暴雪이 한 닷새쯤 쏟아지면 / 이준관
폭설이 한 닷새쯤 쏟아지면, 그리하여
오직 하늘의 새의 길도 끊기면,
한 닷새 무릎까지 외로움에
푹푹 빠지며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도 좋으리.
간신히 눈 위로 남은
빨간 山열매 두어 알로
배를 채우고 가다 기진해서 쓰러져도 좋으리.
눈 위에 누워
너무나 아름다운 별에 흑흑 느껴 울어도 좋으리.
곰아, 너구리야, 고라니야, 노루야,
쓰러진 나를 업어다 너희 이부자리에 뉘여다오.
너희 밥솥에 끓는 죽을
내 입에 부어다오.
폭설이 한 닷새쯤 쏟아지면
나는 드디어 山짐승들과 한 食口가 되어도 좋으리.
노루의 눈에 비쳐
푸른 칡잎의 귀가 돋아나와도 좋으리.
사람들아, 내 발자국을 찾지 말아라.
그 발자국은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이 쏟아지는 暴雪에
덮이었으리니,
이미 나는 눈이 길길이 쌓인 숲의 굴 속에서
따뜻한 꼬리털을 베고 잠들어 있으리니.
- 이준관,『가을 떡갈나무숲』(나남,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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