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네거리에서​​ / 김백겸

뚜르(Tours) 2024. 8. 19. 21:41

 

 

네거리에서​​  / 김백겸

 

 

신호등에 걸려 행인들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입학과 취직을 그리고 결혼을 기다려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부치고

그 사랑이 스탬프가 찍혀 다시 돌아오는 것도 기다려야만 한다고 오후의 하늘은 말하고 있었다

거리에 붙은 간판처럼, 다르지만 똑같은 얼굴을 하고 서서 행인들은 아직 건너지 못한 길 저편을 바라보았다

건너 손에 쥐어야 할 꿈, 진실, 영원에 대한 단서가 길 건너편에 있는 것처럼

기다리는 시간을 비집고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겨울바람과 가로수 잎, 마른 햇살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길 건너편 행인들도 이쪽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파란 불이 켜져 행인들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길 하나를 건너서 또 다음 신호등에 걸린 행인들은 도시문화의 기다림에 익숙해져

이제는 죽음마저도 기다릴 수 있을 것처럼 미래를 바라 보았다

길 건너편을, 언제나 건너서 만나야 하는 자신들의 영원을

- '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 문학사상사, 1988

- '커피와 사약', 심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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