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서울을 수비하던 군사 요충지였다. 1636년 인조가 병자호란을 맞아 이곳으로 피난왔다가 결국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한 치욕의 장소이다. 남한산성은 본성과 외성, 옹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레는 무려 11.76Km이며 성곽의 높이는 낮은 곳이 3m, 높은 곳은 무려 7.5m에 달한다. 남한산성은 원래 토성으로 만들어졌다. 기원전 5년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가 말갈의 침입을 피해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얘기가 있다. 성내에 온조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672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 때에 이르러 다시 중요성을 인정 받았다. 문무왕은 당과의 연합을 깬후 한강 유역일대를 수비하기 위해 남한산성에 토성을 쌓았다. 이로부터 949년이 흐른 1621년 광해군은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기 위해 토성을 오늘날의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했다. 1624년 인조는 남한산성 개축을 대대적인 국가사업으로 독려, 1626년 서울의 남쪽을 수비하는 번듯한 석성으로 완성시켰다. 남한산성은 한·중 관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소재중 하나이다. 향토사학자들에 따르면 청태종은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전 남한산성 전투가 승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그는 직접 첩자들을 보내 남한산성의 위치와 길이, 높이, 접근로 등 많은 정보들을 수집했다. 청태종은 이를 근거로 직접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인조는 청태종의 예측대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청태종의 생각 보다 견고한 성이었다. 인조는 항복과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틈바구니에서 45일간 버틸수 있었다. 병자호란이 인조의 항복으로 막을 내린 후 청태종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볼모로 끌고 갔다. 그러나 청태종은 왕자를 볼모로 끌고가는 것에 안심하지 않고 남한산성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청태종은 인조의 항복문서에 남한산성을 개보수 하려면 사전에 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글을 넣도록 요구 했다. 이 때문에 병자호란이후 조선에 들어온 청의 사신들이 제일 먼저 들른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었다.
남한산성 성지
남한산성은 천주교의 박해가 일어난 시초부터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이곳에 끌려와 순교를 하신 곳이다. 한국 초대교회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인 신해박해(1791)와 신유박해(1801) 때 많은 분들이 잡혀 있었던 기록이 있으며, 병자호란(1636년) 이후 처형터가 있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 일원, 양주, 용인, 이천 등에서 잡혀 온 무명 교우 약 300분이 참수, 교수, 장타, 도모지법 등의 방법으로 치명, 순교하셨으며, 순교자들의 시신은 남한산성의 물이 나가던 수구문을 통해 버려졌다. 이곳의 첫 번째 애환은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피난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을 수성하였지만, 모든 사정이 악화되자 결국 이듬해 1월 30일 백관과 군사들의 호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성문을 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은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가리켜 '치욕의 비' 또는 '한(汗)의 비'라 불렀으니, 이것은 곧 '호국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39년의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두 번째 애환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호교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몸부림은 천상의 승리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신앙인들의 노래는 훗날까지도 이어져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1626년에 산성리가 형성되고 1795년부터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호교의 노래를 부른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바로 그 해 겨울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바오로)도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그들에게 내린 사형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塗貌紙)라고 부르던 백지사(白紙死)였다. 이 형벌은 먼저 팔과 양다리를 뒤로 하여 나무에 결박하고, 여기에 풀어헤친 상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한 장씩 겹쳐 나감으로써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순교한 정은의 시신은 동문 밖에 짐승의 먹이로 버려졌다가 가족들에 의해 어렵게 거두어져 단내에 안장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수원교구 구산성지 참조).
순례지 안내
야외 미사터
현재 야외미사터는 성지 소성당이나 기념관터로는 부적당하지만 주변의 토지와 건물들을 매입하면 가능하다. 성지 개발 기금 마련이 시급하다.
소성당
성체가 현시되어 있으며 두 분의 성인 유해가(김성우-안토니오, 최경환-프란치스코) 모셔져 있고 성지순례 미사 전례시 양형 영성체를 하고 있다.
포도청과 군뢰청의 순교터
현 중부파출소 부근에 옛 포도청이 있었고, 그 뒤로 군사들이 신자들을 고문하던 군뢰청(軍牢廳)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남한산성 안의 가옥수가 1,700여 세대나 되었고, 광주 유수가 아주 넓은 지역을 다스렸던 만큼 포졸과 군사들의 수도 많았을 것이다.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나와 이곳에서 갖가지 형벌과 문초를 받거나 장형, 백지사 등으로 순교하였다.
연무관
남한산성은 군사적 요충지로 병자호란 때는 인조 임금이 피신했던 곳이다. 따라서 이곳 연무관 앞에서는 언제나 군사들이 훈련을 하였고, 그 때마다 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무술 연마 대상으로 삼아 목 검으로 찌르고, 매로 때리곤 하였다. 그러다가 실신하면 옥으로 데려가고 죽으면 그대로 동문 옆의 수구문 골짜기에 내다 버렸다.
옥터
로터리 주차장 옆 천일식당 앞이 옛 옥터이다. 그 당시 옥은 네모진 가장자리에 허리춤 정도로 고랑을 판 다음에 짚이나 숫대 등으로 대충 지붕을 해얹고, 소나무 기둥과 거적으로 벽을 만들었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겨울이면 찬바람이 그대로 몰아치는 이러한 옥안에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모진 고문과 매질로 찢기거나 피멍이든 몸으로 마지막 기도를 드리면서 순교할 그날을 기다리곤 하였다.
수구문과 골짜기(동문 오른쪽)
남한산성의 물이 나가던 수구문은 성안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이 이곳 골짜기에 버려지면서 시구문(屍軀門)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 흔적은 골짜기의 물과 함께 흘러가 버렸지만, 박해 시대 때는 순교자들의 시신이 수십일씩 방치되면서 사람들이 꺼려했던 곳이다. 당시 군교자들의 시신은 짐 승들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때로는 그 시신이 잠자는 듯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동문 밖 (현 주차장)
남한산성의 형장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한덕운(토마스)이 참수 당한 순교터이다. 이후 박해가 거듭되면서 체포되어 오는 신자 수가 많아지게 되자, 동문(좌익문) 밖 형장 대신에 주로 성내에서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수어장대
남한산성의 유수가 군사를 다스리던 수어영의 높은 장대로,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서도 지도층으로 이름이 있거나 양반인 경우에는 이곳에서 문초를 당한 후 순교자가 되거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서문
서문은 한양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수어장대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은 주로 이곳에 버려졌다.
저자거리
남한산성의 옛 장터가 있던 곳, 포졸들은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끌고 다니며 시위하거나 사람들을 모아놓고 처형함으로써 누구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았다.
북문(전승문)과 남문(지화문)
죄인 아닌 죄인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온 문이요, 한 번 들어오면 죽어 나가야하는 문이였다. 순교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모습으로 포졸들에게 포박되어 이 문을 통과하면서 기쁨에 겨워했고, 죽어 나가면서도 하늘의 문으로 들어가는 영광에 또 기뻐했을 것이다.
■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 (1752-1801)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韓德運)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지충은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그 후 토마스는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주 신부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800년 10월, 토마스는 좀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다음해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교회와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바오로)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때 그는 놀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그 시신에 애도를 표하였다. 그런 다음 그의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을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재영은 그 후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1839년에 순교하였다. 또 토마스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사실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한덕운 토마스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토마스가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밖의 순교자들
서태순, 이조녀, 이학록, 이정현, 엄쾌길, 서상철, 이기좌, 권경보, 김준원, 오선장, 김하상
정원명, 정성재, 한동원, 이재금, 한경조, 이장복, 정오복, 윤재현, 김상희, 송일지, 송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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