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탁족(濯足) - 황동규

뚜르(Tours) 2023. 6. 19. 12:25

탁족(濯足) - 황동규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냄새 풍겨 조금 더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입을 때

흔들어봐도 안 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넣고 걷다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 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

팔과 종아리에 이틀내 모기들이 수놓은

생물과 생물이 느닷없이 만나 새긴

화끈한 文身들!

인간의 손이 쳐서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있다

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 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2002년 미당문학상 수상작

 

<블로그 '시와 음악이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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