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暴雪이 한 닷새쯤 쏟아지면 / 이준관

뚜르(Tours) 2025. 1. 13. 22:59

 

 

暴雪이 한 닷새쯤 쏟아지면   / 이준관

 

폭설이 한 닷새쯤 쏟아지면, 그리하여

오직 하늘의 새의 길도 끊기면,

한 닷새 무릎까지 외로움에

푹푹 빠지며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도 좋으리.

간신히 눈 위로 남은

빨간 山열매 두어 알로

배를 채우고 가다 기진해서 쓰러져도 좋으리.

눈 위에 누워

너무나 아름다운 별에 흑흑 느껴 울어도 좋으리.

곰아, 너구리야, 고라니야, 노루야,

쓰러진 나를 업어다 너희 이부자리에 뉘여다오.

너희 밥솥에 끓는 죽을

내 입에 부어다오.

폭설이 한 닷새쯤 쏟아지면

나는 드디어 山짐승들과 한 食口가 되어도 좋으리.

노루의 눈에 비쳐

푸른 칡잎의 귀가 돋아나와도 좋으리.

사람들아, 내 발자국을 찾지 말아라.

그 발자국은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이 쏟아지는 暴雪에

덮이었으리니,

이미 나는 눈이 길길이 쌓인 숲의 굴 속에서

따뜻한 꼬리털을 베고 잠들어 있으리니.

- 이준관,『가을 떡갈나무숲』(나남,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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