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김밥천국에서 / 권혁웅

뚜르(Tours) 2025. 2. 17. 22:38

 

 

김밥천국에서   / 권혁웅

 

김밥들이 가는 천국이란 어떤 곳일까,

멍석말이를 당한 몸으로

콩나물시루도 아닌데 꼭 조여져서

육시를 당한 몸으로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닌데 잘게 토막이 나서

나란히 누운

치즈복자, 참치복자, 누드복자들

순교의 뒤끝에서 식어가는 밥알은

김밥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 버려야 하는

헐거운 육신이다

김밥들이 가지 않는 불신지옥도 있을까

버려진 몸들답게 김밥들은 금방 쉰다

시금치는 시큼해지고 맛살은 맛이 살짝 갔지

계란은 처음부터 중국산이야

마음이 가난해도 천오백 원은 있어야

천국이 저희 것이다

천국에 대한 약속은

단무지처럼 아무 데서나 달고

썰기 전의 김밤처럼 크고 두툼하고 음란하지

나는 태평천국의 난이

김밥에 질린 세월에 대한 반란이라 생각한다

너희들은 참 태평도 하다

여전히 천국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복장 터진다는 말은 김밥의 옆구리에서 배웠을 것이다

소풍 가는 날에 비가 온다는 속담도

쉰 김밥이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깨소금이 데코레이션을 감당하는 그 나라,

김밥천국

자기들끼리만 고소한 그 나라 바깥의

불신지옥

- 권혁웅,『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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