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너무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뚜르(Tours) 2013. 4. 1. 18:32

두꺼비와 개구리가 논두렁을 가고 있었다.
개구리가 엉금엉금 기는 두꺼비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느리게 기어서 언제 양지바른 언덕에 도착하니?”
두꺼비가 개구리를 향해 대꾸했다.
“그렇게 빨리 가서 뭐할 거지?”
개구리가 말했다.
“그냥 빨리 빨리 가는 거야.
가서 누워 있으면 얼마나 좋아.”
두꺼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천천히 가는 것도 좋아.
이슬방울도 들여다보고, 풀꽃하고도 대화하며..”
개구리는 답답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펄쩍 펄쩍 뛰어가며 말했다.
“너같은 느림보하고는 같이 갈 수는 없어. 나 먼저 간다.”
개구리는 펄쩍 펄쩍 펄쩍 뛰어서 금세 사라졌다.
두꺼비는 천천히 천천히…
하늘도 보고 파리도 잡아먹으며
돌 틈에 기대어 졸기도 하며 엉금엉금 기어갔다.
두꺼비는 도랑을 건너다 말고 시체를 보았다.
그것은 경운기에 치어 죽은, 먼저 간 개구리였다.


 

육상동물 중 가장 빠른 동물로 아프리카의 치타를 꼽지만
그들이 주로 잡아먹고 사는 영양들의 속력도 만만치 않다.
오랜 세월동안 치타는 영양을 더 잘 잡을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영양도 나름대로 치타로부터 더 잘 피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앨리스가 ‘붉은 여왕’을 만나
그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정신없이 시골길을 달리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제자리걸음을 할 뿐이었다.
의아해하는 앨리스에게 여왕은
“이곳에선 있는 힘을 다해 달려야만 제자리에 머물 수 있다”
고 설명한다.

이처럼 생물은 도태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어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쳐져 낙오하게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가 달리듯이 우리는 달리고 또 달린다.
달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 추월을 당한다는 강박 관념에 짓눌려 항상 조급해 한다.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은 ’속도’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근대과학의 좌우명은 속도다.
빠르게, 더 빠르게, 조금 더 빠르게.
거기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생길 여유가 없다.
그리움, 아쉬움은 인간의 향기다.
성숙엔 시간이 필요하다.
씨앗이 꽃 피고 열매 맺기 위해선 사계절이 필요하다.
현명한 사람은 움켜쥐기보다는 쓰다듬기를, 달려가기보다는 구불구불 돌아가기를 좋아한다.
문명은 직선이고 자연은 곡선이다.
곡선엔 조화와 균형, 삶의 비결이 담겨있다.
천천히 돌아가고 쉬기도 하고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이걸 익히는 게 삶의 기술이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앞만 보지만
국도나 지방도로를 갈 때는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피에르 상소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느림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다.
느림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나이와 계절을 아주 천천히, 아주 경건하게 그리고 주의 깊게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느림은 속도의 반대편에 있거나 속도에 적응할 수 없는 무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느림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리지 않으면서
나 자신을 잊어 버리지 않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인디안들은 말을 타고 달릴때 이따금씩 말에서 내려 쉬면서
자기가 달려 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본 후 다시 말을 타고 간다고 한다.
말이 지쳐서 쉬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쉬고 싶어서도 아니라
혹시 너무 빨리 달리느라 자기의 영혼이 미쳐 뒤?아 오지 못했을가봐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

앞만 보며 빨리 달려 가다가 귀중한 영혼을 돌볼 틈을 잃어 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모습을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다.

 

/박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