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티의 순교역사
대구에서 북쪽으로 28Km,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위치한 한티는 깊은 산골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 군에 걸쳐져 있으며,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팔공 산괴의 주봉에서 가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산과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고향땅을 떠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유교의 전통이 강하였던 영남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1801) 이후였다. 박해를 피해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이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상주 등으로 피난하여 신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잠시동안 외부와 격리된 이곳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앙정부의 관여 없이 지방관에 의한 국지적인 박해인 을해박해(1815)때에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등지의 많은 신자들이, 정해박해(1827)때에는 상주 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끝까지 배교(背敎)하지 않고 굶주림과 온갖 고문의 역경 중에도 옥사하지 않은 신자들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이때 대구 감영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과 형제들이 그들과의 연락과 옥바라지를 위해 감옥과 비교적 가깝고 안전하다고 판단한 이곳 한티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해역사
1839년 4월 정해박해 때에 체포된 신자들이 처형되기 한 해 전인 1838년 김현상 요아킴 가정을 비롯한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1850년대 말에는 큰 신자촌이 되었다. 경신박해(1860)때에 한티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졌다가 박해가 끝나자 다시 모여들었다. 1862년 장 베르뇌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서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신박해로 김현상의 후손들이 대구로 떠난 후 조 가롤로 가정이 중심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 살던 김응진 가롤로(김현상의 차남) 가정과 성상돈 아우구스띠노 및 그 숙부 서익순과 노곡동 송씨 가정과 신나무골의 여러 신자들이 한티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그 해 봄 문경 한실 서태순 베드로가 잡혀 상주 감영에 끌려갔다가 12월 19일 순교하니 그 조카 서상돈이 그 시신을 한티에 안장하였다.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는 듯 하자 서익순과 이 알로이시오가 한티에서 대구로 내려가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절두산에서 백지사를 당하고 한강물에 던져져 순교한다. 1868년 음력 4월 17일에 독일인 옵페르트(Oppert)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을 내려 박해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1868년 봄 한티에 포졸들이 들어와 재판과정도 없이 배교하지 않는 조가롤로를 비롯한 30여명의 신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달아나는 신자들은 뒤따라가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포졸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현재 한티의 순교자 묘가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한편 당시의 공소 회장이었던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 아기의 시신은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었다. 그리하여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던 신자촌이며 또한 그들이 처형을 당한 순교지였을 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완전한 순교성지가 되었다.
한티 공소 재건
1968년 박해의 칼날을 받은 한티 공소는 한줌의 재로 변한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마을에 살던 박만수 요셉은 살아남은 몇몇의 사람들을 모아 공소재건에 앞장선다. 먼저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순교자묘역 대형 십자가 뒤편)은 '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하여 바람맞이땅(현재의 초가집이 있는 곳)에 새로이 마을을 이룬다. 또한 당시 공소회장이던 조 가롤로의 아들 조영학 토마(당시 12세)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무렵 군위 칫솔에서 김재윤 플로리아노 가정과 김윤하 가정이 들어오고, 신나무골의 배순규 가정과 조규성 프란치스꼬 가정이 들어왔다. 1882-1883년 김보록 로베르또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이때 신자수 39명, 고백성사자 20명, 영성체자 19명, 세례자 3명 혼배자 1쌍이었다. 1885년 대구 본당이 설정되어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하게 되니, 김보록 신부도 한티에 자주 왔고, 한티 신자들은 대축일이면 신나무골로 미사참례하러 갔다. 이후 한티 공소는 새로이 번창하여 1900년 초에는 공소 신자수가 8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나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전교를 위해, 또한 생활이 불편한 이곳을 떠나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공소는 쇠퇴하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묘
한티 순교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순교자 묘의 대부분인 33기는 무명순교자의 묘지이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다음의 4기이다.
가롤로와 그의 가족(최 발바라, 조 아기)
조 가롤로는 상주의 구두실이 고향으로 그의 집안은 1839년이래 정권을 장악했던 풍양 조씨로, 그들은 1839년(기해박해)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박해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므로 문중이 얼마나 천주교인을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 가롤로가 천주교를 믿었으므로 그는 문중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친척들이 집을 불살라 버렸고 정든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은 3년 동안 충청도 황간과 상촌 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칠곡 한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숯을 굽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티로 피난 오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주일이면 신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 생활에 충실하던 그는 신자들을 지도하는 회장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티 부락에 열심한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서태순 베드로
서익순과 서태순 형제는 증조부 서광수 대(代)부터 하느님을 믿어온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충주 장원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강원도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1857년 상주에 도착한 이들은 2년간 살다가 1859년 장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살고 있는 대구로 왔다.1866년 경상도에서 전교하던 리델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대구에 와서 박해에 관한 소식을 전하자 신자들은 흩어져 피난을 갔는데, 서태순은 문경 한실로, 그의 형 서익순 가족과 서상돈 가족은 한티로 피난을 갔다. 서태순과 부인 김데레사와 7세된 남자아이는 1866년 문경에서 잡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조카 서상돈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오가면서 서태순의 옥바라지를 해 주었는데, 한번은 서태순이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옥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참혹한 광경에 이후 서상돈은 평생 쌀밥을 먹지 않았다 한다. 서태순 베드로가 1866년 12월 18일에 34세의 나이로 순교하자 그의 시신을 형 서익순이 한티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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