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 대성당
고딕 장식으로 치장한 랭스 대성당의 서쪽 정면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3개의 정문은, 위쪽에 있는 작은 장미창과 스테인드 글라스를 끼우고, 조각을 박은 아치를 몇 겹으로 둘러 양감이 풍부하도록 구성했다. 또한 커다란 장미창과 그 양쪽에 2개의 연속된 아치, 그리고 ‘왕들의 갤러리’와 쌍탑 등 곳곳에 새겨 놓은 가는줄 세공은 이 대성당의 특징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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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 대성당의 내부 출처- cafe.naver.com/cathedrals
중앙의 신랑에 서면 너비에 비해 천장이 높기 때문에 건물의 수직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더욱이 세로선의 연결을 강조한 원주들이 상승감을 더해 준다
스테인드 글라스
스테인드 글라스
스테인드 글라스 장미창
장미창
스테인드 글라스
스테인드 글라스, 샤갈의 유리화
스테인드 글라스, 샤갈의 유리화, 제대 뒷편
스테인드 글라스, 샤갈의 유리화 예수 그리스도
성모상
성모상
랭스 대성당 서쪽 정문에 있는 많은 조각상은 모두 생생한 표정이어서 인간미가 넘치는 고딕 조각이다. 문 오른쪽 기둥에는 ‘수태고지’와 조각사에서 최고 걸작에 속하는 ‘성모 마리아의 엘리자베스 방문’이 있다. 또한 이 성당의 특징으로서, 자연주의에 뿌리를 둔 식물 조각을 기둥머리를 비롯해 곳곳에 새겨 놓았다
대성당 서쪽 정면 가운데 문에서 ‘천사의 미소’를 띠고 있는 천사상. 13세기 이래 천사의 미소가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신의 은총을 내려주고 있다
533년에 죽은 랭스 대주교 레미기우스의 무덤 위에 11~12세기에 생레미 성당이 세워졌다.
원래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성당이었다
1847년에 17세기 풍으로 재건한 생레미 수도원의 성레미기우스의묘. 랭스 대주교로 있던 레미기우스가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에게 성유를 발라주는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랭스 대성당, 생레미 수도원, 토 궁전
프랑스에서 랭스 대성당만큼 왕권과 밀접하게 결합해 있던 성당도 없다. 프랑스의 전신인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가 한창 세례식을 하고 있는데, 비둘기 1마리가 공중에서 내려와 대주교에게 성유를 건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뒤 역대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은 랭스 대성당에서 이 성유를 사용해 거행했다. 대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멋진 고딕 조각들은 무명 예술가의 작품인데, 많은 조각상이 싱글벙글 웃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프랑스의 미소’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대성당으 제1차 세계대전 때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다행히도 복구되었다. 프랑크 왕의 가톨릭 개종- 496년 크리스마스 날엔 랭스 거리는 온갖 사치로 치장되었고 광장에는 선명한 색깔의 융단이 깔려 있었다. 성당 앞 광장을 가득 메운 3000여 명의 프랑크 병사가 국왕 클로비스를 맞이했다. 레미기우스 대주교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메로빙거 왕조의 초대 왕 클로비스가 맨 먼저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수행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세례에 즈음해 레미기우스는 엄숙하게 “가만히 머리를 숙이라. 그대가 파괴한 것을 받들고, 받든 것을 파괴하라.”고 말했다.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공표한 것을 계기로, 프랑크 왕국 전체가 가톨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클로비스는 10년 전에 로마 총독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하면서 갈리아에서 로마 세력을 쫓아내고 프랑크 왕국을 세웠으며, 그 뒤 계속 영토를 넓혔다. 현재 대성당의 서쪽 정면 윗부분에는 클로비스의 개종에 대한 돌이 있다. 이 돌은 ‘왕들의 갤러리’ 한가운데 있고, 그 양쪽에 프랑스의 역대 왕과 그리스도의 조상을 새긴 14세기 말의 조각들이 늘어서 있다. 셰례반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벌거벗은 클로비스 오른쪽에는 왕비 크로데질드가 있다. 493년에 결혼한 부르고뉴 출신의 이 왕비가 왕에게 개종을 권했다. 왕의 왼쪽에는 랭스의 수호성인인 레미기우스 대주교가 ‘성스러운 작은 제사 병’을 손에 들고 있다. 식장에 구경꾼이 몰려들자 레미기우스의 복사는 인파에 휩쓸려 대주교한테 성유를 건네줄 수 없었다. 그 때 하늘에서 비둘기가 내려와 성유가 든 병을 대주교에게 날라다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1223년의 루이 8세부터 1824년의 샤를 10세까지 거의 모든 프랑스 국왕이 이 성유로 대관식을 치렀다. 랭스 대성당이 프랑스 왕권과 얼마나 밀접하게 결합되었는지 보여 주는 예이다. 사면과 성당 건립 -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았던 당시의 대성당은 1210년에 불탔다. 조형미가 뛰어난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지금의 대성당은 1211년에 착공했다. 재건 공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주교는 면죄주인 사면장을 이용해 돈벌이를 했다. 돈을 내면 1년 동안 면죄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사제들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돈을 모으려고 인접한 주교구까지 침범해서 랭 대주교가 로마 교황한테 제소했을 정도였다. 랭스 대성당의 공사를 감독하던 핵심적인 건축가 장 도르베가 죽은 뒤인 1233년에, 대성당 건설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났다. 옥신각신하던 끝에 랭스 주민이 대주교인 앙리 드 브렌을 추방하고, 성당 건축용 석재로 거리를 요새화하는데 사용했다. 공사가 재개된 것은 성왕 루이 9세가 무력으로 진압한 3년 뒤였다. 13세기 말에는 신랑이 완공되었고, 높이 80m가 넘는 쌍탑은 15세기에, 익랑의 탑은 15세기 말에야 간신히 완공되었다. 랭스의 잔 다르크 - 1429년 7월 17일에 랭스는 다시 한 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마친 샤를 7세 앞으로 뛰쳐나온 잔 다르크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이제 하느님의 소망이 이루어졌나이다. 하느님은 폐하께서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러, 이 나라의 진정한 군주임을 만백성 앞에 보여주기를 바라셨나이다.” 그 해 남장을 한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군에 포위되었던 오를레앙을 해방시켰고, 이 승리는 백년 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대관식 때 국왕이 성유를 주면 신의 축복을 받는다고 민중은 믿었다. 1774년에도 대성당 앞에 수천 명의 병자들이 몰려들어, 루이 16세의 대관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랭스 대성당에서 마지막으로 대관식을 치른 왕은 샤를 10세였다. 1824년에 대관식이 있던 그 날, 빅토르 위고는 대성당을 방문했고, 근처에 있는 생레미 수도원도 찾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수도원의 부속 성당에는 클로비스에게 세례를 준 성레미기우스(생레미)의 무덤이 있다. 일설에는 생레미 수도원에 있던 몸이 불편한 종기기가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카지모도의 모델이었다고 한다. 랭스 대성당을 세계적으로 알린 사람은 독일 작가 테오도르 폰타네였다. 1870년 어느 날, 서쪽 정면에 서 있던 폰타네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봐야할 곳은 어마어마한 장식으로 쥐덮인 문만이 아니라 긴 프리즈도 있다. 프리즈 끝으로 갈수록 장식이 늘어나며, 각이 구부러져도 이어진다. 마치 종이 띠를 상자에 붙이려 하는데, 띠가 더 길면 양쪽 끝을 구부린 다음 옆쪽으로 돌리는 것과 비슷하다.” 폰타네가 인물상을 세어 보니 무려 2000가가 넘었다고 한다. 벽을 온통 뒤덮을 만큼 많은 조각 장식이 랭스 대성당의 특징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서쪽 정면 가운데 문 왼쪽 기둥에 있는 성요셉 상이다. ‘랭스의 미소’라고 불리는 이 조각은 풍자와 장난기가 섞인 미소를 띠고 있지만, 경건하고 속세를 떠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이 조각은 너무나 유명해서 이것을 만든 무명 작가를 ‘요셉의 대가’라 부를 정도이다. 서쪽 정면 중앙부에 있는 지름 12m짜리 장미창도 멋지다. 삼신랑인 대성당은 안길이가 138m, 익랑부를 포함한 너비가 50m, 높이가 38m이다. 서쪽 정면의 ‘왕들의 갤러리’에서는 늘어선 벽감의 가느다란 장식이 13세기 프랑스의 돋을새김이 얼마나 높은 예술성을 지녔는지 잘 보여 준다. 1914년 9월에 독일군의 포격으로 프랑스 고딕 양식의 최고 걸작인 랭스 대성당은 큰 피해를 입었다. 중세의 커다란 스테인드 글라스는 대부분 산산조각 났고, 익랑에 있던 13세기의 단색 스테인드 글라스만 남았다. 대성당 벽이 일부 불에 탔으며, 조각상도 부서졌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 때에는 주민이 하나가 되어 성상을 부수려는 혁명파의 손에서 건물과 성상을 지켜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포탄 287발이 떨어지는 바람에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종루에 정찰 부대를 배치해서 공격 목표가 딘 것이기 때문에 독일군만 탓할 수도 없다. 1918년에 미국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대성당 복구 공사가 시작되었다. 건축가 앙리 드뇌는 불에 탄 나무 지붕을 콘크리트 구조물로 바꾸었으며, 파손된 조각도 새로 단장했다. 1937년 10월 18일에 대성당은 다시 성별식을 가졌다. 러시아 태생의 화가 마르크 샤갈은 이 곳에 옛 스테인드 글라스를 모델로, ‘이삭의 희생’,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클로비스의 세례’, ‘성유를 바르는 루이 9세’를 그려넣은 새로운 스테인드 글라스를 완성했다. 대성당에는 지금도 전쟁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파손된 조각상은 예전에 주교관이었던 토 궁전(현재 유네스코가 관리)에 전시해 놓았다. 또한 이 곳엣는 아라스직 태피스트리, 종교 보물인 금 세공품, 장식 닫집 외에 황태자가 대관식 전날 밤을 보낸 방도 보존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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