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산책길, 민낯을 보다 /정숙

뚜르(Tours) 2018. 12. 21. 09:41

 

 

산책길, 민낯을 보다

 

                                 정숙

 

 

숲길은 넓고, 소나무 향 그윽하다

챙 넓은 검은 모자에 들꽃 하얗게 그려

우아하게 천천히 즐기면서 걷는다

핑크 뮬리가 구름처럼 모여 들며 서로 손 내민다

포근히 감싸 안아주며

뛰는 가슴 끝까지 같이 하자며 속삭이더니

 

순식간에 찬바람 분다

갈바람이 애잔하긴 하지만, 숲의 가을은

더 뜨겁게 타오르더라 까불대는 사이

금세 길은 좁아지고 굽어진다

탱자나무들이 가시를 세워 몸을 움츠리게 한다

 

평생 그의 가슴팍에서 산책이나 즐길 작정이었는데

이제 회오리의 눈알이 된

범어포구 귀신고래의 구불텅한 초겨울 숲길

난 아무 곳에나 방황의 뿔을 꽂아대고 있다

되돌아갈 길도, 나아갈 길도 보이지 않는다

늦었지만 내 가슴에 핑크 뮬리를 심을 수밖에

 

시간의 민낯 보러 간 가을 숲에서

사랑의 민낯까지 만나고, 돌아보니

우수수 나뭇잎들이 지고 있다

해는 서산마루 어깨 잡고 안간힘 쓰느라

낯이 점점 더 붉어지고 있다

 

 

웹진시인광장(201812월호)

 

출처 : 블로그 하루 시 한 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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