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地巡禮

[스크랩] 죽산 성지 (일죽)

뚜르(Tours) 2006. 5. 18. 15:11



죽산 성지 입구

 


성지 전경

 


순교자 묘 정면 계단

 


순교자 묘 입구, 돌로 만든 둥근 묵주가 특이하다

 


순교자들의 묘

 


순교자 경배

 


무명순교자 묘

 


순교자 묘

 


순교자들의 묘

 


십자가의 길

 


예수님 상

 


십자가의 길 12처

 


피에타 상

 


피에타

 


순교탑 조형물 들 

 


성지 내 성당

 


성지 내 성당

 

죽산마을은 조선시대에는 도호부로, 뒷산 비봉산 동북쪽에는 고려 때 몽고군과 임란 때 왜적을 물리친 죽주산성이 있다. 이 죽산마을에서, 천주교의 4대 박해의 하나인 병인박해(1866년) 때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쳤다. 현재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하여도 25분이나 된다. 이 외에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피를 흘리면서 현 "죽산순교성지"인 사형장으로 끌려가 순교 하였다.  순교자 "김도미니꼬"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평온히 주님께 의존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안 마을 사람 10여명이 찾아와 열 일곱 살 난 그의 딸을 겁탈하려고 딸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이에 힘이 센 김도미니꼬의 둘째 아들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산으로 피하며 따라오는 사람은 돌로 쳐죽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순교자 김도미니꼬에게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을 데리고 와서 너희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래서 순교자 김도미니꼬는 여러가족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그들 앞에 내어 주었다.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갖은 모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는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또한 순교자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 자리에서, 순교자 여정문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한날 한 자리에서 순교하기도 하였다. 당시 국법으로도 부자를 한 날 한 시에 한 장소에서 처형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산순교성지에서는 부자가, 부부가 한 날 한 장소에서 처절하게 처형되었다. 이분들이 죽산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가 처형된 장소가 죽산순교성지 이다. 지금은 평평한 땅이지만 당시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길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였다. 이 골짜기는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송문주 장군이 지키고 있는 죽주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친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진터"라고 불렀다. "이진터"에 진을 친 몽고군은 송문주 장군에게 패하여 "사리티 고개"쪽으로 패주해 달아났다. 이러한 유래를 지닌 "이진터"가 병인박해 때,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하여 "잊은터"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성지를 되돌아 보면, 순교의 사형장으로서의 성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다. 그 중에는 두둘겨 때려 반쯤 죽인 상태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순교성지는 죽산순교성지가 유일한 곳이다.  또한 죽산순교성지 주변에는 "두둘기"라는 곳이 있다. 행정구역상 명칭으로는 삼죽면 덕산리인데, 죽산읍내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 지금은 삼죽면 면 소재지로 80여호가 사는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3,4호밖에 안되는 작은 주막거리였다. 두둘기는 지형이 조금 두둑하다하여 두둘기라 불렸다고도 하며, 이곳이 진흙땅이어서 신 바닥에 진흙이 떨어지지 않아 두둘겨 털었다하여 두둘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두둘기는 병인박해(1866년)때, 교우들의 애절한 사연이 서린 한 많은 땅으로 변하였다. 용인, 안성, 원삼, 가칠암이 등에서 숨어살던 교우들을 포졸들이 잡아가지고 돌아오다가 이곳에 오면 술을 마시고 쉬어갔다. 그러니까 이곳은 포졸이나 포졸 수하들의 집결지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모여든 포졸들이 이곳에 당도하면, 잡혀온 교우들에게 "돈을 내라", "이제 너희들은 저 달거리 잔등만 넘으면 죽는다. 돈을 내면 풀어주마" 하며 두둘겨 때렸던 것이다. 또한 뒤쫓아온 가족들은 잡혀온 교우들이 두둘겨 맞는 것을 보고 땅을 두드리며 원통해 하였다. 그리하여 두둘기는 이래 저래 두들겨 맞던 곳이다. 따라서 죽산순교성지가 순교를 항한 "두둘기"와 "잊은터"로 알려지게 되었다


순교자 박 프란치스코 (1835 -1868년)


1835년에 태어난 박(朴) 프란치스코는 장성한 뒤 오(吳)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이후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절골에서 약 2년 동안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1868년에 이르러 박해가 더욱 거세어지면서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그 해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마침내 경기도의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치게 되었다. 이때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포졸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프란치스코의 아내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한편 가족들의 사정이 궁금해진 프란치스코는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후 그 동네의 한 비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러자 그 비신자는 프란치스코에게 ‘내 집에 자면서 동정을 살피는 것이 마땅하다’고 안심을 시켰다. 그런 다음 밤중에 뒤로 빠져나가 포졸들에게 프란치스코를 밀고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체포되어 아내 마르가리타와 함께 죽산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 필립보와 맏아들 안토니오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특히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가 들어 있었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그 후 이 편지는 집안에 남아 있던 성물과 함께 박해 중에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프란치스코와 마르가리타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9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4세였다.


순교자 오 마르가리타 ( ? -1868년)


오(吳) 마르가리타의 출생지와 천주교에 입교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고, 훗날 박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이후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하였다. 마르가리타의 가족은 절골에서 약 2년 동안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1868년에 이르러 박해가 더욱 거세어지면서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며, 그 해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마침내 경기도의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치게 되었다. 이때 마르가리타의 가족은 포졸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가장 먼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한편 가족들의 사정이 궁금해진 남편 프란치스코는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가 한 비신자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렇게 체포된 마르가리타 부부는 함께 죽산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후 남편 프란치스코는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 필립보와 맏아들 안토니오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특히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가 들어 있었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그 후 이 편지는 집안에 남아 있던 성물과 함께 박해 중에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마르가리타와 프란치스코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29일(음력 8월 13일)이었다.


김 도미니코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평온히 주님께 의존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안 마을 사람 10여명이 찾아와 열일곱 살 난 그의 딸을 겁탈하려고 딸을 내놓 으라는 것이었다. 이에 힘이 센 김 도미니코의 둘째 아들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산으로 피하며 따라오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순교자 김 도미니코에게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을 데리고 와서 너희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래서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여러 가족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그들 앞에 내어 주었다.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갖은 모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는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여기중/여정문


순교자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 자리에서, 순교자 여정문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한날 한 자 리에서 순교하기도 하였다. 당시 국법으로도 부자를 한 날 한 시에 한 장소에서 처형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산순교성지에서는 부자가, 부부가 한 날 한 장소에서 처절하게 처형되었다.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성화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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