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사람은 만나고 살아야

뚜르(Tours) 2012. 2. 15. 17:31

그녀는 어디로부터 왔을까.

가끔 기억의 저편에서 걸어 나와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를 때가 많은 그녀, 별로 부유해 보이지도 초라해 보이지도 않는 60대 초반쯤의 그녀는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로 걸어와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마주보며 앉았습니다. 잠깐 차를 마시며 나를 보더니 화장실엘 가는 동안 자신의 짐을 보아달라고 부탁하였고, 돌아온 그녀는 내 짐을 보아줄 터이니 화장실엘 다녀오라고 하며 나의 부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아까 보니 너의 가방을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있었는데 조심하여라.”
“ 여기는 조심해야 할 곳이야.”
나 역시 화장실이 급하였기에 고마워했습니다. 그러나 차를 다 마신 뒤 그녀와 나는 인사말 한마디 없이 파리의 생 라자르 역사 카페테리아에서 각기 갈 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남프랑스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른 후 지중해선 열차를 탔습니다. 이탈리아 해안도시 산 레모를 가기 위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 벤티밀리아에서 이탈리아 국철로 바꾸어 타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비뇽에서 떠났던 나는 조용히 비가 내리는 벤티밀리아에서 하차하기 위해 막 승강장 출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생 라자르 역에서 헤어졌던 그녀가 남프랑스의 어느 역에서 승차했는지 내가 타고 있던 열차의 다음 칸으로부터 나와 승강장 앞에서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우린 서로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벤티밀리아로 왜 왔던 것일까?
문득 영어 단어 몇 마디가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언빌리버블(unbelievable)’ ‘코인시던스(coincidence)’ , 무언가 믿기지 않을 때 쓰는 단어였습니다. 파리에서와 그리고 이 열차에서의 재상면은 수억의 인구 중 하나를 다시 만나는 것만큼이나 확률이 낮기 때문입니다.

그 초로의 프랑스 여성은 일주일 동안 어디서 무얼 하다가 그 시간에 맞추어 내가 승차한 열차의 옆 칸에 탔으며, 여기서 다시 상면한 후 나처럼 벤티밀리아에서 하차하게 된 것일까? 뇌리에서 그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열차를 바꾸어 탈 시간에 쫓기던 나는 파리에서처럼 그녀와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작년부터 나는 내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좀 바꾸기로 했습니다. 지나치게 깔끔을 떨고 살았던 탓에 어쩌면 내 병이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주기는 좋아하고 받기를 싫어한 천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누구에게든, 그것이 형제든 남이든 의존하며 산다든가, 받으려 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습니다. 특히 친하다는 핑계로 민폐를 끼치거나 부담을 주는 부탁을 하는 등, 그러한 인간관계에는 체질적으로 알레르기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유전자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훌륭한 유산이라고 생각했었으나 하나를 받으면 둘을 돌려주어야 맘이 편해지는 지나친 편벽증이 과연 사람다운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연령 탓이기도 하겠지요. 누구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겐 항상 손길을 주저없이 내밀었던 나는 병적일 만큼 받는 것에만은 불편해하던 것이 깍쟁이 같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의외의 경험을 많이 하고 살고 있습니다. 피가 섞이지도 않은 지인의 집에서 한 달을 기거한 것도 내겐 처음 있었던 일이었는데, 온갖 정성을 쏟아 삼식(三食)을 만들며 내 건강을 챙겨준 배려와 사랑에 감동했고, 그저 속내를 모두 드러내놓고 자정까지 맥주잔을 기울이며 눈물을 보였던 사람에게도 형제보다 진한 사랑을 느낀 것입니다. 항상 어려울 때마다 떠올렸던 한 사람, 그의 배려와 사랑을 기억하며 16년 만에 만나기로 작정한 것과 빵집에서 오랜 얘기들을 풀어낸 것도 그러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 해가 갈수록 더욱 슬퍼지신다는 고령의 한 분, 내 어버이와 같은 사랑을 주시는 분이 계신 것으로도 나는 울먹였고 행복했습니다. 이메일이라는 인연으로 시작된 그룹 모임과 그로 인한 연(緣)이 있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북구(北歐)의 먼 나라에서도 잊지 않고 나를 격려해주시는 분, 그분은 눈 속에 조깅을 하면서 나를 떠올릴 때가 있다고 합니다. 블로그라는 매체로 만나 내 건강을 빌어주는 이웃들도 소중한 인연입니다. 그것들은 충분히 세상을 훈훈하게 해 주는 요소이니까요. 피가 섞이지도 않은 관계에서도 피가 섞인 사람들보다 더욱 끈끈하고 진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음은 어떤 가치와 비교될 수 없는 무한한 것이지요. 마치 맑은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지 않은가요!

출생의 그 시각부터 우리는 홀로 살 수 없는, 사람과의 만남 없이는 살 수 없는 숙명을 지닌 존재입니다. 서로 모르던 세상에서 살던 이들이 수억의 지구상 인구 중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우연은 거창한 운명 교향곡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것이 사적이든 공적이든 때로는 고통스럽거나 괴로운 관계로 슬프게 끝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음은 우리가 인간(人間)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이란 단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 오직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신비한 힘, 영적인 경험과 정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녀, 아주 짧은 시간에 스쳐갔던 프랑스 여인, 생 라자르 역사에서 만났던 그녀 또한 어떤 영적인 힘에 의해서 내 앞에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녀가 나를 어찌 믿고서 자신의 짐을 맡겼으며 나 또한 그녀의 무엇을 믿고 여행길의 모든 것인 내 짐을 맡긴 채 화장실을 다녀왔을까요. 그리고 또 벤티밀리아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 어쩌면 사람의 감성은 또 다른 차원이 아닌지. 오감이나 육감을 통한 공감과 신뢰, 그 파장과 매체를 통하여 서로 색깔이 어우러지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주고받고 사는 것이 사람이 사는 세상입니다.

전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전생이 있지 않고서는 내가 그녀를 만날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주변의 아름다운 사람들 역시 전생에서 혹여 초등학교나 동네 친구들은 아니었는지, 그 순수한 인연의 소중함을 이 새해 아침 깊게 느끼고 있습니다. 부족한 사람들끼리라도 올 한 해 맑고 고운 마음으로 즐거운 날들이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오마리의 <구름따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