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上의 魂

孝順王后趙氏 英祖大王 御製 墓誌

뚜르(Tours) 2007. 8. 10. 15:52

원제:孝順王后趙氏 英祖大王 御製 墓誌

 

 

< 기 록 문 >

 

 

영조 대왕 지음.

효순왕후 족후손 조면희 번역

 

 

 

 

이글은 효순왕비의 무덤에 넣은 지문(誌文)으로서 임금의 신분인데도

그 며느리를 사랑하고 아끼는 감정이 어느 사람의 그것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매우 진솔하여 꾸

밈이 없어보인다. 아울러 영조대왕의 인간적인 면모와 문학적 재능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풍양조씨> 세록(世錄)에서 옮겨옴.

 

 

나의 며느리 효순현빈(孝順賢嬪)은 풍양조씨이다.<세계 생략,주)에 기재>. 현빈은 우리 아바마마(숙종)가 즉위하여 계시던 을미년(1715년,숙종41) 12월 14일에 서울의 동부(東部) 숭교방(崇敎坊)에서 태어났다. 현빈이 태어나기 전, 그의 어머니 이씨는 태몽으로 어떤 사람에게 붉은색 붓「彤筆, 붉은 색은 궁궐의 상징」을 받았다고 한다.

 

 

현빈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질이 온순하고 곧았으며 놀이를 하는 데도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 달랐다고 한다. 내가 왕위에 나아간 지 3년째 되던해인 정미년(1727년, 빈 13세)에 그를 나의 아들인 효장세자빈으로 뽑아서 맞이하였는데 비록 어린 나이지만 시부모를 받들고 모시는 절차에 있어서 공손함과 성의를 다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두 어머니「慈聖, 숙종 계비 인원김씨와 경종 계비 선의 어씨)께서는 그를 아끼고 사랑하여 주었다.

 

 

그런데 아하, 애�구나! 그가 시집온 그 다음해 11월 16일에 효장이 죽고 말았으니 말이다. 예로부터 이 세상에는 젊은 나이에 과부된 자가 어찌 없을까마는 우리 빈 같은 사람이 또 있었겠는가? 장사를 치르던 날 너무 슬퍼하고 애통해서 물 한모금도 먹지 못하기에 내가 여러 가지 말로 타일렀더니 빈은 울먹이면서 대답하기를, “무엇보다도 후사가 없게 되었으니 살아서 무엇하겠사옵니까?” 하였다. 나도 눈물을 뿌리면서 간신히 답을 하였고 어머님인 <자성>께서도 지성으로 타일러 빈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게 하였었다. 그리고 초상에서부터 대상까지의 모든 범절에 있어서 빈은 어른과 조금도 다름없이 예절을 잘 지켜 나갔고, 여러 때 치러야 하는 많은 제사 의식을 몸소 돌보았었다. 그러나 빈의 기운이 늘 위태로운 듯하여 3년상이나 무사히 치를까하고 처음에는 몹시 근심하였었다. 게다가 더욱 안타까운 일은 상복을 입은 몸으로 성인의식(成人儀式)인 가계(加계, 비녀를 꽂는 예절)를 행하는 일이었다.

 

 

세자가 죽은 무신년(1728년, 빈14세) 이후부터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인 우리 구부(舅婦)가 서로 의지하여 슬픈 마음을 달래곤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빈은 의지할 곳을 찾아 돌아갔지마는 나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는다는 말인가?

아하! 지금 생각하니 빈은 비록 세상에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지마는 웃어른을 섬기는 절차는 게을리 하지 않고 늘 한결 같았었다. 그뿐 아니라 고치기 힘든 기질(奇疾)을 앓는 중에도 양전(兩殿)인 시어머니께 대하여서도 며느리의 예절을 깍듯이 다하였다.

 

 

선의왕후(宣懿王后, 경종비 어씨)의 국상이 세자의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빈은 그 때 더욱 비통해 하였다. 그러한 빈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 나의 마음이 지금 와서 더욱 측은하여진다.

 

 

빈의 성품은 본래 소박하여 사치스럽지 않았고 늘 조용한 몸가짐을 하였으며, 마음을 곧게 가져서 세상의 어떤 훌륭한 사람들과 비교하여도 조금도 손상됨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친정 숙부(叔父)가 정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속으로 근심하였었는데, 그가 벼슬자리에서 해임이 되었다고 하면 기뻐하였고, 임명되었다고 하면 얼굴을 찡그린 것은 친정 친척들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빈은 이러한 마음을 표준으로 삼아 그러한 내용을 적어 친정 형제들의 처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 그 편지의 내용을 반드시 그들의 남편에게 보여준 뒤에 보도록 하였다. 이로 보아 빈의 근엄(謹嚴)한 생활 태도를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친정 부모인 풍릉부원군 내외의 초상이 가까운 수년 사이에 겹쳐 났으니 빈의 효성스러운 마음으로 그 슬픔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런 중에도 지금까지 버티어 왔으니 오히려 다행스럽다고 하겠다. 그리고 빈은 언제나 먼저 죽겠다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 소원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또 남편인 효장 세자가 죽은 동짓달에 죽었으니 빈에게는 유감스러울 것이 없겠다.

그러나 내가 애통해 하는 것은 세상에 어느 구부(舅婦) 사이보다도 나와 빈과의 사이에는 특별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구부가 서로 마음을 알아주며 의지해 산 것이 지금까지 25년이 되었는데 이제 또 나를 알아주는 효부(孝婦)를 영결하게 되었다. 앞으로 빈을 추모하는 감정과 슬픈 마음을 다시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털어놓는다는 말인가.

 

 

살아생전에 빈이 행한 효성을 붓으로 다 기록하기는 어렵더라도 그 대략만이라도 여기 적어 보겠다.

빈은 평소에 스스로 먹는 음식은 거친 반찬 두어 가지밖에 안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먹지 못하고 남겨 두곤 하였다. 근래에 와서 내가 음식을 적게 드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어서 내가 혹시 빈궁에 들어가게 되면 빈은 손수 부엌에 나아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들이곤 하였다. 그의 지극한 효성으로 만들어진 음식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잇달아 나왔으며, 또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이 맛있는 음식을 미리 만들어 놓기도 하였었다. 그리고 방안의 안석(案席)이 차가울까 두려워 안석 위의 방석을 방바닥에 깔아두어 늘

따뜻하게 하였으니 옛사람이 자신의 체온으로 이부자리를 덥히었다는 효성이 이보다 더 나을 것이 있겠는가?

 

 

빈은 하루에 식사를 겨우 한 끼를 하였고 그것도 몇 술밖에 안 들었는데 내가 먹다가 남긴 음식만을 먹었다. 그리고 내가 밥을 많이 먹으면 기뻐하면서 빈도 좀 더 많이 먹었고, 내가 수저를 곧 놓아 버리면 빈은 밥을 먹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밤을 빈은 늘 직접 삶아서 올렸는데 빈이 죽던 날에도 삶은 밤이 상에 차려져 있었다. 그것을 나에게 올리려고 하다가 병이 위독하여 뜻대로 못한 것이다. 참으로 애달픈 일이었다.

 

 

빈은 올해에 들어와서 나를 위하는 마음이 더욱 지극하여 내가 빈의 궁에 갔다가 돌아오면 빈은 문까지 따라 나와 전송하였는데 내가 따라 나오지 못하도록 할까 두려워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따라 나온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죽음에 임박하여 그의 마음에 무엇이 씌어서 그런 것인가?

 

 

아하! 내가 지방에 행차하여 자고 오는 날이면 빈은 정장을 한 채 앉아서 밤을 새우고 내가 역말을 시키어 보낸 쪽지들을 혹시라도 사람들이 밟을까 두려워 그것을 모아 봉투에 넣고 그것을 보낸 날짜들을 기재하여 두었으니 이 또한 빈의 경근(敬謹)한 성품의 일단이다. 내가 작년, 온천에 행차한 일이 있었다. 내가 가는 도중에 빈은 음식을 잇달아 보내어 주었다. 내가 그 때 보낸 쪽지들을

빈의 손그릇 속에서 우연히 발견하였는데 거기에는 보낸 날짜와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의 이름까지 기재되어 있었다. 나는 이 쪽지를 보고 빈의 효심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이것들을 빈의 관속에 몸소 넣어주었다.

 

 

교묘하게도 내 아들 효장세자의 기일(忌日)이 바로 빈의 사고(私姑, 친시어머니, 효장 생모) 기일과 같은 날이다. 그리하여 해마다 그 한 달 전부터 추모를 하기 위하여 소식(素食, 거친밥을 먹음)을 하였는데 그러면 토황(吐黃)하는 병이 생겼고, 그 병이 여러 해 쌓여 죽음의 빌미가 되고 말았다.

 

 

남편이 죽은 날 죽고 싶은 것이 빈의 본래 뜻이었는데, 병이 위중하던 밤, 초저녁에는 나에게 수라(水刺, 진지)를 들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날 자정이 지난 뒤에는 ‘저는 지금 갑니다.’ 하는 소리만 한 마디 들리곤 다시는 수라를 들라는 말을 더 듣지 못하였다.

 

 

아하! 지난 무신년에 내가 눈물을 섞어가며 효장의 행록(行錄)을 가지고 지문(誌文)을 지었는데, 지금 또 효부(孝婦의 행록을 가지고 눈물을 섞어가며 이렇게 지문을 기록하는구나. 멀리 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창자를 끊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신미년(1751년, 영조27) 11월 14일은 효장의 기일에서 꼭 하루가 가려있는 날이다. 우리 빈은 창덕궁 의춘헌(宜春軒)에서 죽었으니 거기는 곧 건극당(建極堂)의 동쪽에 있는 집이며 내가 옛날에 거처하던 집이다. 빈은 이 세상에 37 년을 살았으며 지난 을묘년(1735년, 영조11)에 현빈(賢嬪)이라는 호로 부르도록 명령하였었는데, 빈이 죽은 다음해인 임신년 정월(正月) 11일에는 효순(孝順)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애달프다, 나의 효부여! 이제 죽은 뒤에 얻는 시호도 얻었다. 이달(정월) 22일에는 효장 세자의 묘 왼쪽에 서향으로 안치한다. 그리고 무신년의 예대로 행록을 가지고 묘지문(墓誌文)을 만들고, 또 내가 효장의 지문으로 썼던 글자를 모아 모사(摹寫)하게 하고 거기에 빠진 글자는 다시 새겨서 보충하게 한다. 내가 이제 늙은 나이에 자식과 며느리의 행록을 짓게 되니 옛날의 슬픔과 오늘날의 애통함을 무엇에 비유하겠는가? 눈물을 흘리며 글의 내용을 불러 쓰게 하다 보니 밤이 깊었다. 이 글을 깊게 새겨서 앞으로 오래도록 갈무리하여 전하게 하라.

 

 

이글을 쓴 때는 내가 왕위에 나아간 27 년 11월이다.

 

 

1)효순왕후:영조의 맏며느리이며 효장세자의 부인. 다음은 원문에 적힌 효순왕후의 세계인데 본문에서는 그것을 생략하기 위하여 각주에 기재한다

 

‘본관은 풍양.고려 개국 공신 상주국 삼중대부 문하시중 평장사 맹(孟)의 후손이다. 11대조가 부사이며 증사복시정 신(愼)인데 이조 태종의 평민 시절의 은사로 죽은 뒤에 무덤을 지키는 군대를 파견하였다. 고조는 증판서 민(珉)이고, 증조는 증좌찬성 상정(相鼎)이며, 할아버지는 증영의정 인수(仁壽)인데 문순공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아버지는 분무공신 좌의정 풍원부원군 문충공 문명(文命)이며, 어머니는 양영대군의 후손으로서 동지 중추부사 증판서 상백(相伯)의 딸로 정경부인 이씨(李氏)이다.’ 효장세자는 사도세자의 형으로 영조가 즉위한 원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책봉된 4년만에 10 살의 나이로 죽게 되고 뒷날 사도세자도 죽게 되니 사도 세자의 아들 정조(正祖)가 왕위에 나아가자 큰아버지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대하고 그의 대를 이은 것으로 정통을 삼았다. 그리하여 효순왕후는 진종의 비인 것이다.

효순왕후릉 :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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