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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회의 창립

뚜르(Tours) 2006. 6. 30. 12:03

제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님의 긍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 드리고자 합니다.^^

 

1. 우선 교회가 어떻게 창립되었는지부터 보려고 합니다.

 

<마태 16.15~20

15 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6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17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18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0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위의 성경 말씀같이,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를 베드로 즉 반석이라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시고,

베드로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천국의 문을 열고 닫을수 잇는 열쇄^^도 주십니다.

 

2. 주님이 부활 하시고 승천하신 후, 주님은  성령께서 강림하시도록 하셨습니다.교회의 출발점은 이때부터 잡습니다.

 

<사도행전2. 1~4

1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2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4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성령강림 후 박해가 두려워 숨어 잇던 사도들은 용감하게 밖으로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즉 주님의 교회는 이렇게 출발하였습니다.

 

3. 새로운 주님의 사도가 등장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박해자였던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주님의 부활과 현존을 체험한 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3~6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4 그가 땅에 엎드리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5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 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대답이 들려 왔다.>

 

사울은 바울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특히 이방인을 위하여 여러 지방으로 다녔습니다.

사울 이외의 다른 사도들도 유인대을 상대로 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4. 주님의 부활 후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또한 다른 지역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허러 다녔습니다.

바울로는 주로 비 유대인 즉 이방인을 상대로 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로마까지 갑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곳 저곳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로마에까지 가 복음을 전하였고 거기서 바울로와 함께 순교를 합니다.

 

예수님이 게시지 않은 초기의 교회는 대개 두가지 방향에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우선 야고보, 베드로 등은 예루살렘에서 복음 전하였고

유대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다 보니, 유대교적인 율법을 준수하는 동포들인 유대인의 율법관습을 잘 헤아리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직까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적인 즉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완전한 벗어남이 없었으며 하여 유대교의 전승대로 토요일(안식일)에 모여 집회도 하였으며, 또한 주님의 부활일인 안식일 다음날(오늘날 일요일)에 모여 주님을 전하고 성찬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예언하신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여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포위되어 멸망을 한 서기 70년대 이전에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교로부터 분노를 샀으며 그리스도교의 유대인들은 동족을 배신한 자로 낙인을 찍었으며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원수로 취급하였답니다.

하여 서기 80년대경, 유대교인들이 예루살렘에 다시 모여 그들의 조직을 정비하면서 유대교 전례를 위한 기도문을 마련하였습니다.

그 기도문에는 그리스도교를 저주하는 전례양식(기도문)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80년대에 와서는 완잔히 유대교와 결별을 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교 독자적인 교회가 되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5. 야고보 등의 유대계 사도들은 여전히 구약의 율법적인 견지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사도 바울로는 야고보등의 유대걔 사도들과는 달리  새로운 관점인 은총과 믿음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여 초대교회에서는 같은 사안이었으나, "은총과 믿음" 그리고 "행동을 수반하는 믿음"이란 주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답니다.

 

또한 주님이 승천하신 후 이러한 시기의 초대교회에서는 이미 이단들의 발생하였습니다.

<에수님은 인간의 허물만 쓰고 오신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들도 들 끓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러한 자들은 적 그리스도라고 질타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보고 들은 복음을 전히였습니다.

 

<요한 일서 1~3

1 사랑하는 여러분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믿지 말고 그들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많은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2 하느님의 성령을 알아 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3 예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대자로부터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자가 오리라는 말을 여러분이 전에 들은 일이 있는데 그자는 벌써 이 세상에 와 있습니다.>

 

즉 주님이 부활 승천한 직 후 초대교회에서는,

야고보를 중심으로 하는 복음사가들과 바울로를 중심으로 하는 복음 전도사들간에 치열한 논쟁과 경쟁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었고,

일부 이단자들은 바울로를 <가짜 사도>라고 비방도 하고, <이단>이라고 모함도 하면서 어수선하게 저마다 복음을 전하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과 완전한 하느님이심을 부정하는 이단들도 들끓었으며,

세상을 산과 악, 성스러움과 속됨 등등,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분류하면서 영적인 지혜를 구하는 소위 영지주의 그리스도파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답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여러가지 문제들(영지주의 율법 준수 등등에 대한 공통적인 판단을 위해서 모두 모여서 교회회의(이를 세계공의회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를 개최하였는데 사도행전 15장에서 그 선례를 볼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5.1~5

 1 그 무렵 유다에서 몇몇 사람이 안티오키아에 내려 와 교우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2 그래서 바울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와 그들 사이에 격렬한 의견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는 바울로와 바르나바와 몇몇 신도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다른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3 그들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떠나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 가면서 이방인들이 개종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리하여 그 곳 모든 교우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4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들은 사도들과 원로들을 비롯한 온 교회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도와 이루어 주신 일들을 모두 보고하였다.

5 그런데 바리사이파에 속했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이 나서서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일러 주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 사도들과 원로들은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회의를 열었다.>

 

6. 이렇게 복음을 전하면서 사도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교회를 성장시켰습니다.

초기 100년 안팎에는 로마제국의 영토안에서 4개의 큰 교회들이 성장을 하였고 이들 교회들은 모두 같은 사도들의 신앙의 계승자였습니다.

이들 교회는 지역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상장시킨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다스려 나갔습니다. 즉 속지주의적인 교회 교구로서의 모습입니다.

이들 4개 초대 교회(교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로마교회, 안티오키아교회, 알렉산드리아교회, 예루살렘교회,

이들 4개의 초대교회들은 각자 자기 교회안의 신자들에게, 다른 교회와  독립적으로 그러면서도  동등하게 성장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이들 교회 중에서 로마교회는 로마에서 순교하신 사도 바울로와 베드로께서 세우시고, 베드로의 후게자가 베드로의 직을 수임하엿기 때문에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우위에 있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세워졌고" 역시 전체 교회회의는 사도행전 15장에서처럼, 베드로의 진행으로 성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각기 다른 초대 교회들이 경쟁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지만, 베드로의 직무를 계승한 로마교회의 주교(사도들의 후계자를 주교라 합니다.)가 모든 교회의 일치의 중심이었습니다.

 

서기 100년대 쯤에 그리스도교 즉 기독교의 교회의 이름은 <누구나 어느 시기나, 어느 장소에 관련없이 보편적으로 믿어야 할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라는 의미에서 <기톨릭교회>라고 불리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그리스도교)의 성립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보는바와 같이 베드로 위에 세워졌고,

기독교의 교회 이름은 <가톨릭교회=보편교회= 공회>라고 100년경부터 불리워졌다는 것입니다. 하여 기독교와 가톨릭교회는 별개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 시기를 전 후로 한 기독교의 교부(기독교의 복음과 교리를 체게화한 기독교의 초기 지도자들)들은 거의 예외없이, 다른 교회(교구)들은 주님의 원하신 것처럼, 로마 교회의 주교와 일치하고 로마 주교의 최종적인 권위에 순명할 것을 가르쳤으며, 또한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아직 교회가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7.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루한 박해가 끝이 나고 서기 313년대에 그리스도교를 인정을 하엿습니다.

이렇게 해 준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입니다.

 

이 황제는 로마의 주교(오늘날 교황 혹은 교종이라고 불립니다.)의 권위와 교회의 중심인 것을 알고 로마의 주교에게, 그리스도교가 공인전에 라테란 궁전을 지어서 아부성^^선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제인 자신은 당연히 기독교까지 다스릴수 있다는 것을 은연 중 공포하기도 하였으며 기독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책도 펼쳤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주교는 이러한 것에는 별 반응도 없었고, 더우기 로마제국의 원로들은 <이교인 기독교.에게 너무 잘해주는 황제에게 불만을 터트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의 수는 전체 로마제국의 인구의 10%도 채 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이러자 겸사겸사해서 황제는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의 도시)로 옮깁니다.

 

그리고는 황제 자신의 기독교에 대한 영향력을 강대화 시키기 위해서, 당시에 아주 미약하였던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를 마구 성장시켜주고 힘을 부여해 줍니다.

콘스탄티노플교회는 총대주교좌의 교회로 승격되었고,

콘스탄티노플교회의 총대주교는 로마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의 주교를 서임할 수 있는 권한 까지 부여됩니다.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서열은 이제 로마교회 다음인 제2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제2차 세계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4차 공의회인 칼케톤 공의회에서 강도처럼 처리하였습니다.

로마를 비롯한 다른 교구(교회)들은 거세게 항의를 하였지만 황제의 힘을 꺽을 수는 없었습니다.

 

현재 그 교회는 가톨릭교회와 분리되어 지금은 정교회라고 스스로 부르지만, 콘스탄티노플교회는 전체 교회 중 서열 2위로 되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로마와 재일치를 하게되면 당연히 로마교회가 맏형으로서 서열1위를 되차지 할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로마교회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정교회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1054년도에 동서(동=>정교회, 서=>가톨릭교회)로 분리되기 전의 모든 교회들은,

로마교회의 주교(교황0을 중심으로 수시로 일어나는 이단들을 대항하여 세계공의회를 개최하였고 거기서 신앙신조들을 확정하였습니다.

 

우선 사도신경은 로마교회의 신앙고백이자 세례를 받고자 하는 입교인들의 교리문답으로 존재해 왔으며,

325년에 제1차 세계공의회인 니체아 회의에서 <니체아 신조>

381년 제2차 공의회에서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조>

451년 제4차 공의회에서 <칼케톤 신조>를 선언하였습니다.

(세계공의회가 성립이 되려면, 반드시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의 승인 혹은 공인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없을시에는 세계공의회가 될 수없고 지역 공의회=시노드가 됩니다.)

 

그리고 381년도다마소 교황에 의하여 로마회의에서 기독교의 성경목록(구약 46권, 신약27권)이 확정되었고,

이는 다시 389년 카르타고교회에서 재확인 되었으며,

종교개혁기인 트레엔트 공의회에서 재차 확인 선언되었습니다.

 

위의 성경과 초기 세계공의회에서 선언된 4개의 신앙신조는 기독교가 고백하는 핵심신앙신조가 다 들어 있는 기독교의 절대 보물입니다.

 

8. 기독교는 이렇게 성장 발전되어 왔으나, 로마 황제에 의해서 급조되고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점차 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로마 교회의 주교(교종=교황)와 경쟁을 벌리려고 하였습니다.

더우기 7세기 경에는 다른 지역 교회들은 아랍족에 의해서 멸망하여 허울만 남아 있는 교회로 되자, 총대주교는 더욱 더 교황의 자리를 넘보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콘스탄티노플의 경쟁과 독단 그리고 당시의 지역적인 여건, 정치적인 여건, 신앙고백상의 문구 문제 등등이 어울러져 <<1054년에 교회는 그만 로마교회를 중심으로한 서방 가톨릭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한 동방의 가톨릭교회로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이 점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부언되지만 너무 길어 지기에 넘어갑니다.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는 스스로 정교회라고 이름을 지어 현재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동방의 가톨릭교회 즉 정교회 치하에 있는 교회들 중, 콘스탄티노플의 행동이, 부당함을 깨우쳐 다시금 로마교회와 일치를 하여 가톨릭교회에 합류하고 있는 동방 교회도 점처 많아 생겼습니다. 이들은 정교회의 문화와 전례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나 예전처럼 로마와 일치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들을 정교회와 구분하여, 동방 가톨릭교회 혹은 유니트라고 합니다.

정교회는 터어키의 지배하에 복음 선교가 정체되고, 근래까지 공산화되는 바람에 교회 성장은 거의 없었습니다.

 

 

9. 로마교회는 역동성을 가지고 우럽을 개종시켰으나 여러가지 정치적 사안에 휘말려 많은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더우기 교황이 프랑스에 유페되기도 하고,

교황 내부에 분열이 생겨 대립교황이 생기기도 하여 교황의 위신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16세기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하여 건축헌금을 과도하게 걷는 도중에 자질이 없는 사제들에 의한 부당한 헌금방식이 문제가 되어 교회는 다시 분열에 휩싸입니다. 이를 개신교 측에서는 면죄부라고 합니다만,

사실 면죄부라는 용어는 부당합니다. 정확한 용어로는 <면벌부> 혹은 <대사>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대사>는 당시에 남용되었고, 무지한 성직자들에 의해 미신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사유로 인하여 급기야 루터의 종교개혁을 불러 일으켰고, 이어 캘빈 등의 종교개혁가들이 교회전반의 전통과 교리등에 대하여 거세게 흔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루터 등은 사실 교회를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서로 과격한 대응, 비방, 등으로 인하여 루터등은 결국 교회를 떠났고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등이 생겼습니다.

 

루터의 후원자 특히 멜랑히콘 같은 루터의 최 측근들은 교회와 일치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루터의 신앙고백인 우구스부르크 신조를 보면 거의 가톨릭과 대동소이 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녹스나 쯔빙글리는 완전히 가톨릭 냄새를 지우려 하였고,

캘빈등은 개혁을 가톨릭적 요소가 포함된 방안으로 하였습니다.

 

성공회는 영국의 국왕이 이혼을 시켜 주지 않으므로 하여 교황과 등을 돌린 채 영국국교회(성공회)를 창립하였으며,

성공회에서 다시 침례교가 파생하였습니다.

영국의 가톨릭은 영국국교회로부터 대단한 박해를 근래에까지 받았으며,

영국국교회에 저항한 영국의 개신교를 청교도라고도 합니다.

 

이들 개신교는 30년간 종교전쟁을 거친 후애 비로서 독립된 교회로 인정을 받습니다.

이 종교전쟁은 마치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쟁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개신교적 국수주의대 가톨릭적 세계주의의 전쟁이었고,

무엇보다고 강대국인 가톨릭인 프랑스가 개신교를 지원함으로 개신교가 승리하여 종교의 자유를 찾게 해 주었습니다. 이 전쟁을 마무리 지은 조약이 베스트팔렌 조약이라고 합니다.

 

유럽교회는 종교개혁가들에게 많은 지역을 빼앗겼으나.

교회안의 개혁가들 이를테면 성 이그나시우스의 수도회인 예수회에 의해서 많은 지역을 다시 가톨릭으로 되 돌렸습니다. 그 후 전세계를 향한 선교를 하여 전세계에 가톨릭이 전파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일본에까지 복음의 손길이 뻗혔습니다.

 

그 이후로 가톨릭은 개신교를 집떠나버린 찢겨진 자식이라하여 "열교" 이름지어 부르며 미워하였고,

개신교 역시 가톨릭을 부패한 어머니라고 비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신교가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을 부르짖었으나,

가톨릭의 성경 이외에.

가톨릭교회의 세계공의회 신앙신조를 모두 가지고 나가, 그들의 기본 교리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개신교라하여 가톨릭과 다른 신앙고백을 하는 새로운 종파는 아닙니다.

 

10. 금세기 들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안의 새로운 성령강림이라 할 만큼, 전반적으로 교회의 쇄신과 개혁을 선언하였습니다.

 

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 중에는 개신교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갈라진 형제>라 하였고,

정교회 총 수장인 콘스탄티노플교회 총대주교와 화해를 하며, 다시금 포옹을 함으로서 서로의 일치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며 파문한 것을 철회하기도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기를 맞은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도 wcc를 결성하여 일치에 관심을 돌렸으며, 이 세계개신교협의회(WCC)에서 교황은 전체 기독교의 지도자라고 인정을 하면서 개신교들도 긍극적으로 가톨릭교회를 지향한다는 선언도 하였다고 합니다.

 

쇄신과 개혁을 언제나 두려워하지 않는 가톨릭교회는 항상 지난 잘못을 시인하고, 새로운 전망을 향해,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향해 팔을 벌리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가톨릭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가톨릭 Good News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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