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 민낯을 보다
정숙
숲길은 넓고, 소나무 향 그윽하다
챙 넓은 검은 모자에 들꽃 하얗게 그려
우아하게 천천히 즐기면서 걷는다
핑크 뮬리가 구름처럼 모여 들며 서로 손 내민다
포근히 감싸 안아주며
뛰는 가슴 끝까지 같이 하자며 속삭이더니
순식간에 찬바람 분다
갈바람이 애잔하긴 하지만, 숲의 가을은
더 뜨겁게 타오르더라 까불대는 사이
금세 길은 좁아지고 굽어진다
탱자나무들이 가시를 세워 몸을 움츠리게 한다
평생 그의 가슴팍에서 산책이나 즐길 작정이었는데
이제 회오리의 눈알이 된
범어포구 귀신고래의 구불텅한 초겨울 숲길
난 아무 곳에나 방황의 뿔을 꽂아대고 있다
되돌아갈 길도, 나아갈 길도 보이지 않는다
늦었지만 내 가슴에 핑크 뮬리를 심을 수밖에
시간의 민낯 보러 간 가을 숲에서
사랑의 민낯까지 만나고, 돌아보니
우수수 나뭇잎들이 지고 있다
해는 서산마루 어깨 잡고 안간힘 쓰느라
낯이 점점 더 붉어지고 있다
―웹진『시인광장』(2018년 12월호)
출처 : 블로그 ‘하루 시 한 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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