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 신경림
장난감 같은 간이역에 울긋불긋한 등산복 소녀들이 다섯
비바람을 타고 날아와 창에 달라붙는 나뭇잎이 새빨갛다
넓적한 플라타너스 잎으로 뒤덮인 역사 밖 천막 매점에서
중년 여자들의 대화가 무르익었다
커피를 파는 젊은 아주머니는 계속 통화 중
얼굴이 단풍빛이다
빗물에 젖은 성인가요는 중년처럼 끈적끈적하다
기차가 언덕을 돌아 장난꾸러기 손자 녀석처럼 뒤뚱거리며 들어서고
젊은 역무원이 스트레칭하듯 깃발을 흔든다
산골 역에 내리는 가을비가 무겁다
쉰 목소리로 기적이 재촉하는 게 아무래도
기차가 짙은 유화를 몽땅 안고 떠나버릴 모양이다
나만 혼자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 불안해
서둘러 차에 뛰어오른다
- 신경림,『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이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 본 죄 / 복효근 (0) | 2023.10.11 |
---|---|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0) | 2023.10.10 |
어떤 나쁜 습관 / 복효근 (0) | 2023.10.08 |
볼기의 탄력이 떨어질 즈음 사랑도 끝났다 /정선 (0) | 2023.10.07 |
시월의 어느 멋진 날 /전상숙 (0) | 2023.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