 통하여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시어 저희가 천상의 영원한 즐거움을 미리 맛보고 바라게 하셨으니 하느님을 찬미하나이다.

● 거룩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께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어

   하늘과 땅을 새롭게 하시리니 하느님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7.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8. 강  복




3. 솔뫼 성지 순례 예식



1. 시작성가 : 가톨릭 성가 287장 1-2절


2. 솔뫼가


후렴1 : ⊙ 우리 사랑하올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가운데로조차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심을 잊지 말지어다.


   ○ 존창단원 내포들녘 곳곳마다 주님복음 전파했네

       솔뫼사는 김종현과 아우택현 복음듣고 입교했네

       택현아우 한현이도 세례받고 천주공경 앞장섰네

       성김대건 증조진후 입교하니 성가정을 이루었네


   ● 윤지충의 제사거부 화근되어 신해박해 일었다네

       증조진후 잡히어서 취조심문 고통형벌 받았다네

       김제준과 우술라가 태어나니 김대건의 부모라네

       신유박해 증조비오 잡혔다가 헛말하고 유배됐네


   ○ 귀가하여 회개눈물 흘리다가 긴옥살이 자청했네

       십년감옥 허기병고 참고참다 해미옥서 순교했네

       이태뒤에 셋째아들 한현이도 관덕정서 참수됐네

       한현사위 배나다리 손요셉도 해미에서 치명했네


   ● 한현여식 김데레사 기해다음 당고개서 순교했네

       주교신부 붙잡힐까 입다물다 무수히도 매맞았네

       대건부친 이냐시오 기해년에 서소문서 참수됐네

       아들대건 나라밖에 보냈다며 치고틀고 고문했네


후렴1 : ⊙ 우리 사랑하올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가운데로조차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심을 잊지 말지어다.



3. 대건가


후렴2 : ⊙ 우리 벗아, 생각할지어다.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 내신 임자 알지 못하면, 우리 난 보람 없도다.


   ○ 신사년의 염천팔월 스무하루 솔뫼대건 태어났네

       성가정의 깊은신앙 보고듣고 어린가슴 채웠다네

       증조회개 종조신덕 부친열성 뼛속깊이 사무쳤네

       솔뫼동산 푸른솔과 곧은대의 기개절개 담았다네


   ● 정해박해 일어나니 조부친부 뒤를따라 피난갔네

       서울청파 살피다가 경기용인 한덕골에 숨었다네

       밤낮으로 조부친부 슬하에서 교리글월 배웠다네

       열다섯에 세례받고 신학생에 간택되어 뽑히었네


   ○ 동지섣달 대건양업 방제함께 만주벌판 걸었다네

       얼고트고 고신고신 울며걷다 마카오에 당도했네

       산선물선 마카오서 십자인내 본받으며 공부했네

       친구방제 위장열병 열흘넘어 기도중에 선종했네


   ● 마카오에 난리나서 마닐라로 피신했다 돌아왔네

       열심으로 인문과정 철학신학 기초공부 마쳤다네

       갈고닦은 말솜씨가 유창하여 모든이가 놀랐다네

       다섯해를 마카오서 공부하다 귀국길에 올랐다네


   ○ 바다넘고 언강건너 설원악산 갖은고초 겪었다네

       허기피곤 눈길위에 쓰러지며 십자길을 걸었다네

       손과발에 흐르는피 바라보며 순교준비 하였다네

       원정고난 온갖유혹 주님통고 생각하며 감내했네


   ● 스물셋에 팔가자서 삭발례로 부제서품 받았다네

       스물넷의 초하룻날 압록강의 얼음타고 건넜다네

       보름만에 귀경하여 모진몸살 채신지우 하였다네

       도탄지고 닥쳐와도 애주애덕 굳은신앙 끊임없네


   ○ 고국산천 변함변모 없었건만 모든산야 쓸쓸하네

       기해년에 주교신부 많은신자 위주치명 하였다네

       어머니는 이집저집 문전걸식 하루하루 연명하네

       보고파도 볼수없는 모친아모 가슴만이 저며드네


 

   ● 돌우물골 골방속서 주교신부 모시려고 궁리했네

       등잔밝혀 순교자들 순교증언 절목절목 기록했네

       바쁜중에 신학생을 골라뽑아 가르치고 양성했네

       맡은임무 앞세우니 병고허약 저기멀직 물러앉네


   ○ 넉달동안 머물면서 모친향해 타는편정 짓눌렀네

       교우들과 제물포서 배를타고 사제서품 향했다네

       흔들리고 까불리는 나뭇배가 영락없는 유혹였네

       성모님께 의탁하며 유혹바다 삼가조심 건넜다네


   ● 스물네살 팔월하고 열이렛날 금가항서 사제됐네

       이레지나 첫미사로 수선탁덕 성체성혈 이루셨네

       주교신부 모신배를 황해띄워 귀국길에 올랐다네

       거친풍랑 까불리고 공그리다 제주인근 떠밀었네


   ○ 뱃머리를 다시돌려 충청강경 황산포에 당도했네

       주교신부 상복입고 갓쓰고서 야음으로 잠입했네

       안다블뤼 말배우려 수리치골 교우촌을 향했다네

       수선탁덕 배를타고 해안거쳐 한강으로 들었다네


   ● 보름뒤에 주교님을 모시고서 한양으로 돌아왔네

       기해이후 주린영혼 돌보느라 식음마저 잊었다네

       피흘리며 고대하던 신자에게 고해성체 베푸셨네

       신부님의 강론훈계 들으면서 모든신자 감탄했네


   ○ 십년만에 모자상봉 하늘나라 순교부친 기뻐했네

       효성지심 크다하나 아픈모심 뒤로하고 상경했네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신 주님모습 따랐다네

       마지막은 애닯지만 천상에서 새시작이 기다리네


   ● 위험고난 무릎쓰고 순명지덕 백령도로 나갔다네

       친구양업 스승탁덕 입국위해 서한지도 탁송했네

       순위도서 관헌에게 잡히어서 갖은모욕 당했다네

       닷세뒤에 해주감영 압송되어 문초형벌 받았다네


   ○ 열하룻밤 해주옥서 올리브산 주님피땀 함께했네

       서울포청 이송되어 여든일곱 주야취조 당했다네

       길고지린 심문옥고 인내지심 애주지심 흔들었네

       에집트서 가나안에 이르듯이 기갈유혹 혀가탔네


   ● 불란서배 갈매못앞 외연도에 나타나서 따졌다네

       어인일로 한분주교 두분신부 참수했나 답하라네

       조정군신 묘당회의 김대건을 효수하라 서둘렀네

       오호애재 주님섭리 알수없어 사람네들 애곡했네


   ○ 병오년에 구월보름 어전회의 모든신속 찬동했네

       사술수괴 대역부도 운운하며 효수경중 판결했네

       포도청도 아깝다며 신부님을 어영청에 보냈다네

       아흐통재 천주공경 이자저자 대역죄로 몰아치네


   ● 날이밝자 형리나졸 신부님을 결박지어 끌고갔네

       맑은얼굴 곧은자태 자색조끼 무명바지 입으셨네

       덜컹대는 나무창살 달구지에 머리채를 치묶었네

       부친형장 서소문을 당숙형장 당고개로 넘어갔네


   ○ 이골저골 구경꾼이 도배치고 조롱참소 쏟아놨네

       모래밭에 깃발달린 창대꽂고 집행문을 읽었다네

       북잡이가 둥덩둥덩 북을쳐서 사형집행 알렸다네

       한강물은 굽이굽이 새남터의 모래벌판 숨죽이네


   ● 마지막이 당도하자 김신부님 웅변하여 증언했네

       나의말을 귀담으소 천주위해 이몸육신 바친다네

       당신들의 도움으로 여기지금 영원생명 시작되네

       누구든지 영원행복 바란다면 천주님을 믿으라네


   ○ 사정없이 옷벗기고 두귀에다 화살촉을 꿰었다네

       얼굴에다 물뿌리고 회칠하니 틀림없는 광대였네

       겨드랑에 장목끼워 어깨메고 무리돌며 희롱하네

       웃음속에 원죄비애 숨은줄을 범부대중 몰랐다네

 

   ● 무릎꿇겨 머리카락 칭칭감아 형주에다 옭아맸네

       열두명의 휘광이들 전투하듯 돌며뛰며 춤을췄네

       첫째칼날 늑골치고 둘째칼날 등골치며 날뛰었네

       썰고치며 발광하고 웃고우는 모든무리 벗이라네


   ○ 살저미고 피줄끊던 칼질끝에 여덟칼날 참수됐네

       떨던육신 쓰러지고 하늘높이 뿜던피도 멎었다네

       한여름에 태어나서 스물여섯 여름질때 귀천했네

       슬프도다 사람네가 목치듯이 죄끊으면 성인되네


   ● 잘린머리 석삼주야 달리어서 오가는이 겁냈다네

       보름동안 파수병의 감시받다 백사장에 묻히셨네

       용감하던 교우들이 모래파고 성시찾아 염습했네

       서울와서 묻었다가 백오십리 미리내에 안장했네


   ○ 신부님의 순교선혈 이땅씻고 뿌린말씀 거름줬네

       깊은신앙 높은성덕 후손에게 길이길이 심으셨네

       수선탁덕 순교하니 온나라가 주님제단 되었다네

       벗을위해 목숨받쳐 우리모두 큰사랑의 벗이라네


   ● 수선탁덕 성인반열 천상성인 환호하며 기뻐하네

       우리모두 뒤를따라 천국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세

       마음목숨 생각힘을 다하여서 하느님을 사랑하세

       우리이웃 내몸같이 사랑하여 새계명을 행하세나


후렴2 : ⊙ 우리 벗아, 생각할지어다.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 내신 임자 알지 못하면 우리 난 보람 없도다.



4. 독 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의 최후 옥중서한)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慰藉)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領洗)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效驗)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 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 씨를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辛苦)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되고 영글면, 마음에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오, 곡식이 영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降生求贖)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영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영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義子)로 천국을 누릴 것이오. 만일 영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義子)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데로조차 성교회(聖敎會)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 승천 후 종도(宗徒)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聖敎) 두루 무수 간난(無數艱難)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에 성교 들어온 지 5,60년에 여러 번 군난(窘難)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熾盛)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 중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哀痛之心)이 없으며, 육정(肉情)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아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主命)아니면 주상 주벌(主賞主罰)아니랴.

   주의 성의(聖意)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遑遑)한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力量)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友愛)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광영(爲主光榮)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자 20인은 아직 주은(主恩)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들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를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紙筆)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未久)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難時)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은(主恩)을 빌어, 삼구(三仇)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광영하고 여등(汝等)의 영혼 대사(靈魂大事)를 경영(經營)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德功)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事主救靈事)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수치(萬萬修治)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義子)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矜憐)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하노라.

   세상 온갖 일이 막비주명(莫非主命)이요, 막비 주상주벌(主賞主罰)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甘受) 인내하여, 위주(爲主)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大事)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해 더 착실한 목자를 상(賞)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사랑을 이루어,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 가기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잘 있어라.

김 신부 사정 정표



5. 성지안내


  1) 솔뫼의 지리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4번지인 '솔뫼'는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 내포(內浦)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내포는 남으로는 광천의 오서산을, 서로는 덕산의 가야산을, 서로는 큰 바다를, 북으로는 경기도 해읍(海邑)과 아산만을 경계로 하면서 서해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평야지대이다. 내포의 한복판에는 삽교천이 흐르고 있다. 삽교천은 선사시대부터 바다를 통하여 전해지는 문화를 내륙으로 전하는 “문”의 구실을 하였다. 삽교천에 인접해 있는 '솔뫼'는 일찍부터 외국 문물을 접하였다. 따라서 이곳에 복음이 전하여진 것은 육로를 통하여 복음이 전하여진 이승훈(1784) 이전으로 미루어지며, 그런 까닭으로 한국 천주교 초창기에 이곳 내포 출신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고 순교를 하는 굳은 신앙의 모범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2) 성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


   김해 김씨 안경공파의 19대 손인 김진후는 내포의 중심지인 솔뫼에서 부유한 사대부였다. 내포에는 벼슬에서 떠난 많은 사대부들이 살고 있었고, 서로 사상과 문화에 대한 교류 관계를 이루었다.

   김진후에게는 종현, 택현, 한현(종한), 희현 등 네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택현이 내포지방의 사도인 이존창의 질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로 인하여 이존창은 먼저 택현과 한현을 영세 입교 시키고, 두 아들의 모범을 따라 김진후도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김진후가 영세한지 3년 만에 진산사건으로 신해박해(1791)가 나자 관가에 끌려가 취조와 협박을 받고 풀려났다. 1796년에는 김택현이 둘째 아들 김제준을 낳았다. 그리고 1801년에는 대박해인 신유박해가 일자 김진후가 다시 잡혀 모진 고문에 견디다 못하여 배교 의사를 발하고 유배 조치되었으나 1805년에 다시 잡혀 해미 감옥에 투옥되었다. 끝까지 배교를 거절하다가 투옥된 지 10년, 나이 76세에 옥사순교하였다. 셋째 아들 김한현(안드레아)은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하여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으로 피신하여 신자들에게 복음과 교리를 가르치다가 배교자의 밀고로 잡혀 대구 감영에서 참수 순교하였다(1816).

   솔뫼에서 가정을 지키던 김택현은 둘째 아들 김제준과 며느리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손자 김대건의 출생을 보았다(1821.8.17). 그러나 끊임없는 관리와 포졸들의 괴롭힘과 지방박해에 견디다 못하여 1827년 가족을 이끌고 솔뫼를 떠나 경기도 용인 한덕동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김한현의 딸이며 김대건의 당고모인 김데레사는 남편 손연욱(요셉)이 1824년 덕산에서 옥사순교하자 상경하여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 이어 앵베르 범 주교의 처소를 돌보다 기해박해 때 잡혔다가 1840년 서울 당고개에서 교수순교하였다. 1836년 초에 김제준은 서울 정하상의 집으로 찾아가 모방 신부한테 세례를 받았다. 그해 부활절을 전후해서 용인 골배마실 인근의 은이 공소에서 김대건(안드레아)이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되어 사제가 되기 위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1939년 사위의 밀고로 잡혀서 아들을 유학보냈다는 이유로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형벌과 고문을 받다가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순교를 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사제로 서품되었고, 1846년 9월 16일에 25세의 나이로 서울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순교하였다.

   김진후의 넷째 아들 희현의 아들 제항(루도비꼬)과 김진후의 아우 선후에게 관현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 제교는 병인박해(1866) 때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제항의 아들 경식의 부인 조씨도 1866년 전라도에서 순교하였으며, 1867년에 김대건 신부님의 숙부 제철의 아들 진식(베드로)은 공주에서, 선식(프란치스꼬)은 해미에서 순교하였다.

   이렇게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의 순교자는 모두 11명이다. 이 중에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오르신 분은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 당고모 김데레사, 그리고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이다.


  3) 솔뫼와 신앙


   '솔뫼'는 결코 산수가 수려한 장소가 아니다. 지리적으로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던 '내포'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을 뿐이다. 여사울 이존창과 더불어 성 김대건 신부님 가문과 내포지역에 복음의 불을 댕긴 김 신부님의 증조부 진후는 신앙과 배교라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이곳 '솔뫼'에서 드러냈다. 그래서 '솔뫼'는 신앙의 '못자리'인 동시에 배교의 그늘진 ‘숲’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진후는 이 곳 '솔뫼'에서 회개를 하였고 순교를 결심하였다. 그래서 '솔뫼'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 ‘우물’과 영원히 한 생명을 위한 투신을 결심한 ‘솔뫼’인 것이다.

   세상에는 사람 말고도 살아 존재하는 것이 많지만 사람이 다른 것들과 비견되지 않는 것은 사람만이 ‘영원’을 발견하고 그것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솔뫼'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삶을 상징하는 동시에 영원한 삶을 발견하기까지 한 인간이 걸어야 할 고뇌의 여정과 완성을 상징한다.

   대전교구는 이와 같은 인생의 여정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마침내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고, 인간에게는 구원을 가져 올 수 있도록 신자들의 힘을 모아 이 곳 '솔뫼'를 성역화하였다. 이곳은 결코 완성된 성지가 아니다. 선조들과 우리 자신, 그리고 후손들의 신앙과 성덕으로 완성되어야 할 성지이다. 이곳에서 회개하는 영혼이 흘리는 눈물은 훗날에 많은 영혼들에게 성화를 가져올 것이다. 만일에 시끄럽고 번거로운 세상을 물러나서 하느님과 만나 자신의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하여 '솔뫼 피정의 집'이 마련되어 있다.



6. 영성강화


   인간이 떨쳐버리기 어려운 유혹 중에 하나는 바로 “공명심, 영웅심”이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유명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유혹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또한 이런 유혹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이곳 솔뫼가 전하는 메시지는 ‘평범함’이다. 이곳에 사셨던 분들도 인간으로써 평범한 인생을 사셨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하여 맞서지 못하고 배교로써 이런 유혹에 굴복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들을 엄습하는 두려움과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분들은 통회와 회개하고 순교를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은 어떤가? 신앙과 배반, 그리고 통회와 회개, 그리고 마침내 죽음이 대치하고 우리네 인생 안에서 충돌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인생 가운데서 순교자들은 영웅적 신앙과 덕행을 보였다. 물론 그 당시 박해를 받았던 많은 사람들은 고문과 유혹의 현장에서 두려워 떨다 변절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런 순교의 영광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인간의 본성에 의한 영웅적인 의지나 행위가 아닌 바로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 이런 것들은 만들어졌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나약한 인간의 ‘평범함’에 당신의 은총을 담아주셨다. 단단한 돌그릇이 아니라 깨지기 쉬고 싸구려 질그릇에 하느님의 은총이 담긴 것이다. 하지만 이 깨지기 쉬운 질그릇을 보호하기 위해 하느님께 전구하고 매달리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평범함’이란 언제나 하느님께서 깃드시는 자리이다. 마치 잘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아니라 비천한 죄인들과 머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우리 역시 누구나 평범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 그분이 머무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머무신 우리의 평범함을 얼마나 값지게 하느냐? 는 그분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잠시 묵상)



7. 순례자와 성지를 위한 기도


○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리신 순교자들이여,

● 저희의 신덕을 위해 빌으소서.

○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며 피를 흘리신 순교자들이여,

● 저희의 망덕을 위해 빌으소서.

○ 주님만을 사랑하느라 피를 흘리신 순교자들이여,

● 저희의 애덕을 위해 빌으소서.

○ 성 김제준 이냐시오 찬양을 받으시는 성부 하느님,

● 순례자들을 불러 거룩하게 만드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찬양을 받으시는 성자 그리스도님,

● 신자들의 성덕으로 이 땅을 더욱 거룩하게 만드소서.

○ 성 김데레사의 찬양을 받으시는 천주 성령이시여,

● 이 성지와 순례자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소서.

○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8.  사제를 위한 기도


○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

   주님을 본받으려는 사제들을 지켜주시어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소서.

● 주님의 영광스러운 사제직에 올라

   날마다 주님이 성체와 성혈을 이루는 사제들을

   언제나 깨끗하고 거룩하게 지켜주소서.

○ 주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사제들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 사제들이 하는 모든 일에 강복하시어

   은총의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

○ 저희로 말미암아

   세상에서는 그들이 더없는 기쁨과 위안을 얻고

   천국에서는 찬란히 빛나는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 아멘.



9. 성소를 위한 기도


○ 좋으신 목자 예수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부르시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나이다.

● 비오니, 오늘도

   믿음직한 젊은이들을 많이 부르시어

   주님의 제자로 삼으시고, 주님의 일꾼으로 삼으소서.

○ 온 인류의 구원을 바라시는 주님,

   온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빛과 사랑의 불을 갈망하고 있사오니

● 많은 젊은이들이 그 갈망에 응답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 주님, 슬기로운 여성들을 많이 부르시어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여 복음의 완덕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 또한 주님의 몸인 교회에 봉사하며

   도움과 사랑을 애타게 바라는 이웃들에게 헌신하게 하소서.

◎ 아멘.



10. 강   복


11. 마침성가 : 가톨릭 성가 287장 3-4절




4. 신리 성지 순례 예식서



1. 찬미가

 

    ○ 작은집  초라한집  마다함없이

        마구간  태어나신  주님본받아

        주교님  누추한곳  숨어지내며

        양들을  가르치려  책을지었네


    ● 수리치  교우모아  단체세우니

        성모님  거룩하온  신심가르쳐

        이나라  성모님께  의탁하여서

        든든한  교회초석  다져놓았네


    ○ 무릎이  아파와도  참고견디며

        순교자  언행성덕  모두모아서

        후세에  굳센신앙  널리전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자라고있네

                            

    ● 교리서  편찬하여  진리전하고

        기도서  찬술하여  말씀전하니

        하느님  구원진리  깊이깨달아

        구세주  강생구속  찬미드리네


    ○ 황석두  심신바쳐  주교님돕다

        기꺼이  신앙으로  체포되어서

        갈매못  푸른물결  넘실거릴때

        신망애  피를흘려  증거했다네

                            

    ● 사랑의  아버지와  독생성자와

        위로자  성령께서  삼위일체로

        영원히  무궁토록  살아계시며

        만물을  사랑으로  다스리소서. 아멘.



2. 성지안내


   한국 천주교 전기의 교회 출판 사업의 요람으로 다블뤼 안 신부는 여기에서 한국 순교자들의 전기와 교회사 등을 엮어냈다. 또한 이곳은 5대 조선교구장이 된 다블뤼 안주교와 위앵 민신부, 오매트르 오신부, 장주기 요셉, 그리고 황석두 루가 등이 박해자들에게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충남 당진군 구합덕 본당에서 택시나 승용차로 20분 남짓 달리면 신리 공소를 찾을 수 있다. 구불구불한 길에 특별한 지형 지물이 없어 택시 기사나 주민들에게 물어 물어 찾아야 한다.

   20~30평 정도 됨직한 자그마하고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공소, 신리 유적지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볼품 없는 모습이지만 마당의 돌 하나하나, 건물 안에 깔린 나무판대기 한 조각 한 조각마다에는 당시 신앙 선조의 땀방울과 기도 소리, 그 숨죽인 발걸음의 흔적이 가득 배어 있는 듯하다. 마당에는 순교 복자 기념비와 성모상이 서 있다.

   이 집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까지 할 만하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 다블 뤼 안(Daveluy) 주교를 비롯한 여러 신부들이 체포되기 전에 피신한 이곳에는 당시의 유물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해방 후 양철 지붕으로 개량해 소강당으로 꾸몄다. 이 집에서 다블뤼 안 주교와 여러 신부들은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그리고 병오박해 당시 순교한 신부 등과 평신도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조선 교구 제 5대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안 주교는 1845년 7월 하순 상해로 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신부와 함께 그 해 10월 12일 전라도 강경의 황산포(黃山浦)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그는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1866년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됐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는 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고 1857년부터 이를 위해 새 자료를 발굴해 그것을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목격 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는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에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1863년에 그의 집에 불이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 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가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가치 있는 것이 됐다.

   바로 이 집에서 수집,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 자료 7권이 1862년 10월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두 권이 나오게 된 것이다.

   또 이 집에는 안 주교가 체포되기 바로 전날인 1866년 3월 11일 고향의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보낸 눈물겨운 최후의 편지가 기념으로 액자 속에 끼워져 있다. 이 편지는 만주의 베롤(Verolles) 주교에게 보내 프랑스에 있는 부모에게 전달하게 한,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으로 올린 글(上書)이었다. 그는 1866년 베르뇌 주교에 이어 3월 11일 붙잡혀 옥중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충청도 보령의 수영으로 압송돼 3월 30일 참수됐다. 베르뇌 주교를 도와 9년 동안을 부주교로서 그리고 주교의 순교 후 조선 교구의 제 5대 주교가 된 지 21일 만에 장엄하게 순교한 것이다.

   그 후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시성됐다.



3. 대중 매체 선용을 위한 기도(가톨릭 기도서)


○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말씀이신 성자를 보내주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며

   사도들을 부르시어 교회를 세우시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나이다.

● 하느님께서는 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저희에게 여러 가지 대중매체를 선물로 주셨으니

   이 선물의 뜻을 잘 깨달아

   복음을 전파하는 구원의 도구로 쓰게 하소서.

○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무엇보다 커진 오늘날

   특별히 대중매체 종사자들과 관리자들이

   바른 양심을 지니고

   매체들을 향락과 정치 도구로

   그릇되게 쓰느 일이 없게 하소서.

●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이들도 올바른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주님 뜻에 어긋나고 인간의 품위를 해치는 온갖 것을 피하고

   오로지 주님이 영광과 모든 이의 유익을 위하여 쓰게 하소서.

◎ 아멘.



4. 영성 강화(준주성범 제3권 제47장 “영생을 얻기 위하여 모든 어려운 일을 감수함”)


  1) 주의 말씀: 아들아, 나를 위하여 맡은 직업으로 말미암아 용기를 잃지 말고, 또 무슨 곤란이 있다 해도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내가 허락한 바는 모든 일에 너를 견고체하고 위로할 것이다. 나는 모든 계량과 모든 한계를 초과하여 넉넉히 갚아 줄 수가 있다. 너는 여기서 오랫동안 수고하지 않을 것이며 또 항상 고통으로 눌리지 않으리라. 잠깐만 기다리면 곤란의 빠른 끝을 보리라. 모든 수고와 번잡한 것이 그칠 시간이 오리라. 세월과 더불어 지나가는 것이 다 짧고 작으리라.


  2) 네가 행하는 것을 향하라. 나의 포도밭에서 충실히 일하라. 나는 네 품값이 되리라. 써라, 읽어라, 노래하라, 탄식하라, 묵묵하라, 기도하라, 사내답게 대립되는 일을 참아라. 영생에는 이 모든 것을, 아니 이보다도 더 큰 싸움을 참을 가치가 있다.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어느 날에 평화가 있을 것이니, 그 때는 이 세상 시절의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닐 것이요, 오직 영원한 빛과 한없는 영광과 견실한 평화와 안전한 쉼이 있을 것이다. 저 때에는 네가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 7,24)하지 않고, 또 "케달인들 천막에서의 더부살이, 이 괴로움이여."(시편 120,5)하고 소리 지르지도 아니하리라. 죽음은 파멸을 당할 것이요, 구원에는 결점이 없을 것이며, 아무 근심도 없고, 재미있는 복락과 사랑스럽고 안락한 모임이 있으리라. 성인들이 전에는 이 세상에서 극히 천대를 받고 현세에서 살아가는 것이 부당한 것같이 생각 되었으나, 그들이 이제는 얼마만한 영광 중에 즐거워하여, 그 영원한 면류관은 얼마나 빛나는지. 아! 네가 한 번 본다면, 참으로 너는 즉시 땅에까지 스스로 낮출 것이요, 또한 사람 위에라도 있기를 원함보다도 모든 이 아래 있기를 차라리 원할 것이요, 또 이 세상의 즐거운 날을 원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느님을 위하여 곤란 당하기를 더 좋아할 것이요, 또 사람들 중에서 극히 작은 자로 여겨지는 것을 큰 유익으로 생각할 것이다.


  3) 오! 만일 네가 이것을 깨닫고 깊이 네 마음에 사무치게 된다면 어찌 한 번이나 감히 원망할 수 있으랴?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는 모든 수고를 참을 것이 아니냐? 하느님의 나라를 잃고 얻는 것은 응당 소용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늘로 네 얼굴을 들어 보라. 이 세상에서 큰 싸움을 겪은 나의 모든 성인들이 나와 더불어 즐거워하고, 위로를 받고 안심하고 쉬며, 또 끝없이 성부의 나라에 머물러 있다.



5.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6. 강  복




5. 여사울 성지 순례 예식서



1. 찬미가 : 내포가


후렴: ⊙ 우리 벗아,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로부터 천지만물을 배설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 천지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오서산  가야산을  빚어내시고

       두줄을  그으시고  헤집으시니

       삽교천  무한천이  넘쳐흐르네


   ● 하늘땅  두내냇물  창조주께서

       내포들  기름지게  마무르시고

       사람들  옹기종기  뫼고모여서

       복음의  옥답옥전  갖추셨다네


   ○ 일찍이  바다육지  하나로알고

       분주히  내포사람  드나들면서

       문물을  서로서로  주고받으니

       얼결에  주님복음  뿌려졌다네


   ● 하느님  이곳저곳  뿌리신씨앗

       사람들  마음속에  틔고자라고

       주야로  물주시고  돌아보시니

       숨결속  깊이깊이  뿌리내렸네


   ○ 복음이  서울성내  싹트기전에

       여사울  홍유한이  낙향하여서

       천주교  칠극대전  읽고지키니

       내포들  복음불길  타올랐다네


   ● 이존창  이불길에  휘감싸이고

       갈매로  천주교를  알고파지니

       걸음을  재촉하여  서울로가서

       권철신  사베리오  제자되었네


   ○ 김범우  존창에게  교리가르쳐

       천주교  입교수계  하소서하니

       지성껏  신앙지덕  갈고닦아서

       내포들  복음전파  사도되었네


   ● 여사울  친인척들  천주가르쳐

       흐릿한  인생미몽  깨우쳐주니

       옳거니  허무인생  쫓아버리고

       목숨껏  흠숭하여  주님섬겼네


후렴: ⊙ 우리 벗아,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로부터 천지만물을 배설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2. 성지안내


  1) 이존창 루도비코(1752~1801년)


   여사울은 내포의 사도인 이촌창 루도비코가 태어난 곳이자, 전교활동을 펼치던 곳으로 현재는 순교자 이존창의 생가터 남아 있다. 중인 신분인 이존창은 헌신적인 전교로 말미암아 내포 지방 여러 고을에 복음을 퍼뜨렸으며, 1801년 43세의 나이로 서울서 순교 했다.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은 현재 신례원 본당의 공소가 있으며 주민의 80% 이상이 천주교 신자로 구성돼 있는 선교의 요람이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김진후, 성 김대건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의 출생지인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덕산 등의 순교지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있다.

   농민 출신으로 충남 예산군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교회의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 하여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히게 된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한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커져 갔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主)로 호송되어 황새 바위에서 50세를 일기로 참수된다.


  2) 김광옥 안드레아(1741?~1801)


   충청도 예산 여사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面長)을 역임하였다. 본래 그는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사나운 성질로 인하여 모두가 무서워하였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희성(프란치스코)은 그의 아들이다.

   안드레아는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이웃들은 이때 그 사실을 알고 몹시 놀라워하였다.

   이후 안드레아는 드러나게 교리의 본분을 실천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매일 교우들과 한 자리에 모여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렸고, 사순절마다 금식재를 지키고 갖가지로 극기 행위를 실천하였다. 그러면서 마침내 이전의 성격을 극복하고 어린양과 같이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베드로)과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포졸들은 그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냈다. 이후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되었다.

   예산 현감은 김광옥 안드레아가 체포되어 오자 즉시 공범자들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내놓으라고 명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두 번째 신문에서도 그는 한결같이 신앙을 증거하면서 다음과 같이 용맹함을 드러냈다.


   “모든 언약이나 위협이 소용없습니다. 다시는 제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저도 천주의 명령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 대군대부(大君大父)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만 번 부당합니다. 우리 천주께서 저의 비밀한 생각과 감정과 의향을 보고 계시므로 마음속으로라도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현감은 안드레아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매질을 시켰으나 헛일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신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안드레아는 감사의 명에 따라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안드레아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생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숨어살면서 제멋대로 (교리를) 외우고 익혔으며, 천주교와 관련된 물건들을 감추어 두었다.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면서 ‘한 번 죽는 것이니 달게 받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


   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안드레아와 베드로는 그 동안의 형벌로 인해 걸음을 뗄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이 주신 용기와 힘으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마주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튿날 안드레아는 들것에 실려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신공을 바쳤다. 또 지정된 장소에 이르자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뒤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친 다음, 목침을 가져다 스스로 그 위에 자신의 머리를 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칼날에 목숨을 바쳤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가량이었다. (<‘하느님의 종������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서)



3. 선교를 위한 기도


+ 주님, 저희에게 성령의 불을 내려주시어

○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헤매신 주님 마음이

   저희 마음이 되게 하소서.

   신앙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이 땅의 순교 선열들의 그 열정을 저희 안에 심어 주시어,

   너희는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신 주님 말씀 따라

   저희 모두가 복음선포에 앞장서게 하소서.

   그리하여 2천년대가 새로운 복음화의 신기원이 되게 하소서.

● 아울러 청하오니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의 아픔 속에 신음하는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남북 간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의 그 날을 앞당겨 주소서.

   저희의 가난한 마음과 희생적인 봉사와 복음적인 삶을 통하여

   민족의 진정한 일치를 가져다주시고

   참 평화가 하루 속히 이 땅에 자리 잡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이 땅의 주보이신 성 요셉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님,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4. 영성 강화(준주성범 제3권 제10장, “세속을 떠나 하느님을 섬기는 취미”)


   1. 제자의 말: 주여, 이제 내가 다시 침묵을 깨뜨려 말씀을 드리고자 하나이다. 극히 높은 곳에 계시는 나의 하느님이시여, 나의 주시여, 나의 왕이신 주의 귀에 내 말씀을 올리고자 하나이다.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간직하신 그 복을 당신께 피신한 사람에게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베푸십니다"(시편 31,19). 그러나 당신을 사랑하는 자, 당신을 전심으로 섬기는 자에게는 또 얼마나 선하시나이까?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내려 주시는 신묘한 관상의 취미는 참으로 말로써 그려 낼 수 없이 좋사옵니다. 특히 당신이 내게 사랑의 표를 드러내 주신 것은 나를 없는 데로부터 조성하여 있게 하시고 당신을 떠나 멀리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나를 다시 이끄사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라 명하신 것이옵니다.


   2. 오! 끝없는 사랑의 근원이시여, 당신께 대하여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어찌 내가 쇠진하여 망하였을 때도 나를 생각해 주신 당신을 잊으리이까" 당신은 당신 종에 대하여 모든 희망밖에 인자를 베푸시고 모든 공로에 넘게 은총과 사랑을 베푸셨나이다. 이 은총을 어떻게 갚아야 옳으리이까? 모든 것을 버리고 세속을 떠나 수도 생활을 하게 되는 이러한 은총은 모든 이가 받는 것이 아니옵니다. 어느 조물이거나 당신을 섬길 의무가 있사오니 내가 당신을 섬기는 것이 무슨 장한 일이 되겠나이까? 나는 과연 당신을 섬기는 것을 장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나이다. 도리어 이렇게 가난하고 부당한 자를 종으로 삼아 주시고 당신 사랑하는 종들 중의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니 이것을 내가 찬미하여야 마땅할 것이요, 크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3. 내게 있는 모든 것이나 또 당신을 섬기는 데 쓰는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이 아니옵니까? 그러나 순서는 바뀌어서, 내가 당신을 섬기는 것보다 당신이 나를 섬기나이다. 사람을 돕기 위하여 당신이 만드신 하늘과 땅은, 당신 면전에 있어 당신이 명하시는 그 모든 것을 매일 이행하고 있나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은혜를 베푸셨으니 천사들에게까지 명하시어 사람에게 시중들게 하셨나이다. 이것보다 기막힌 것은 당신이 사람을 섬기시고, 당신을 사람에게 주실 약속을 하신 것이나이다.


   4. 이런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써 갚으리이까? 어떻게 하면 나는 나의 일생을 두고 매일같이 당신을 섬길 수 있으리이까?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마땅히 당신을 섬길 수 있으리이까? 참으로 누구나 다 당신을 섬겨야 옳고 당신을 찬미하여야 옳으며, 당신을 영원히 존경하여야 옳겠나이다. 당신은 참으로 내 주시오, 나는 당신의 불쌍한 종이오니, 나의 모든 힘을 다하여 당신을 섬길 의무가 있고 당신을 찬미함에 한 번이라도 게을러서는 안되겠나이다. 내가 이것을 원하고, 내가 이렇게 되기를 사모하오니, 나의 부족한 모든 것은 당신이 채워 주소서.


   5. 당신을 섬기고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천히 보는 것은 큰 영광이요, 큰 명예로소이다. 당신을 섬기는 이 거룩한 일에 스스로 즐겨 자기를 굽히는 사람은 막대한 은총을 받을 것이옵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육체의 낙을 희생하는 사람은 성령이 주시는 극히 마음에 드는 위로를 누릴 것이옵니다. 당신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험한 길을 자신하여 걷고 모든 세상의 걱정을 상관치 않는 사람은 마음에 큰 자유를 얻겠나이다.


   6. 오! 하느님을 섬김은 그 얼마나 마음에 드는 일이며 기꺼운 일이겠나이까? 이로써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워지고 거룩하여지나이다. 오! 오로지 당신을 섬기는 데 힘쓰는 거룩한 수도 생활이여, 사람을 천사와 같이 만들고, 하느님께 의합하도록 해주고 마귀에게는 무섭게 뵈게 하여 주고 모든 교우들에게는 교훈이 될 만큼 해주는 거룩한 생활이여! 오! 항상 품에 안고 항상 원함직한 주님을 섬기는 일이여! 이로써 가장 고귀한 선을 얻게 되고 끝없이 누릴 즐거움을 얻게 되나이다.



5.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6. 강복




6. 해미 성지 순례 예식서



I. 해미읍성 안에서



1. 찬미가

    ○ 순교들  가득찼던  감옥없어도

        옥터에  신음소리  들리는구나

        머리채  묶어달던  호야나무는

        철사줄  몸에박고  살아있구나


    ● 세상은  순교자들  미워했어도

        그들은  천상임금  만나뵈려고

        시들어  열매없는  세상등지고

        왕이신  구세주를  따라가셨네


    ○ 갖은욕  온갖학대  달게받으며

        칼아래  원망없이  목숨내놓고

        묵묵히  의연하게  참으셨으니

        그들의  높은기상  고결하여라


    ● 어이다  찬양하랴  순교의영광

        뉘라서  표현하리  순교의갚음

        피로써  얼룩져진  그들머리에

        찬란히  빛나도다  황금월계관


    ○ 삼위로  일체이신  우리하느님

        지은죄  받을징벌  없애주시고

        우리게  주님평화  내려주시어

        영원히  크신영광  받으옵소서. 아멘



2. 성지안내


  1) 감옥터와 호야나무


   높이 5m, 길이 1,800m의 석성으로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이조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쌓인 울 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만 남아 있다.

   그 감옥터 옆에는 지금도 늙은 호야나무가 서 있다. 신자들을 끌어내어 머리채를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으로 오늘도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줄에 움푹 패이도록 옛 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2) 관아터와 장터길


   진영장이 호령하던 옛 동헌을 다시 복원하였다. 그 옆자리에 아문(衙門)과 호서좌영(湖西左營)의 옛 모습이 복원되어 있고, 뜨락에 있었을 법한 노송 여섯 그루가 당시 호령 소리, 곤장치는 소리, 비명 소리를 이파리마다 묻혀 놓은 듯 그 터에 서 있다. 관아터로부터 남서쪽으로 헐려진 옛 집터 사이사이에 질퍼덕한 길이 있다. 옛 저자길이다. 옛 님들이 저주의 욕설을 온 몸에 묻혀가며 형장으로 호송되던 길이다.


  3) 순교자들이 넘던 한티고개


  면천 고을과 예산 및 덕산 고을의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 군졸들이 압송하여 넘던 고개이다. 교우들이 무리지어 살던 면천의 황무실 마을과 덕산의 용머리 마을, 배나드리 마을 등지에서는 집단으로 체포되어 넘기도 하였다. 한티고개를 넘어 붙잡혀 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개 마루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막으로 뒤돌아 보던 곳에는 옛 주막의 터만이 남아 있다.




II. 자리개질돌 앞에서



1. 찬미가

    ○ 거룩한  순교자의  임금이시여

        주님을  고백한이  면류관이여

        속세를  초개같이  버린이들을

        천상의  낙원으로  부르시도다


    ● 목소리  가다듬어  간구하오니

        어지신  마음으로  들어주소서

        순교의  개선노래  불러드리니

        우리의  범한죄를  씻어주소서


    ○ 신앙을  고백한이  상급주시며

        순교한  성인통해  승리하시니

        용서를  너그러이  베풀어주사

        우리죄  벗어나게  도와주소서


    ● 사랑의  아버지와  독생성자와

        위로자  성령께서  삼위일체로

        영원히  무궁토록  살아계시며

        만물을  사랑으로  다스리소서. 아멘.


2. 성지안내


  1) 서문 밖 순교지


  저자길을 따라 서쪽 하수로에 다다르면, “재앙을 떨쳐내는 문"(征 門)이 비껴 있다. 재앙의 씨알머리를 서쪽에 내어 버리듯이, 사학 무리를 이 문 밖으로 끌어내어 쳐 죽였다. 잡아들일 때 빼앗았던 십자가와 묵주 등을 이 문의 난간에다 넣어놓고, 지나가며 밟게 하여 천주학을 버리고 목숨을 살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그님들은 성물에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문턱을 넘어 가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이 문의 누각에는 지성루(枳城樓)라 쓰여 있는데, 본래 탱자나무(枳)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이 서문이란 그 님들이 가시밭 인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그 님들을 밀어넣고 돌로 찧던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하수구를 가로 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는 그야말로 사람 도마였고, 여기저기 시체가 쌓여 썩고 피가 땅에 젖어 남아 흐르는 곳이 서문 밖이었으니 여기서 죽은 목숨이 몇 천이나 되었는지 헤어릴 수 없어 그저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던 곳이었다' 라는 말만 남아 있다.


  2) 피의 제사상 자리개돌


   서문 밖 순교지에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은 가지가지였다.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 명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도 하였으며,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죽이기도 하였다.

  특히 잔인하게는 돌다리 위에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 명의 군졸들이 들어올려 자리개질(태질)하여 머리와 가슴을 으스러지게 하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시 양촌 사람 방영창 안토니오 등 수많은 분들이 순교하였다. 꿈틀거리는 몸둥이가 있으면 횃불로 지져 숨을 끊어버렸다. 이 자리개돌은 서문 밖 순교 성지 일부를 확보하여 보존하고 있다.




III 여숫골 생매장터에서



1. 찬미가

   ○ 우리모두  이름없는  두뫼산꽃  이고싶네

       해가뜨면  낮이되고  달이뜨면  밤이어도

       묏산바라  하늘바라  내임으로  하오리라


   ● 해가뜨니  해뫼로라  해가지니  해미로라

       낮으로는  호야나무  매달리어  신음하고

       노소신자  자리개질  당할자가  뉘라던가


   ○ 여숫골짝  진둥벙에  찢긴백의  낙화되어

       큰빗물에  백골쓸려  흙속에서  침묵하나

       땅속에도  하늘처럼  님의품은  하나로다


   ● 치명순교  바라보던  소족군졸  이미죽고

       호야나무  늙은허리  봉두난발  고목이라

       옛날군영  어둠에차  부엉이만  슬피우네


   ○ 일백년이  지나가도  남는것은  님뿐이라

       짧은인생  한눈팔다  신덕애덕  잃지말고

      순교자들  본받아서  영원생명  시작하세


   ● 무명으로  순교하신  해미성인  본받아서

       이름없다  슬퍼말고  이름나길  고대말고

       들꽃같은  우리인생  주천주께  봉헌하세



2. 성지안내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1418년에 병영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사적 116호)은 1790년대로부터 백 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1790년대에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1870년대에까지 수십 명이 이름을 남겨놓고 있지만 그 외의 수천 명의 이름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해미의 땅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쓰러져 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799년에 이보현과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10년 옥고 후 옥사하였으며, 충청도 지방의 대대적 박해 시기였던 1815(을해)년과 1827(정해)년 기간 동안에는 손여옥 등 수많은 신자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을 해미 진영 군졸들이 수시로 급습하고 재산을 약탈한 후 신자들을 체포하여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하였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에 신분을 고려하여야 할 사람들(양반층)은 상급 치소인 홍주, 공주,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대부분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심리 절차(기록) 없이 해미에서 처형되어, 글자 그대로 무명 신자들이 수천 명 순교한 곳이 해미 땅이다.

   1866(병인)년 이후 몇 년 간의 대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숫자를 1천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가 3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박취득(라우렌시오)등 수십 명 뿐이다.


  1) 벌판길과 진둠벙


   1790년대부터 80여 년간 시산혈하를 이루던 서문(정분문)밖 사형터는 병인 대박해시(1866년 이후)에는 주거 인접 지역인 관계로 대량의 사학죄인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 수 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 생매장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된다.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죄인들을 외나무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쳐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죄인둠벙’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진둠벙’이라 불리어진다.


  2) 생매장 순교지 여숫골


   동구 밖 서쪽의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기에 “숲정이"라 불리던 곳이다. 오늘엔 논으로 가꾸어진 벌판이지만 병인년대에는 숱한 천주학 죄인들이 산 채로 묻혀졌던 곳이다. 옛날엔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던 뼈들이 많았었다 한다. 이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 하는데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산 사람들이 묻히던 어느 날엔 함께 묻힐 동아리 가운데에 어여쁜 규수도 있었다 한다. 묻기를 명할 찰나에 형장의 눈에 들어온 규수의 자색은 그 형장의 연민을 자아내었다. 어여쁜 얼굴에 어찌 사학을 하여 죽는 몸이 되었느냐고. 살려줄 터이니 사학을 버리라고 꾀었으나 입술을 깨물고 그 규수가 먼저 구덩이에 뛰어 내리니 동아리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묻히더라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 온다. 그날 묻히던 그 찰나에 하늘이 천둥으로 함성하고 사흘을 안개로서 생무덤을 덮어 주더라고 전해 온다. 묻히던 순교자들이 한결 같이 하늘에 외쳐대는 소리가 있었으니, “예수, 마리아!"라는 간구였다. 허나 구경꾼들이 듣고 전하여 준 오늘까지의 동리 사람들 말로는 “여수 머리"라 하여 여우 홀린 머리채로 죽어 갔다고 해서 이 숲정이를 “여숫골"이라 부르고 있다.


  3) 무명순교자 묘


   병인박해시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 목격했던 이주필, 임인필, 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1935년 서산 성당 범 베드로 신부가 생매장지 일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 및 묵주, 십자가를 수습하여 서산군 음암면 상흥리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었다. 1995년 순교자 대축일에 이를 다시 해미 성지로 이장하여 본래의 순교터(현 순교자 기념탑 앞)에 모셨다. 상흥리 순교자 묘소 자리에는 십자고상과 진토가 된 순교자 유해 일부를 모셔두고 있다.



3. 영성 강화


   기회가 좋든 나쁘든 나의 존재 전체를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 우리는 늘 나를 위해서 귀하고 좋은 것을 남겨 두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자신이 입으려고 새로 산 좋은 옷을 선 듯 남에게 입으라고 주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갓 태어났을 때 어머니의 건강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젖을 찾아 빨았다. 지금도 우선 내 것을 챙기려는 본능이 늘 앞서는 것을 보면 갓난 아이 때의 내 행동을 그것이 철 없는 것으로만 간과 할 수는 없다.

   순교는 나를 위해서 티끌만치도 남겨놓음 없이 온전히 하느님께 나 자신을 봉헌하는 행위다. 우리에게 신앙이 있다하지만 나를 위하여 따로 떼어놓은 삶이 얼마나 많은가? 의식 속에는 물론 무의식 속에 담긴 자기 몫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많은가? 고집과 주장, 소위 신념이나 의지, 현실적 필요나 미래에 대한 보장 등이 모두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데 장해물이다.

   해미 성지는 자신들이 죽어서 누을 자리마저도 하느님께 봉헌하고 서서 죽어 묻혔다. 아니 조금이라도 하느님의 손을 빨리 잡고 싶어서 서서 하느님을 향해 팔을 뻗기 쉬게 서서 숨졌다. 모두 온전한 자기 봉헌의 형상이다. 어서 빨리 남김 없는 자기 봉헌을 하고픈 인간 모습이 해미 여숫골 성지에 새겨져 있다. 세상에서 묻은 먼지를 털어 내느라 그들은 돌다리에 자리개질 당하는 것을 기뻐하였다.


(잠시 묵상)



4. 니체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


○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밑줄 부분에서 머리를 숙인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

●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5.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6. 강  복





7. 황새바위 성지 순례 예식서


1. 찬미가


   ○ 백두대간  동서멧발  차령산맥  이루면서

       무주장수  시작발원  금강물결  굽이치다

       계룡청산  백제고도  공주교촌  제민천에

       황새바위  순교성지  고운햇살  번지도다


   ● 공주부여  백마강에  땅거미가  아우를때

       강경포구  나바위에  수선탁덕  첫발딛고

       백마청강  좌우편에  호남호서  교우들이

       천주공경  죄목으로  참수치명  하였다네

 

   ○ 황새바위  순교성인  피와땀이  흘러흘러

       강변모래  붉디붉게  물들이며  젖어가니

       황새들은  둥지떠나  순교형장  적막하고

       백마강만  하염없이  흐르면서  슬퍼하네


   ● 내포사도  이존창님  신유박해  참수치명

       손자선님  팔등물며  천주배반  있을소냐

       유명무명  셀수없는  황새바위  순교성인

       천상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  공경하네


   ⊙ 우리들은  순교선열  신앙덕행  갈고닦아

       천지세간  널리널리  복음으로  물들이고

       천국에서  다함없는  하느님께  영광드려

       끝날까지  천주공경  영혼구원  이루세나.  아멘



2. 순례자의 기도


○ 순교 성인 성녀들이여! 저희는 지금 신앙의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모진 고통 속에서도 주님 향한 사랑에로 불타올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던 순교 성인들이여!

   당신들은 피로써 굳은 신앙을 지키셨고, 우리 후손들에게 크나큰 신앙과 사랑의 표본을 남겨주셨습니다.

● 하오나, 지금 저희들의 믿음과 주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나약하오니,

   순교성인들이여! 저희도 당신들이 걸으셨던 그 주님 향한 사랑의 길을 걷게 도와주시어,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빛이 되도록 전구해 주소서.

○ 서원으로만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이 아니라 입으로만 고백하는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당신들이 죽음으로 보여주신 주님께로 향한 굳은 신앙과 뜨거운 사랑이 우리 생명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주님께 전구해 주소서.

● 전능하신 천주 성부여, 오늘 이 순례의 길을 축복하시어 순교선열들의 당신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저희의 발걸음을 이끌어 주시고 보호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3. 성지안내


   공주 황새바위는 한국 천주교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증언지 중 하나로 그 의미가 크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남북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감영이 있었다. 이곳 공주 감영에서는 각 지방에서 잡혀 숱한 심문과 무서운 고문을 당하고도 배교하기를 거절하였을 때에는 감사의 명에 의해 황새바위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충청도 각 지방뿐 아니라 타 지역으로부터 끌려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교우들도 많았다. 충남의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공주, 이인, 탄천과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전라도 전주, 광주, 경기도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의 교우들이 공주에 와서 순교하였다.

   이곳 황새바위에서 천주학 죄인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 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은 참수, 교수, 돌에 맞아 죽음, 옥사, 아사, 매질 등으로 죽어 갔는데, 교회사가 달레(Dallet, Claude Charles)는 공주 감영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듭으로 된 밧줄 고리를 죄수 목에 씌우고 밧줄 끝을 벽의 구멍으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옥안에서 신호를 하면 밖에서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희생자가 죽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어 장례도 지내지 않고 밭에 내버려둔다." 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구멍이 있는 형구돌이 사용되었는데 구멍에 줄을 넣고 죄수의 목에 얽어맨 다음 형구돌의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였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병인박해 당시에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 조정의 박해령이 멎은 뒤에도 지방에서는 아직 그 여파가 남아서 피흘림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공주는 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기록상 마지막으로 순교자를 낸 1879년까지 100여 년 동안 줄곧 피를 흘리며 신앙을 고백했던 참으로 거룩한 땅이다. 달레는 “공주옥에서 순교한 이들의 이름과 숫자를 다 알 수 없었다." 고 말한다. 공주 감영록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우리 순교자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당시 ‘사학의 괴수'로 알려져 있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꼬)과 10여명의 회장들을 비롯해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 밖에 안 되었고, 최연장자는 남상교(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계층도 다양했다. 특히 어린이와 부녀자들까지도 온갖 고문과 회유, 공포속에서 배교하지 않고 순교로써 신앙을 굳게 지켰다. 황새바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은 목에 큰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어갔기 때문에 항쇄바위라 불리기도 했다.



4. 영성강화 : 자기의 결점과 약점을 인내하고 그리스도를 만유 위해 사랑하라


   1801년 4월 8일(음 2월 26일)에 황새바위에서 50세에 순교한 이존창(1752-1801)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잡혀 심한 고문과 꾀임에 빠져 한때 배교했었다. 그러나 그뒤 양심의 가책을 받고 내포지방을 떠나 부여 홍산으로 이사하여 배교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고 전교하였다. 그 결과 내포와 그 인근 지역에 복음을 널리 전해졌고 많은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다.

   또한 1866년 3월 11일 합덕 거더리에서 안 다블뤼 주교님께서 체포될 당시 주교님께서 황석두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하였으나 황석두는 주교님과 함께 순교하기를 간청하였다. 손자선(1844-1866년)도 황석두와 함께 안 주교님을 돕고 있었으나 왠지 안 주교님 체포 당시에 그 자에 있지도 않았고 순교하겠다고 따라나서지도 않았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 자리를 피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안 주교님이 체포된 후 에산 덕산 관아에서 안 주교님을 체포할 당시 압수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고 신자들에게 기별했을 때 아무도 나서지 않자 혼자서 그 물건들을 찾으러 관아에 갔다가 체포되었다. 덕산 관아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뒤 해미로 이송되었다가 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1866년 3월 31일 공주옥에서 23세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렇게 순교자들은 처음부터 순교의 용기를 갖지는 못하였다. 고문과 죽음이 무서워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배교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신념을 죽음을 이해 계산 없이 맞바꾸어 버릴 만큼 결코 강한 존재가 아니다. 망설이고 변절하고 이해득실을 따지는 존재가 인간이다. 우리는 모두 약점과 결점을 가진 나약한 인간들이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이내로 참아 견디며, ……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를 다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 베네딕또 아빠스의 「규칙서」 72,5.9.11-12; 「준주성범」 II,7,1-3; 마르 12,28-31). 그 인내가 오늘의 우리에게 순교로 다가올 것이다.



5. 대사를 얻기 위한 예절


  1) 사도 신경


○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밑줄 부분에서 머리를 숙인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2) 대사를 청하는 기도


○ 착하시고 어지신 예수님, 굽어보소서. 주님의 어전에 부복하여 열심히 기도하며 간구하오니,

   신망애 삼덕의 뜨거운 정과 범한 죄를 뉘우치는 참다운 통회와 아울러 행실을 고치려는 굳은 뜻을

   저희 마음 속에 심어 주소서.

● 착하신 예수님, 일찍이 주님을 대신하여,

    “그들이 내 손발에 구멍을 내고 내 뼈를 전부 세어 보았도다”한

    예언자 다윗의 말을 생각하고,

    깊은 감동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다섯 상처를 바라보며 묵상하나이다.


    (교황님 기도 지향과 일치하여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한번 바친다)


6. 강  복



P. 윤인규


출처 : 야옹
글쓴이 : 야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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