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둔 고백
이창윤
사람들은 그곳을 난곡(蘭谷)이라 불렀지만
내게는 난곡(亂谷)
갈 곳 없는 해거름 때면 산자락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고
아침이면 버스 종점으로 구르듯 내려왔던 곳
드문 인적에도 맹렬하게 짖어대던 묶인 개
굳게 닫혀 있던 녹슨 철대문
진달래 지천으로 피던 봄이면 담을 넘었다가
늦가을 하얀 약봉지를 들고 돌아오던 Y
뒷집 술주정뱅이가 도끼로 찍어 허물어진 담벼락 아래
따먹지도 못할 억센 깻잎과 잡풀들이 자라고
폭우가 쏟아지면 비가 새던 기왓장
질척거리던 언덕길
한겨울이면 얼어붙던 머리맡 자리끼
마중물만 삼키던 마당의 펌프
청춘이 독약 같다고 낙서하던 스무 살
천장이 낮아 일어설 수 없었던 다락방의 새벽
ㅡ시집『놓치다가 돌아서다가』 (북인, 2018)
출처 : 블로그 '하루 시 한 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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